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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5월 8일
요한복음 19:25-27 에베소서 6:1-4 가정: 예수의 증인 공동체

어느 집에서 젊은 부부가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사람들이 누구야? 번호를 매겨 봐” 남편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을 했습니다.
“응 1번은 자기, 2번은 우리 딸내미, 3번은 당신같이 예쁜 사람을 낳아준 장모님, 4번은 우리 집 강아지, 5번은 우리 엄마”
그 이야기를 모처럼 아들 집에 온 어머니가 방에서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시어머니는 식탁위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겨놓고 나갔습니다.
“1번 보아라!, 5번은 외출한다.”

누가 만든 유머인지는 모르지만, 이 시대의 씁쓸한 모습을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에 그렇게 자랑했던 ‘동방예의지국’이 아닙니다.
‘효’를 강조하고, 효라면 목숨도 불사했던 그런 나라도 아닙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이제는 부모는 부보, 자녀는 자녀대로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시어른 보다는 친정 부모님을 더 챙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아들은 소용없어 딸이 최고야’ 하는 말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은 딸이 최고야!’라는 말을 언제까지 할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자식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하는 시대가 올지 모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이유는? 가정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만드신 분이, 어떻게 가정을 꾸려가기를 원하는지? 매뉴얼을 모 르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류 최초의 가정을 만든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인류 최초, 최고의 가정인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젊은 여 성도들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누구였는지 아세요?” ‘누군데요?’ 물으면 “하와입니다.” “왜요” “하와는 시어머니가 없었잖아요!”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와에게는 시어머니는 없었지만, 그 가정을 눈동자처럼 돌보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 다음 방치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돌봐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십계명 말씀을 주실 때에 인간이 지켜야 할 첫 번째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말하셨고, <네 부모를 공경하면> 조건으로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만 하면, 우리는 말씀에서 약속하신 복을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예수님은 부모사랑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곳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남기신 7마디의 말씀만 분석해 보면, 예수님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중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두 시간 쯤 지난 오전 11시쯤 말씀한 세 번째 말씀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상 칠언 중 ‘3언’이라고 하지요. 세 번째 말씀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집중하기 위해서 본문을 조금 집중해서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25절 보세요.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곁에, 주님의 죽으심을 안타까워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네 명의 여자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한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아버지 요셉은 이미 그 전에 돌아가셨다고 봅니다.

지금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통 이런 말을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눈물이 나도, 자식이 죽으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유는 너무 가슴이 아파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지금 그러했을 것입니다. 아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내려다 보셨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면서 힘들어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26절 “예수께서 자기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이 말씀에서 ‘자기 어머니’는 - 마리아를 말하지요,
‘사랑하시는 제자’는 -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요한을 말하고,
‘아들이니이다’는 -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까? 아니면 사도 요한을 말합니까? 여기에서 아들은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마리아 옆에서 있는 사도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지 역에는 이 부분을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어 사도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에 있는 마리아와 요한을 모자지간으로 연결시켜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주 안에서 혈연관계를 이룬다고 하신 말씀(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에 대한 확증인 샘입니다.

26절에서 “여자여!”라는 단어를 먼저 생각해 보십시다.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정서로는 맞지 않습니다.
감히 자식이 어머니를 어떻게 ‘여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말씀은 한글로 보고 있지만,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기에, 그 말의 뜻도 이스라엘에서 쓰인 의미를 바로 알아야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자여’라는, 헬라어는 <귀나이>라는 말인데, <여인을 부르는 공식적인 표현으로 예식적이고 나아가서는 극존칭으로 귀부인을 부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른 것은 요한복음에 두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고, 또 한 번은 요한복음 2장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실 때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행하신 이적이 무엇입니까?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지요.>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고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하자,
예수님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처음으로 <여자여>라고 불렀고,
오늘 요한복음 19장에서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할 때이고, 하나는 공생애 사역을 마칠 때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이 공생애 처음과 마지막에 어머니를 “여자여 .....”라고 하신 의미가 느껴지십니까?
주님은 이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을 그저 육신으로 낳은 아들로 보는 것을 막으시고/ 예수님 자신이 만왕의 왕으로 오셨으며, 진정한 왕으로서 이 지상에서 활동하셨음을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른 것은 자신을 육신의 아들로 보지 말아 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을 자식을 바라보는 눈에서 -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생각할 때 <‘내 자식’, 혹은 살가운 표현으로 ‘내 새끼’>라고 하는 것과, 자식은 ‘하나님이 잠시 우리 가정에 맡겨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여간, 예수님은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라고 하셨고, 옆에 있는 사도요한이 이제부터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7절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로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제는 사도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죽음을 앞두고 유언적인 말씀으로 요한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어머니로 모셔달라고 부탁합니다.> 요한은 순종하여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효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는 그 순간에도 어머니의 고통을 보셨고, 어머니의 노후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상 7언중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는 귀한 말씀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자, 그럼 성부하나님이 가정과 효에 대해서 말씀한 것을 생각했고,
예수님의 효에 대해서 생각한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가정에서 부모님께 <효>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은 우리가 부모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잘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버이주일마다 봐왔기에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주 안에서>
또 하나는 <순종하라,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주 안에서>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본문 에베소서 6:1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에서 “주 안에서” 말은 에베소서 5:21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라는 말과, 5:22의 “주께 하듯”이란 말과 평행을 이루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는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께 하듯”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은 “성도가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하듯이 자녀는 부모를 두려운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순종하라, 공경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1절 “...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님에 대해 순종하고, 공경하려고 하면, 신앙 안에서 부모님의 위치가 어떤 위치인지 알아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을 알지 못할 때는 불가능합니다.

작가 서정우 씨의 ‘명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골에 사는 홀어머니가 장사를 하며 외아들을 서울로 유학을 시켰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보람이요, 희망이요, 꿈이었습니다. 방학을 하여 시골에 내려온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이라 동탯국 밖에는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몸뚱이와 꼬리는 아들에게 주고 어머니는 머리 부분을 먹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고기는 머리 부분이 더 맛있다, 어두진미다”라고 하면서 잡수셨고 아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어두진미란 말은 : 물고기는 머리 쪽이 맛이 있다는 말입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의젓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명절이 되어 아들이 어머니가 계신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역시 동탯국을 준비했고 또 옛날처럼 ‘어두진미’하시면서 동태 몸뚱이와 꼬리는 아들에게 주고 당신은 머리 부분을 먹으려 했습니다.
그 순간 아들은 자기 국그릇과 어머니의 국그릇을 살며시 바꿔 놓으면서
“어머니, 저도 이제 동태의 머리 부분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 순간 어머니와 아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울었습니다.

효도란 ‘어두진미’의 뜻과, 국그릇을 바꿔 놓는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가 부모가 되어 보면, 그때서야 온전한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느낄만한 때가 되면, 안타깝게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부모님의 살아계실 때에
부모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 기쁘게 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분들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생각해 보시고, 그 뜻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부모님께 효도하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 마무리는 2012년 12월 30일 패혈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황수관장로의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라는 영상을 통해서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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