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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nyR51mkkLik
본문 예수 앞에 나오면 (히 10:19-25)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8-04-22

히브리서 10:19-25 예수 앞에 나오면

 

지난주일 오후에는 전교인 노방전도를 실시했습니다. 오후에 참석한 130명의 성도들이 수성유원지와 수성못역 그리고 황금역에 나아가 전도했습니다.

가시지 못한 분을 위해 사진 몇 장 보여드리겠습니다.

<ⓛ 성도들 전체가 찬양하는 장면 ② 관혁악단 아이들의 연주 ③ 청년들의 찬양 ④ 의료전도 모습 ⑤ 일반 성도가 전도하는 모습>

 

전도를 해 보니 어떻습디까? 여러 반응이 나왔을 것입니다.

감사하다고 하신 분, 다른 종교라고 하신 분, 귀찮다는 표정으로 생하니 지나가시는 분, 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관심가진 분 등 다양하게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의 경우 “야 기독교인들 참 별나다, 왜 불교, 천주교인들은 전도하지 않는데, 기독교인들만 저렇게 귀찮다 싶을 정도로 전도하는가?” 생각이 될 것입니다. 오늘 나오신 분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도 귀찮게 해서 오늘 하루 내가 교회에 나가준다는 심정으로 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별나게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보니 좋으니까 그럽니다.> <자신이 교회에 다녀보니 너무 너무 좋으니 그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 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25절)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열심히 권해서 교회로, 예수님 앞으로 나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자, 그럼 예수 앞에 나오면 무엇이 좋은지? 살펴보십시다.

 

첫째, 예수 앞에 나오면, 죄를 용서받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해 10월 개봉되었던 남한산성이란 영화를 보신 분들은 남한산성의 영화 배경이 되던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시대는 1636년 4월입니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새로운 군신관계를 요구합니다. 청의 압박이 점차 거세지자 이에 대한 조선의 조정은 둘로 나눠집니다.

청과 화친을 통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

그리고 청과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였습니다.

조선의 왕 인조는, 척화파의 손을 들어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 1636년 12월, 청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게 되고, 병자호란이 발발합니다.

청이 순식간에 한양 근처까지 당도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지만 길이 막혀 실패를 합니다. 결국 한양에서 동남쪽으로 24km 떨어진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신하게 되고, 점점 좁혀오는 청의 공격으로 인해 남한산성에 고립이 됩니다.

그 남한산성에 고립된 47일간의 이야기가 영화로 소개되었습니다.

결국 추위와 굶주림, 적의 거센 압박과 무리한 요구로 고통을 받던 인조는 1637년(정축년) 2월 24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함으로 병자호란은 마무리 됩니다. 국치(國恥,국가적인 치욕]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잘 들어보십시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 한양에 거주하던 많은 부녀자들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서 정조를 잃게 되었습니다. 정조를 생명처럼 취급했던 조선시대였으니 많은 가정에서 가정이 파탄이 났고, 사회는 어수선해졌습니다.

 

나라가 평정된 다음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를 심도 있게 의논했고 묘안을 한 가지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홍제동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모든 부녀자들은 이 못에 가서 몸을 씻도록 어명을 내렸습니다.

어명이 내려지자 한양에 사는 모든 부녀자들은 홍제동 연못에 가서 몸을 씻었고, 그 후부터는 부녀자들의 죄를 씻은 것으로 인정하고 여인의 정조에 대하여서는 재론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한걸음 나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홍제동 연못물이 부녀자의 죄 문제를 해결했다면,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없겠습니까?

 

오늘 말씀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라고 합니다.

예수의 피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려면, 먼저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면서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이 사람아, 내가 왜 죄인이냐?>라고 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부인합니다.

그렇게 죄인임을 부인하는 이유는? 죄를 바로 정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적어도 죄라는 말이 700번 이상 나옵니다.

죄라는 말이 구약에는 카타(chata), 신약에는 하마르티아(hamartia)로 나오는데

구약의 '카타'(522회)의 의미는,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바른 과녁에서 벗어나면 다른 과녁을 맞히게 되지요. 도덕적인 악, 우상 숭배, '유대인들의 의식적 측면에서의 죄들' 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하마르티아'(227회) 역시 <과녁에서 비껴 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진 참고 — 과녁 사진>

우리나라는 양국에서 만큼은 세계 1위이니 잘 아실 것입니다.

궁사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50m, 70m, 100m 앞에서 과녁을 향해 활을 쏩니다. 그런데 쏜 화살이 10점 골드 가장 중심에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서 7점, 6점을 맞추거나 아예 바닥에 떨어지면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가 내 삶의 화살이 하나님이란 과녁 정 중앙에 맞추면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화살을 맞히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많이도 말고 세 가지만 생각해 보세요.

<말 —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말씀만 합니까?>

<마음의 생각 –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생각만 하십니까?>

<행실 –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십니까?> 이 세 가지만 가지고 판단을 해도 우리는 영락없이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신이 의인이라고 해도, 실상은 죄인으로 더럽고 추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인들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만날 방법이 없으니까?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잡아서 그 피로 제사를 드리면 죄를 용서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 해 두해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죄 없으신 완전한 완전하신 몸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우리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나아오기만 하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어머니가 딸에게 예쁜 옷을 입혀서 밖으로 내보내며 흙탕물에 가서 놀지 말라고 했습니다. 딸은 그러겠다고 하고 나가 애들한테 옷 자랑을 하며 뛰어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흙탕물에 넘어져 그 예쁜 옷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야단이 났습니다. 딸아이는 쩔쩔매며 걱정하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마을의 빈 창고에 들어가 숨어서 걱정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놀다가 집에 들어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들어오지 않자, 딸을 찾아 나섰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혹시 아이가 유괴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안절부절 못하며 가슴을 졸이며 딸 친구의 집을 집집마다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늦어서야 한 어린이가 빈 창고에 있다고 귀띔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어두컴컴한 밤에 빈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 창고 구석에는 자다가 깬 딸아이가 겁에 질려 울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반갑고 불쌍해서 딸을 끌어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여러분! 어머니 품으로 돌아온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머니는 흙탕물에 넘어져 더러워진 옷, 더러워진 몸을 씻겨주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을 것이고, 행복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어머니처럼 죄 투성이가 되어 힘들어하는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만 믿으면 우리의 죄는 사해지고, 우리는 평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후에 부를 찬송 287장 1절 가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이 복을 성도님들과, 오늘 처음으로 오신 분들이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 앞에 나오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근원이란 말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지만, 그 물이 계속해서 나오려고 하면 상수원인 댐과 저수지에 물이 가득히 차 있어야 합니다. 만약 지난해처럼 가뭄이 심하여 댐의 저수율이 바닥이 나면 수도시설이 잘 되어 있더라도 단수를 하고, 제한 급수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도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복을 원한다고 해서 다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지? 그 근원지를 모르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복의 근원, 복의 저주지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이 말씀에서 <내가>는 =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복덩이가 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다는 복은 <물질의 복>의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명예의 복, 건강의 복, 출세의 복, 복덩이로서의 복, 후손의 복, 자녀의 복 등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복을 넘어서는 복이 들어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만 그런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 이삭도 그런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의 아들 – 야곱도 그런 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혼자 하란으로 피신해 갈 때 그는 벧엘에서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 28:15)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지나고 다시 그 땅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약속대로 엄청난 복을 그에게 부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마다 복을 받았습니다.

귀신들린 자, 병든 자는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그의 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면,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배고픈 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배부른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역 가운데 복을 빌어주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성만찬 예식시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마 26:26), 승천하시기 직전도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고”(눅 24:50)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종교가운데는 축복의 종교도 있고, 반대로 저주의 종교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입니다.

지난 8일 인문학콘서트 강사로 오셨던 김진경 총장님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복을 전달하는 사역을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 분으로 통해서

부산에 고신대학교, 중국 연변에 과학기술대학교, 북한 평양에 과학기술대학교가 설립되어 지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분에 대해 쓴 <사랑주의>란 책을 제가 다 읽어보았는데, 맺는말에는 총장님이 <미국에서 조찬기도회를 하고, 영국 상하원의 초청을 받아 연설한 후 그 뒤에 일어난 반응을 써놓았습니다.>

 

연설을 들은 이스람권에 속한 사람들의 반응을 제가 조금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 알라신은 한 사람이 죽으면 열 사람, 백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 정의이고, 복수하다 죽는 것이 바로 순교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복수라는 단어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이젠 피곤합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주의(복음)를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참 복을 가져다주는 분이 누구인지 말입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 앞으로만 나오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받고 싶어 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셋째, 예수 앞에 나오면, 영생을 받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말씀이 일곱 번 나옵니다.

그 중에 다섯 번째 말씀이 요한복음 11:25-26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상황은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3일까지는 그 영혼이 떠돌다가 시체로 돌아올 수 도 있는데, 3일이 지나면 시체가 변색되고 혼이 그 시체에게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나사로가 죽은 지 4일 만에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나사로에게는 누가 보더라도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뿐만 아니라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기는 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리고는 죽은 지 4일 된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입증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 백모(큰어머니)님 1주기 추도예배를 인도했습니다.

큰 어머니는 98세까지 사셨고요. 저희 아버님을 통해서 전도를 받으셔서 예수님을 믿고 권사님으로 잘 섬기셨습니다. 천국가신 것이 확실하기에 추도예배를 드려도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추도 예배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고인은 어디로 갔으며, 현재 나는 어디로 가는가?> 분명 백모님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데, 후손된 우리는 어디로 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물으면서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준비하면서 살아가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니라 산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음으로 끝난 종교가 아니라 부활하셔서 삶이 계속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의 종교만이 아니라, 영원한 종교입니다.

 

설교 후에 부를 찬송가 287장 후렴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 주(예수님)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예수님은 혼자만 영원한 삶을 사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고 누구 앞에 가는가? 가 정말 중요합니다. 경제학자 앞에 오면 경제에 관하여 배우게 됩니다. 정치학자 앞에 오면 정치에 관하여 배우게 됩니다. 그럼 예수님 앞에 나오면 무엇을 배울까요? 오늘 말씀대로 <구원을 배우고, 복을 배우고, 영생을 배웁니다.> 그리고 배우는데 그치지 않고 그 복을 누리고 살게 됩니다. 이 복을 누리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성도님들, 그리고 초청받아 나오신 모든 분들이 이 복을 누리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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