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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KjmWCy_FUtQ
본문 사도행전 20:13-27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8-07-08

사도행전 20:13-27 에베소를 향한 바울의 고별 설교

 

우리는 사도바울의 3차 전도여행로를 따라 가며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림 자료> 3차 전도여행로를 보십시오.

3차 전도여행에서 핵심적인 곳은 <에베소>였습니다.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 사역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차 전도여행을 했던 곳을 순방하면서 양육에 힘썼고, 지난 시간에는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었습니다.

 

오늘 본문 13-16절까지 말씀은 <드로아에서부터 – 밀레도까지 여정>을 말씀합니다. 함께 읽어보십시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 ○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지도를 한 번 더 보세요)

드로아에서 출발한 바울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지금 <밀레도>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 급하게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16절b>

 

<바울은 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을까?>

세 가지 정도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당시 예루살렘은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헬라의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모았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헬라 사람들이 –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사람들을 위해> 헌금을 모은 것은 그 당시로는 상상치 못할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헌금은 단순히 물질만의 의미하지 않습니다. 헌금에는 <믿음, 사랑, 헌신, 정성>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귀한 헌금을 받은 바울은 빨리 예루살렘에 전하고 싶었기에 오순절 안에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 선교 보고를 하려고

제가 인도네시아나 중국에 가서 한 주간 보내고 돌아와서도, 우리교회의 흔적이 어떻게 남아있는지 여러분에게 보고하듯이 바울은 그동안 있었던 선교의 결과를 보고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고린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 각 교회마다 믿는 성도들, 세례받은 성도들이 얼마 정도인지 보고하고 싶어서 가고 싶어 했습니다.

 

셋째,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바울이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만 한 것 같지 않습니다. 바울을 오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 그럼 오늘과 다음 주일 생각할 말씀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오늘 본문 17절부터, 다음 주일 이어서 생각할 38절 말씀까지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평신도지도자를 초청해서 행한 고별설교와 권면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두 시간에 나눠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에베소를 향한 바울의 고별 설교>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7절 말씀부터 보십시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지금 바울은 밀레도에 있는데, 거기에서 45km 떨어진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초청했습니다. 여기에서 장로는 지금 교회직제로서의 장로가 아닌 <노인, 감독, 윗사람, 혹은 대표자>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교회 대표를 불러들였다는 것입니다.

 

왜 불렀을까요? (답은 더 볼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 입니다.)

여러분! 바울에게 에베소는 특별한 곳입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한 곳에 3년을 머문 곳은 에베소가 유일합니다.

처음 3개월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강론했고,

2년 동안에는 두란노 서원을 빌려서 남들이 쉬는 시간인 오전 11시에서 오후 4시까지 말씀을 가르치는데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도 정성을 다해 선교를 했습니다. 이렇게 3년에 걸쳐 사역한 결과는 에베소는 물론이요 소아시아 전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지를 바울이 어떻게 잊어버리겠습니까?

저도 그동안 섬긴 두 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내당교회>보다 <경주남부교회>를 더 많이 언급하는 것은 내당교회는 교육전도사 = 부목사 포함해 봐야 3년도 안되는데, 경주남부교회는 7년 2개월 있었으니 그런 것입니다.

 

바울에게 에베소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은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바울이 떠나면 다시는 에베소로 올 수 없다는 것을 바울도 알고, 바울의 동역자들도 알았습니다.

그 근거 구절을 보십시다.

25절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만남 찌릿하지 않습니까?

 

22-23절도 보세요.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에 대해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 말씀에 있는 대로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바울은 성령하나님에게 매여 살았습니다.

그 성령님께서 바울을 지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여 가시는데, 그 길이 레드카펫을 깔아 놓고 축하를 받는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환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인 성도들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지만, 그 길을 내가 갈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 위대한 고백을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의 길이 힘들어도, 항존직을 바로 감당하는 길이 힘들어도, 제자의 길이 힘들어도 그 길이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이기에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바울처럼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바울의 고별 설교 핵심 부분을 살펴보십시다.

18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서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바니”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만난 후에 에베소의 3년을 회상하면서 말씀을 시작합니다. 에베소에서 사역 3년 <첫날부터 지금까지>의 사역을 자신도 알고, 장로들도 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하나 발견합니다.

<목회(신앙) 평가 = 하나님도 알고, 성도도 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회자나 성도가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 만 아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칭찬 받으면 된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도 하시지만, 목회자를 늘 옆에서 보는 성도들의 평가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중직자도,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 날 하나님도 하시겠지만, 여러분을 늘 곁에서 보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평가하고 있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의 현주소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에베소의 3년 사역을 <에베소교회 장로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제가 우리교회에 부임해서 한 사역들을 하나님은 당연히 아시고, 저와 함께 사역하는 장로님과 성도들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이런 저런 변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어떤 목회를 했는지 구체적 언급합니다.

19-21절을 보십시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목회를 했는지 4가지> 정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겸손의 목회

19절 “곧 모든 겸손과”

여러분 목사라는 위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고 늘 앞에서 지도하고, 때로는 명령하고 책망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질 위험 요소를 늘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 안수를 받고 수 십 년이 지나면, 혹은 교인수가 조금 많아지거나 노회장 같은 직책을 받으면 말도 “어...

그래” 하면서 자신은 겸손하다 하는데 남들 보기에는 교만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겸손했다고 하고 한두 가지 겸손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겸손>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겸손을 우리도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겸손의 의미를 바로 알고 늘 노력할 때 가능합니다.

옥한흠목사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관하는 자세”

하용조목사 “겸손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겸손하셨던 예수님, 바울, 한경직 목사님까지 내려와 보면 그분들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봅니다.> 그런 겸손으로 바울이 목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에게, 지금 여러분에도 이런 겸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님을 섬겨가면서 우리의 신앙의 성품에 <겸손>의 성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눈물의 목회

19절 “눈물이며”

여러분 눈물이 언제 나는지 아십니까? 머리로만 이해하면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눈물은 가슴으로 이해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면서 <눈물의 목회>를 했다는 말은 그들만 생각하면 가슴으로 부터 느낌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고 안타까움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 부류의 사람들로 인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씀합니다.

ⓛ 불신자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에베소에 불신자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목회했다는 것입니다.

 

②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4)

 

③ 배교자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 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목회를 하면서 불신자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 때문에, 교회를 등지고 예수를 저버리는 성도들이 있다면 지금도 목회자는 괴로워하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눈물을 바울이 흘리면서 목회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교회에 이런 눈물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들은 물론, 장로님들, 구역장, 부서장들이

- 양떼를 위하여 무릎을 굻고 약한 자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지 못한 현실입니다.

- 교회를 떠난 사람을 놓고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없으니 — 축복의 열매가 싹이 트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바울이 가진 이 귀한 <눈물>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포함한 교역자와 당회원, 구역장, 기관장, 부서장들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놓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인내의 목회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19절)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만, 바울은 선교하려고 가는 곳곳 마다 같은 동족 유대인들이 핍박을 했습니다.

사람을 동원해서 선동했습니다. 죄 없는 바울과 선교 팀을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때로는 돌로 죽었다 싶을 때까지 때렸습니다. 사도바울이 전도하면서 동족에게 당한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핍박을 바울은 <참았습니다.> 이유는 우리를 구원한 예수님도 참으시면서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인내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아름다운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까요? 맺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야고보서 5장에 보면 신앙인이 꼭 가져야 할 덕목 두 가지를 소개하는데

하나는 기도요, 하나는 인내입니다. <인내하고 기도하는 자>는 신앙적인 성공을 할 수 있지만, <인내가 없고, 기도가 없는 자는> 신앙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인내>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용기의 목회

앞에서 소개한 겸손의 목회, 눈물의 목회, 인내의 목회를 생각하면 바울이 이 눈치 보고 저 눈치 보면서 제대로 목회를 하지 못한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20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 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6-27절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에베소에서 자신은 한 치도 부끄럼 없이 믿는 자에게 대하여나, 불신자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용기 있게 사역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이 <용기의 목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 놓고, 이 말씀이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누구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싶어서 못한다면 그 교회는 병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울처럼 <거리낌이 없이> 어디에서나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정리해 보십시다.

바울의 고별설교를 보면 바울이 <얼마나 깨끗하고 진실하게 사역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겸손의 목회, 눈물의 목회, 인내의 목회, 용기의 목회>를 했다고 자신 있게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말씀합니다.

 

저는 이 내용을 생각하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부럽다는 생각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목회를 했으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의 목회가 부럽습니다.

또 하나는, 나를 생각하면 두렵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이렇게 목회를 마무리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목회자에게는 안수 받고 목회를 시작할 때도 있지만, 목회를 마칠 때도 있습니다. 영원히 목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난 6월 17일 내당교회 조석원목사 원로목사 추대식에 참석하면서 나의 목회의 끝은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는데, 오늘 본문은 또 다시 목회의 끝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회의 시작은 잘했는데 끝마무리를 잘 하지 못하는 자들로 통해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 한 분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문제요, 우리 전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별설교를 듣고 제가 가지게 된 <부러움과 두려움>은 저 혼자의 문제는 아닙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의 문제요, 성도 전체의 문제입니다. 이제 바울에게서 여러분의 신앙의 끝맺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고, 그 아름다운 마무리를 잘 하기 위해 바울의 결단을 같이 하십시다.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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