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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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6월 21일
데살로니가전서 1:2-10 소망의 인내를 회복하라

여러분은 오늘 읽어드린 본문 말씀이 쉽게 이해되십니까?
한 번도 아니고, 오늘까지 3번이나 봉독해 드렸으니 ‘예 이해합니다.’라고 답하실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도 성도님들이 이 말씀을 다 이해하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는 말씀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로 칭송 받는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 목사님은 이 말씀을 그의 나이 63세였던, 1961년이 되어서야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61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리스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고린도에서부터 데살로니가까지 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배로 바다를 건너고, 다시 자동차로 높은 산악지대를 세 번이나 넘었다고 합니다. 고린도와 데살로니가 지역은 험한 산악 지역을 사이에 두고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1961년에도 여행을 하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 힘든 여행을 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는 말씀에 불현듯 깨달음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이 말씀에는 세 곳의 지명이 나옵니다.
<1. 너희에게로부터> - 데살로니가를 말하지요.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북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항구도시로서 해상 교통이 발달한 도시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로상의 도로도 발달하여 로마 제국의 전략적, 상업적, 정치적인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에 바울이 전도를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지명이 <2. 마게도냐>입니다 = 마게도냐는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데살로니가 뒤편에 있는 땅이 바로 마게도냐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일이 마게도냐 까지 퍼져 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어서 또 한 지명이 나옵니다. <아가야>입니다.
<3. 아가야>는 오늘날 펠로폰네소스로 알려진 곳으로, 당시 그리스의 고린도 운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까지는 높은 산악지대를 3번이나 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소문이 그 험한 산악지대를 넘어 아가야까지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전화나 신문, 인터넷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에 전해진 복음이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입에서 입을 통해, 그 험난한 산악지대를 지나서 교인들에게, 그리고 바울에게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나이 63세에, 험난한 그 지역을 여행을 해 보고서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참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경험을 먼저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졌던 신앙이 단순히 격려의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그들의 신앙이 대단 했는지를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훌륭한 신앙생활 2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시간에는 <믿음의 역사를 회복하라>는 주제로 믿음에 대해서 생각했었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나기에, 전하는 자는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고, 듣는 자는 자기의 소견에 옳은 데로 듣지 말고, 100%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고, 그 순간 성령님이 함께하셔서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성장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사랑의 수고를 회복하라>는 주제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닫게 되면, 예수님과 교회와 성도를 위해서 헌신과 수고를 하게 되는데, 성도가 사랑하는 삶을 살 때에 3가지의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① 사랑의 수고는 이웃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
② 사랑의 수고는 복음의 다리, 즉 부흥으로 연결되어 진다.
③ 사랑의 수고는 교회를 지킨다.
생각나시지요? 자 그럼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마지막 남은 하나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것으로 <소망의 인내를 회복하라>는 주제를 정하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3주에 걸쳐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믿음의 역사 / 사랑의 수고 / 소망의 인내> 가운데, 지금 한국교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세 가지 모두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의 역사도 부족합니다.> 마치 성도들이 감동적인 영화를 볼 때, 설레는 마음으로 표를 구입하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관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 2시간 정도 하는 영화를 보면서도 짧다고 생각할 정도로 웃고, 울며 감동을 받고,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그 영화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 우리가 드리는 한 시간의 예배와, 설교시간에 그런 감동이 있으면 좋겠는데, 설교는 예정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시계를 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고, 몸이 뒤틀립니다. 그러니 말씀이 나에게 영향을 주기는 쉽지 않지요.

<사랑의 수고도 사실 부족합니다.> 사랑을 나눠며 살아야 할 교인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보다, 어쩌면 세상 사람보다 더 깍쟁이가 되어 가고 있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 오히려 고개를 흔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보다 더 부족한 것이 <소망의 인내>라고 봅니다.
≪한국교회 미래 지도 2≫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천국의 소망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이 땅에 영원히 있을 것처럼 산다. 지금 소유한 것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움켜쥐고 살 것으로 여긴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부자를 공격한다. 청지기 정신, 나그네 정신도 아니다. 천국에 소망을 둔 마음과 행동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강단에서 천국의 소망을 강력하게 외쳐야 한다. 이 땅을 청지기로 살라고 가르쳐야 한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두 곳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한 곳은 <예수님의 초림의 현장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초림의 주님을 바라 볼 때, 성육신, 그의 삶, 십자가, 부활, 승천>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고, 그 모든 사역이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사역임을 알고,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또 바라보아야 할 곳은 <예수님을 믿다가 죽어 무덤 속에서 잠들어 있는 영혼과, 우리의 영혼과 몸을 영원한 행복을 두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년만년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요?(답 : 죽음이 코앞에 있는 삶이다)
제가 안식년 연구기간을 맞아 안동에 있는 고향집에서 보내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려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처음 제가 고향집에 갈 때에, 선물로 드리려고 약소하지만 베지밀 3통을 사서 갔습니다.
한통은 모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께 드리고, 또 한통은 앞 집 어르신들께 드리고, 또 한 통은 뒷집 어르신들께 을 드리려고 준비해서 갔습니다. 특별히 뒷집 어르신 두 분은 평생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다가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부터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에 ‘저의 부모님 같으면 예수님을 믿어보겠다고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세례를 다 받으셨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님이 신앙의 모델이 된 것이 감사하고, 시골동리에서 믿는다는 것이 쉽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감사해서 감사의 표시로 베지밀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있어야 할 뒷집이 없어진 것입니다. 있었던 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과나무를 심어 놓은 과수원이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앞집에 사시는 어르신께 물어보았더니, 지난해에 돌아가셨고 5남매 자식들은 다 타지에 사니 누가 시골에 들어오지 않아서 - 집은 허물어 지고, 집터가 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구나? / 세상 사람들이 천년만년,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지만, 불과 100년 안쪽의 삶을 살다가 결국은 다 주님께로 가야 할 존재인데.....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순번표를 받아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인데 ....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소망의 인내>를 말할 때, 여기에서 말하는 소망은 사전에서 정의하는 소망이 아닙니다. 사전에서는 소망을 <바라고 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소망은 <역사적인 종말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성경을 보시면 알겠습니다만, 예수님께 부름 받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 즉 재림을 소망하면서 살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도들끼리 만날 때에 <마라나타(maranatha)>라고 인사했습니다. 마라나타라는 말은, 아람말로 ‘주님, 어서 오소서!’의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 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에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 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 어서 오소서! = 마라나타>하면서 인사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인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주제도 한마디로 <재림>입니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 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 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의 삶을 시작한 우리의 최종 종착지는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의 삶을 살다가, 마지막 날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영과 몸은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저 천국의 문턱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아브라함을 만나고, 모세를 만나고, 엘리야를 만다고, 베드로를 만나고, 사도바울을 만날 것입니다. 그뿐 입니까? 그동안 신앙생활을 먼저 하다 세상을 떠난 믿음의 선배들을 만날 것이고, 안타깝게 이별한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만날 것입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천국에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찬미하고,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천국의 삶이 <예수님이 재림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천국을 기대하는 성도라고 하면, 재림을 소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독한 말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처럼 고백하고 재림을 소망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내가 재림을 소망하면서 사는 백성이라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와 === 천국 사이에, 다시 말해서 내가 천국에 첫 발을 내 딛는 순간까지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 성도들이 오해하는 것, 특히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새 가족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나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없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예수님께서 나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이다. 나에게는 승리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구약적인 생각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신을 파워, 곧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를 하나님의 힘으로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믿음생활을 시작하고, 천국에 첫발을 내 딛는 순간까지, 우리 앞에는 항상 장애물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이는 세상의 이치도 그렇습니다. <학생이 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하려고 하면, 가방만 들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되지 않고, -- 시험을 치고, 밤새워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 합니다.>
군인이 군복을 입는다고 훌륭한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지만 훈련을 받아야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직장인이 그저 한 달 출근한다고 월급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달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상사로부터, 혹은 회사 동료로부터, 업무로부터 힘든 일을 견뎌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 신앙생활을 시작한 우리들이 천국에 안전하게 들어가려면 최소한 세 가지를 반드시 극복해 내어야 합니다.
그 세 가지는 <고난, 비방, 유혹>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비록 천국 백성 되었지만,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상황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고난으로 흔듭니다. 어떤 사람은 비방을 함으로 흔듭니다. 어떤 사람은 유혹을 해서 그 사람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사도행전 14:2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 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치고 <고난과 비방과 유혹>중에 하나라도 받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한 분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고난, 비방, 유혹>을 견지지 못해서 예수님을 떠난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으로 승리한 사람들은 <고난, 비방, 유혹>을 받아도 인내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우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인내하고 살았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7-18 에는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세상에서 받는 환난은 잠깐이지만, 우리가 받을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상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에 초점을 맞추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환난과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하였기에 주님의 재림을 소망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인내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지금 현재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은 세상에 사는 동안 잠시 당하는 고난임을 아시고, 인내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3주간 연속한 설교를 결론짓겠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교회된 우리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멋대로 살던 신앙을 말씀중심으로 유턴(U)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교회에도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넘쳐나, 우리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대구를 넘어 한국으로, 세계 선교지로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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