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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TKXjbvH-nwk
본문 사도행전 17:16-34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8-04-15

사도행전 17:16-34 철학과 우상의 도시에서 변론하다.

 

지난 주일에는 베뢰아에서 선교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러웠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베뢰아 성도들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그렇게 선교하기 좋았던 베뢰아에서도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둔 채, 아덴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덴 .... 정확한 현재 명칭은 그리스 <아테네>입니다.

여러분 그리스 <아테네>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워낙 유명한 도시기에 여러 가지가 생각날 것입니다.

 

① 마라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라톤의 발상지를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주전 490년 11만 명의 페르시아 군과 / 1만 1,000명 가량의 아테네 군이 맞서 싸웠습니다. 10:1의 싸움이었기에 누가 보더라도 아테네 군이 패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테네군은 기적적으로 승리를 합니다.

이 기쁨의 승전보를 병사 필리피데스”가 전쟁이 일어난 마라톤 평원에서부터 아테네까지 42.195km를 달려가 알렸다는 것에서 마라톤 경기가 유래되었습니다.

 

② 세계문화유산 1호인 <파르테논신전>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파르테논이란 ‘처녀의 집’이라는 뜻으로 제우스의 딸이자 지혜와 이성, 순결의 여신인 아테나를 기념하는 신전입니다.

이 신전의 폭은 30.8m, 높이는 10.4m, 길이는 69.5m이며 46개의 석주가 둘러서 있습니다. 신전을 떠받치는 기둥은 안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세웠고, 910m의 상공의 한 점에서 만나도록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주전 438년에 완공된 건축물로서 그 기술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문제는 이 <신전>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우상을 모시기 위해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파르테논 신전 외에도 주변에 7개의 신전이 더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아테네에 <300개의 공식 우상과 + 3만 여개의 신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아테네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역사가들은 아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덴에 있는 우상의 수는 헬라 전역에 있는 우상의 수보다도 더 많다.”

“바울이 들어간 아덴이라는 곳은 도시 전부가 신에게 드리는 하나의 제단이다.”

 

③ 민주주의 꽃 핀 곳

④ 헬라문화가 꽃 핀 곳(예술가, 미술가, 음악가들이 나옴)

⑤ 철학의 도시 -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델레스 와 같은 분들은 아테네에서 태어나고, 가르치시고, 아테네에서 죽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아테네가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가?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 바울이 선교하기 위해서 도착했습니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의 마음을 16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두고 혼자 온 바울은 그들을 기다리면서, 아덴을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아덴을 돌아본 바울의 마음이 <격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격분이라는 헬라어는 <파록시노(paroxuvnw)>인데 이 말에서 의학용어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다>라는 단어가 만들어집니다. 격분은 한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유지된 분노>를 말합니다.

왜 격분이 났다고 합니까?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16절)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덴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유는 철학의 도시가 = 한 편으로 우상의 도시라는 것입니다.

철학자들 얼마나 냉철한 사람들입니까? 그런 냉철한 철학자들이 있는 도시에 우상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바울이 선교한지 2,000 세월이 지난 지금 세계는 어떤지 아십니까?

일본만 해도 세계 경제대국, 세계를 움직이는 학자들이 많지만, 800만종의 우상이 있습니다.

인도는 3,300만 종의 우상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도 할로윈(Halloween) 축제를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우상과 가까워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 주변에는 무속인 집을 쉽게 봅니다.

가정마다 부적을 붙이고 부적에 큰 효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하기 위해서 궁합을 보는 것,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점을 보는 것 등 우리나라에도 우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것을 보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의 마음이 / 바울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도시를 보면서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기독교인들에게 이런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그저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일에 화를 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나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일을 예를 들어볼까요?

- 성적으로 타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 동성애 문제, 동성애 축제인 퀴어 문화축제를 하는 것을 보면서 거룩한 분노가 일어 나야 합니다.

- 국민의 생활 속으로 무속 인들이 파고 드는 것을 보며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 아직도 개업을 할 때 고사를 지내는 것, 돼지머리를 갖다놓고 절하는 것을 보면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 궁합을 본다, 점괘를 본다는 자들을 보면서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바울이 가졌던 거룩한 분노를 우리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려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7-18절입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은 다른 곳에서처럼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을 만나서 전도하고,

또 장터로 달려가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과 변론하는 방법으로 전도했습니다.

바울이 장터에서 만난 전도 대상자들은 소위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들을 18절에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였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 현실주의자(미래나 내세는 상관할 것이 없다 현재의 행복이 제일 중요하다) 향략주의자(행복의 근원은 향락에 있다), 유물주의자 (쾌락을 물질에서 찾고, 육체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무신론자(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였습니다.

반대로 <스토아 학파>는 – 범신론자(‘신은 자연이요, 자연은 신이다’는 범신론을 믿었습니다.) 금욕주의자(육체의 쾌락은 허무한 것이므로 극기의 자세로 모든 정욕을 억제하고,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라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신(神)관, 세계관, 가치관, 생애 목적도 달랐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상대로 변론 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복음을 듣던 그들은 바울을 다른 곳에 데려가서 그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합니다.

그 내용이 19-21절입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시장에서 바울의 말을 듣던 철학자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려갔습니다.

<사진 2 – 아레오바고>

‘아레오바고’는 ‘아레스의 동산’이란 뜻으로 유력한 원로와 재판장이 모여 역사, 철학, 종교 문제를 토론했던 장소입니다.

여기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는 사람들,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서 새로운 학문이나 이슈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바울을 데리고 갔고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복음을 전합니다.

22-31절이 바울이 그곳에서 전한 내용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① 하나님께서 참 신이시다(22-25절).

②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밝혀주었다(26-28).

③ 회개에 대한 촉구입니다(29-31).

제가 이렇게 바울의 설교를 정리해서 그렇지, 사실 바울의 설교를 우리가 들어보면 그동안 우리가 다른 곳에서 살펴본 바울의 전도의 내용과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은 유대인들이다.

예수님은 죽으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명확하게 복음을 전했는데, 아덴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추측건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그들에게 바울은 자신의 지성을 총 동원해서 지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봅니다.

 

※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고민을 해보고 답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전교인 노방전도를 하겠습니다만, 보통 전도는 사람 따라 전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학교 교수님에게는 지적으로 전도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전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답은 <아닙니다.>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전도대상자가 그 누구든 그들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파스칼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큰 구멍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쾌락으로도, 명예로도, 철학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메꿀 수 있는 구멍이다.”

그렇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철학을 하고, 많은 지식을 가졌다 해도 마음속에 큰 구멍을 메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쉽게 실의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고,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들어가야 메워져야, 그의 인생이 행복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설교하며 그 본질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풀어서 전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설교의 결과는 32-34절에 나옵니다. 한 목소리로 읽어보십시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의 아덴의 선교의 결과는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도 성공했다, 아니 실패했다는 것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성공했다는 사람도 있고, 실패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주장을 우리는 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성공했다는 주장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덴에서 선교의 열매를 말합니다.

34절에 선교의 열매를 분명히 말합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선교를 해서 꼭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야 하고, 그들로 통해서 교회가 세워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선교는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도 분명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아덴에서도 보면 – 바울의 전도로 몇 사람이 믿었습니다.

믿은 사람들 중에 <디오누시오 / 다마리>가 있었습니다.

<디오누시오>는 – 아덴에 있었던 12인 재판위원회 회원 중 한 사람으로 지위가 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최초 아덴 감독이 되었으며 후에는 고린도의 감독으로 있다가 95년 경 도미티안 황제 때에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다마리>는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시대에 여자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덴에서 꽤나 알려진 귀부인이 엿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이렇게 몇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은 자가 있으니 아덴의 선교는 성공이었다고 말합니다.

 

둘째, 실패였다는 주장

이들은 성경 말씀에서 바울의 아덴 선교는 실패였다. 바울 자신이 실패였다고 인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를 몇 가지 말씀드리면

① 아덴에서는 박해가 없었다. - 그동안 바울의 선교여정을 보십시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에서 선교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날 때에는 항상 박해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원정박해단까지 동원되어서 바울의 선교를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아덴에서는 박해가 없었습니다. 박해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선교지를 고린도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패라는 것입니다.

 

②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이 영적인 침체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아덴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덴에서 성공했다면 영적인 침체에 빠질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진 바울을 예수님이 환상가운데 나타나 용기를 주셨고,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붙여서 고린도에서 사역하게 했습니다.

고린도에서부터 사역하며 바울은 이런 결심을 합니다.

중요한 몇 곳의 말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이런 말씀을 했다는 자체가 아덴에서의 실패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③ 변론을 통한 전도를 실패라고 생각했기에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 목사에게 변론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17절 “변론” 18절 “쟁론”이란 말이 나오는데, 아덴의 선교는 철학 중심으로 변론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였다고 판단했기에 변론하지 말라고 합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과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딤전 6:20)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이런 말씀을 통해서, 바울의 아덴의 선교는 실패로 봅니다. 일리(一理)가 있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실패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판단을 하든지 우리는 아덴에서 바울 사역을 통해서 두 가지는 꼭 배워야 합니다.

하나는,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덴을 영적으로 보면서 우상으로 가득함을 알고 <격분>했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으로 우리나라를, 문화와, 역사와, 인생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는, 바울의 마음에 있는 뜨거운 열정입니다.

마치 예레미야가 가졌던 불붙는 마음처럼 바울 속에 가졌던 이 영적인 뜨거움, 전도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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