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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cplvwjzG6c4
본문 복음이 유럽으로 넘어가다(행 16:11-18)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8-03-04

사도행전 16:11-18  복음이 유럽으로 넘어가다

 

지금 우리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로를 따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바울이 소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성령님이 가지 못하도록 했고,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그 역시 성령님이 막았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드로아>에 내려와 머물게 되었는데, 드로아에서 밤에 마게도냐 한 사람이 우리를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환상을 통해 바울은 다음 선교지가 바다 건너 유럽이구나! 확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11-12절을 읽어보십시다.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네압볼리(항구)까지 갔고, 네압볼리에서에서 빌립보까지는 육로로 걸어서 가게 되었습니다.

거리로 말씀드리면, 드로아에서 — 네압볼리까지는 약 200km가 됩니다.

네압볼리에서 – 빌립보까지는 15km 인데 성경을 보면 200km 바닷길을 이틀 만에 갔다고 합니다.

 

같은 코스를 3차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오게 되는데 그때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20: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3차 전도여행을 하고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돌아올 때는 5일 걸린 길이었는데, 오늘 본문에는 2일 만에 갔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본문에서는 그 일을 <직행하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직행 ............. 하면, 연세 드신 분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지요.

과거에 많이 이용했던 버스입니다. 과거에는 시외버스가 두 종류가 있었지요. <하나는 직행, 하나는 완행입니다.>

 

<안동 – 대구, 직행>이라면 안동에서 대구까지 곧장 가는 버스를 말하지요.

하지만 <안동 – 대구, 완행>이라고 하면, 안동에서 대구까지 가면서 그 중간에 (탑리, 의성, 군위 등) 있는 모든 버스 정류소는 다 들리게 됩니다. 시간이 많이 차이가 나이지요.

 

지금 사도바울 일행이 아시아를 넘어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길이 <직행>이었다는 것입니다.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5일 걸릴 길을 2일 만에 도착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배 뒤에 바람을 불게 하셨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전도 팀을 이끌고 있는 하나님이 급하시구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유럽에 있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안타까워하면서 급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 일행은 그렇게 급할 일이 없습니다. 그저 배가 도착하는 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전도를 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유럽의 선교가 급하시니 그들을 빨리 인도하시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한 영혼에 대한 간절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는, 바울 일행이 순풍이 불어서 직행할 때도 있었지만, 반대의 경우(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순종하면서 그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6-27 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이렇게 육신의 피곤은 물론이요, 생명의 위험도 마다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습니다.

또 바울은 빌립보서 1:20-21 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이 겪은 고난, 바울이 고백한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상태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들도 나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열심히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항존직은 항존직 대로, 성도들은 성도대로 열심히 섬겨서 지금 힘들다. 영적으로 다운되어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을 보면 그런 말을 못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 숨은 보석처럼 박혀 있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 앞에서는 그런 말을 못합니다.

복음의 불모지인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님들을 보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를 지금처럼 만들어 놓기 위해 헌신한 믿음의 선배들 앞에서는 그런 말을 못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성장은 멈추고 이렇게 시끄러운 이유?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 한국교회 항존직들이 제 위치를 지키지 못하는 이유? 간단합니다. <영적 기준을 너무 낮게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영적 기준을 높게 잡으시기 바랍니다.>우리보다 월등한 사람이지만 오직 복음을 위해서 헌신한 그들을 닮아가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항존직이 되어서 <수요예배를 나와야 하나? 새벽기도를 나와야하나?> 이 정도에서 벗어나 바울을 닮아가고, 믿음의 선배들을 닮아가도록 영적 수준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빌립보에 도착한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다.

13-15절을 보십시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선교지 빌립보에 도착했는데, 막상 빌립보에 도착해보니 그들을 영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선교하려고 왔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4사람입니다. 바울, 실라, 디모데, 의사 누가 ... 4명의 남자가 복음을 전하려고 빌립보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자신들을 영접하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곳이 빌립보였습니다. 본문에서 빌립보를 소개하기를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다> = 숫자의 의미가 아닌 <가장 큰 성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다> = 이 말을 누가가 의도적으로 쓴 것은, 바울의 선교의 꿈인 로마의 복음 전파가 드디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역 명에도 생각할 내용이 많지만 시간관계상 생략합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과 일행은 분명 – 회당을 먼저 찾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하든지 먼저 회당중심, 유대인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립보에서는 – 회당은 없었고, 기도처 밖에 없었습니다.

13절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회당, 기도처의 차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회당은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는 <성인 남자 10명이 있어야 합니다.> 여자가 50명이 있어도 남자가 10명이 안되면 회당은 만들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토라(모세오경)가 안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시기관이 필사한 성경이 안치되어 있어야 회당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기도처는, 성인 남자 10명이 안 되고, 토라가 없지만 신앙생활을 위해 모이는 곳이 <기도처>입니다. 정상적인 회당을 지을 수 없으니, 산이든, 숲이든, 동굴이든, 빌립보처럼 강가이든 기도할 수 있는 곳을 정하고, 조용한 거기에서 안식일을 보내고 경건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그곳이 기도처인 것입니다.

시편 137:1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라고 하는데 그곳도 바벨론 포로지에 있었던 기도처였던 것입니다.

 

빌립보에도 회당이 없었다는 것은 과거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정책으로 인해 유대남자가 다 추방되어 지금 현재 유대인 남자 10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일행은 수소문을 해서 기도처가 있는 곳에 안식일에 방문을 합니다.

강가, 조용한 곳을 기도처로 삼은 여인들이 모인 곳에 바울이 찾아가서 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 중에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복음을 듣고 영접을 합니다.

14절입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4절 말씀과 15절 말씀에서 <루디아>가 어떤 여인인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① 루디아(14절) –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가문의 이름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안동댁, 경주댁”으로 불렀듯이, 가문의 이름으로 봅니다. <루디아 지방의 여자>라는 말입니다.

②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14절) – 요한계시록 전반부에 나오는 소아시아 7개 교회 중에 두아디라 교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생산되는 자색 옷감을 파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본점은 두아디라에 있고, 지점을 빌립보에 낸 여성 사업가입니다. 2,000년 전 여성 사업가 멋지지요. 남편은 일찍 죽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③ “하나님을 섬기는 자”(14절) -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④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준 자”(14절) -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전도 할 때 성령님께서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주님께서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데, 루디아는 <주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설교를 듣는 모든 분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 4가지만 살펴보아도 루디아가 보통 여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15절을 보세요.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복음을 영접한 루디아에게서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여인인지 두 가지 정도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⑤ 지도력이 있는 자

루디아가 예수를 믿자마자 어떻게 합니까?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13절)라고 합니다. 루디아는 물론이요 그 집 모든 식구들을 다 세례를 받게 합니다. 가이사랴에 있었던 고넬료도 그런 인물이지요? 기도응답을 받고 베드로를 초청해 부흥회를 할 때, 친척, 친구들을 다 모이게 했고, 결국은 성령님이 임하자 자신은 물론이요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지도력이 루디아에게도 있었습니다.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 여러분 이런 영적 지도력을 여러분들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⑥ 헌신적이고 용기가 있는 자

루디아는 세례를 받은 후 바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15절 중반절에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대단한 말씀입니다. 루디아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아직 빌립보에서 처음 믿는 여자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새가족입니다. 그런 그가 선교팀 총 4명이지요. 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 이 사람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여자이기에 의도적으로 그 말을 하지 않고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하면서 = 하면서 나를 여자로 보지 말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보고 우리 집을 선교센터로 삼고 머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루디아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인이 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루디아처럼 헌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 같고, 교회에 다니는 것 같고, 직분을 받은 것 같지만, 자신이 신앙의 중심이 되어서 믿음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하여, 주의 종을 위하여 무엇 하나 내 놓지 못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한 번 점검해 보세요. 나는 루디아처럼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주의 종을 위하여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낌없이 내어 줄 수 있는 자인가?

아니면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하여, 목회자를 위하여 단돈 몇 만원도 내 놓기 힘든가? ...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루디아와 같기를 바랍니다.

 

자 정리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그렇게 급하게 빌립보로 바울 일행을 오게 한 이유는? 바로 루디아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루디아가 바로 <유럽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고> 그리고 <루디아의 집이 빌립보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루디아 한 사람을 통해 유럽선교의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지금 현재 내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생긴 것도 별로라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만 하면 여러분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이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고,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단락을 바꾸어 빌립보에서 일어난 첫 번째 기적을 살펴보십시다.

16-18절 같이 보십시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바울 일행은 강가 기도처에 안식일 이후에도 계속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점치는 무당들, 작두 타는 무당들을 보는데 그들은 <귀신의 역사>로 통해서 점치고 작두를 탑니다. 만약 귀신들리지 않고 점쳐주는 자는 사기 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일행이 걸어가면 따라 와서 소리를 지른다(사복음서에도 동일함)는 것입니다. 뭐라고 소리를 지릅니까? -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다. / 이들은 구원의 길을 너희들에게 전하는 자들이다.>는 것입니다. 같은 업종의 사람이 같은 업종의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듯이, 성령 안에 움직이는 바울을 귀신이 정확하게 알아 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다. / 이들은 구원의 길을 너희들에게 전하는 자들이다.>며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바울 일행을 소개하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말을 하는 자가 <귀신이 들린 여종>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날 동안 소리를 질러대자, 바울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귀신들린 여종에게로 돌아서 선포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8절) 이 말이 떨어지자 여종을 움직였던 귀신이 나왔습니다. 귀신들인 여종을 정상인으로 고쳐준 것입니다.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기적을 통해서, 지금도 귀신을 쫓는 데 두 가지 가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바울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영적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기도에서 나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성전미문에 있었던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쳤듯이,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우리의 이름에는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나오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귀신을 쫓아낸 이후에 일은 다음 주일에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루디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도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줄 믿고,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고침 받아 늘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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