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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WBuQUaS8QI4
본문 로마서 8:12-17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9-02-24

로마서 8:12-17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 증거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새벽, 빈 무덤을 눈으로 보고, 천사들을 통해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열한 사도들과 주님을 따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의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 둘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도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엠마오로 내려가게 됩니다. 길을 가면서 <아침에 전해 들었던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를 했습니다. 서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도 함께 동행 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동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모세오경과 예언서를 인용하며 메시야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때 두 사람의 마음은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데 예수님의 식사기도와 음식을 나눠주는 장면에서 그들의 영적인 눈이 밝아져 자신 앞에 있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떠나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영적인 눈이 가려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주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부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성자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성령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분명히 말씀드리면서,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성도 중에는 영적인 고아가 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문제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을 아무리 외쳐도, 우리가 영적인 눈이 가려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은 성도라면, 그것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서 모세오경에서, 예언서에서 근거되는 말씀을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해 주신 것처럼, 지금도 성경 말씀을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해 드릴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 증거를 7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확인해 보시고, 말씀이 마쳐질 때<성령님은 나와 확실히 함께 계신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 증거

1.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먼저 근거가 되는 두 곳의 말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한일서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은데, 사실 초기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초기 교회시대에 보통 사람들은 로마황제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그들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때, 예를 들어서 로마가 어떤 지역을 점령하게 되면 그 지역은 로마 황제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로마황제의 통치가 시작되고, 로마 행정이 시작되면 그 지역에 그 동안 설쳤던 <도로상의 도둑들, 강도들이 제거되었습니다. 바다에는 해적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니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그동안 일찍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안전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동안 맛보지 못한 로마가 주는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니 로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로마의 정신에 대해서 감사를 했고, 로마 황제의 통치에 대해서 감사를 했습니다. 이런 감사를 <글라디우스(AD. 41-49)>같은 황제는 거부를 했지만, 점차 넓혀졌고, 결국은 황제숭배를 받아들였고, 정치적으로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도록 했습니다.>

서기 200년대가 지나면서는 모든 로마 치하의 사람들은 특정한 날에 황제의 신전에 나아가 황제를 위해 한줌의 향을 피우고, “황제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그에게는 <황제숭배 제사를 완료했다는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이 황제 숭배 증명서만 있으면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려도 상관없고, 다른 신을 예배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황제를 <주님>이라고 받들어 섬겼던 그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오직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구원의 길을 여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니 <황제숭배>와 <예수숭배>는 정면으로 충돌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은 황제숭배를 거부하자 로마는 기독교인을 핍박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면서도 우리의 주님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님시시라>는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고 싶다고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이 그 속에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님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인 것이 믿겨지고, 입술로 고백하신다면> 성령님께서 그 마음에 내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입에서 <돈, 명예, 권력이 아닌> 예수님을 “나의 주님”라고 온전히 고백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8:14-16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까지는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우리 서로 뜨겁게 사랑 하면은 / 좋은 일이 있으리라 크게 있으리라”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하려면,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심을 믿어야 하고,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됨을 믿어야 하고, 양자된 우리에게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 자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고 계시는 자라야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고,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밝히신 것처럼 하나님도 어렵고 힘든 하나님이 아니라 .....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가정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아버지는 두려움의 존재였습니다. 늘 혼자서 독상을 받아 식사를 하셨고, 아버지가 출타하셨다가 오시면 긴장하고 모두가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형님, 누님이 다 출가하고 제가 군대를 마치고 집에 와서 아버지, 어머니, 저 세 사람이 한 상에 밥을 먹는데 밥이 처음에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두려운 존재가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 자녀가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빠 하면서 매달리고,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 친근감 있는 분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대하고, 관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성령님이 내 속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아빠 아버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입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고린도전서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한 기독교 연구소에서 예수 믿지 않는 대학생에게 몇 몇 큰 교회에 가서 예배를 참관한 뒤에 리포트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학생들의 보고서에는 설교가 은혜롭다고 정평이 나 있는 교회일수록 감동을 못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연구소는 그 결과를 가지고 말씀에 은혜가 없는 것이 한국교회에 큰 문제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분석은 잘못된 분석입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분석한 학생들이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에게 <찬양이 은혜가 되겠습니까?>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에게 <말씀의 깨달음이 있겠습니까?>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에게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지요?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다섯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①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을 해석하라.

② 성경을 그 역사적 문맥이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라.

③ 성경을 계약 공동체 안에서 해석하라.

④ 성경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해석하라.

⑤ 성경을 순종의 행동 속에서 해석하라.

이 원리에 입각하지 않으면 성경은 아무리 읽어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원리의 중심에 <성령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누가 받습니까? 성령님이 내주한 사람이 받습니다.

같은 찬양을 들여도 - 성령이 내주한 사람들은 찬양을 드리면서 은혜를 받아요.

같은 설교를 들어도 - 성령이 내주한 사람들은 설교에 은혜를 받아요.

봉사를 해도 - 성령이 내주한 사람은 봉사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하루를 살면서도, 성령이 내주한 사람은 살아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성령님이 함께 계심으로 늘 은혜를 깨달고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생깁니다.

요한일서 4:12-1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님이 내주하는 사람의 삶은 <사랑하는 삶,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가끔씩 보면 성도 중에도 부부싸움을 하고, “우리는 지금 몇 달 동안 냉전중입니다. 지금 말 하지 않는지 몇 주 되었습니다.” 라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사실 성령의 사람은 그렇게 살기 힘듭니다.

내가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부부싸움을 설령 했더라도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네가 먼저 용서해라, 내가 먼저 사랑해라’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그 사람이 별로 잘못한 것이 없어도 <내가 잘못 했어요>하면서 손을 내 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부 중에 먼저 <용서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자가, 성령님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몇 주, 몇 개월 지나도 용서하고 사랑할 마음이 없다면 그 분은 지금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는가?>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5. 성령의 근심하심을 깨닫습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님이 내주하는 사람의 특징은 어떻게든 성령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근심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성수>를 생각해 보십시다.

주일성수는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십계명 4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출애굽해서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안식일에는 불도 피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로 바뀌게 되었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주일성수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일 성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물려받아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부득이하게 주일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직장생활 중 당직 근무때문에, 군대생활에서는 보초 때문에, 의사나 간호사는 생명을 살리는 일 때문에, 그 외에 이런 저런 일이 있어서.... 그럴 때 하나님은 내 마음을 다 아시겠지만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내주하고 계시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근심이 생깁니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듭니다.

 

이는 주일성수 외에도 <헌금생활, 기도생활, 술 담배 문제>에도 나타납니다. 성령님이 내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바르게 믿음생활을 하지 못할 때, 성령님이 자신을 보고 근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은 절대로 편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이요, 성령님이 근심하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의 소원을 품습니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 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여러분 성령님이 내주하는 사람들은 누가 강조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고,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불신자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까요? 어림없지요.

 

저는 여러분의 목사로서, 늘 감사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 분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살피고 하려는 분이 많습니다.

이제 다음주일이면 엘림관 3층에 장학관을 운영하는데, 여러분들이 즐거이 준비하고 봉사하는 것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교회가 선교하는 부분도 그렇습니다.

국내외 선교지를 위해서 많은 가정에서 헌금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믿고 성전건축사역을 위해서도 힘쓰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까지 36개 선교센터부터 예배당을 봉헌했습니다.

지금 현재 네팔에 2개 예배당이 건축되고 있어요.

금년에 인도네시아에 4개 예배당 건축 요청이 들어왔고, 우리교회에 5가정에서 약 6천 만 원의 건축을 담당하려고 결정했고, 진행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 대구에 있는 많은 교회 중에 우리교회와 같은 교회를 찾아보십시오. 찾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금년이 지나면 우리교회로 통해 42개 예배당이 건축됩니다.

이 놀라운 사역이 누구로 통해서 진행되고 있습니까? 성령 받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은 성령님이 내주하는 증거입니다.

7. 전도할 마음이 생깁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을 여는 말씀, 사도행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에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성령이 임하는 사람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는 증거가 전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로 보면 <개인전도, 의료전도, 예수사랑 전도대, 이슬비 전도대>등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결론 맺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에 분명히 보이지 않아도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내주하는 증거를 성경은 7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7가지 보다 더 많습니다만, 7가지로 정리한 것입니다. 다시 보십시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 증거 7가지>

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②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③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④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생깁니다.

⑤ 성령의 근심하심을 깨닫습니다.

⑥ 하나님의 소원을 품습니다.

⑦ 전도할 마음이 생깁니다.

저는 7가지 성령님의 내주하심의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님과 늘 동행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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