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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8월 7일
창세기 15:1-7 믿음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나 ‘믿음’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집사님은 믿음이 대단해!’ ‘저 집사님은 믿음이 없어’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지’‘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지’ 하면서 믿음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가 어디에 나옵니까?>라고 물으면 시대적인 배경을 언급하며 설명하실 분도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위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근거를 추적해 올라가며 드리겠습니다.
1517년 종교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부터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루터가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강조한 로마 가톨릭의 잘못을 반박하면서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고 주장했습니다.

루터가 그렇게 주장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 1:17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1:17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씀은 또 어디에서 나온 말씀입니까? 로마서 1:17절에 보면 “기록된 바”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어디에 기록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 하박국서 2:4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하박국 2:4 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이렇게 추적해 올라가다보면 오늘 본문 창세기 15:6 까지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다시 정리해드리면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은
창세기 15:6 에서 출발해서 → 하박국 2:4 → 로마서 1:17 →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과 → 오늘 우리에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신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시대에 어쩌다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구약을 관통하는 교리고, 그것이 신약시대를 거쳐 지금 우리들에게 전해진 교리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신칭의 교리는 알지만, <믿음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성도는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원초적인 질문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냥 대충 넘어갈 수 있는 말이지만,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본문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후에’라는 말은 어떤 사건이 있은 후 에라는 말입니다.
그 사건은 창세기 14장 마지막에 나오는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 부족국가를 형성한 나라들 간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4부족과 5부족의 전쟁이 <싯딤 골짜기>에서 있었고, 다섯 부족이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그 패한 부족 중에 <소돔과 고모라>도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생각날 것입니다. 소돔성에 정착한 롯이 그 싸움으로 인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조카가 포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 있던 군사 318명과 그리고 동맹한 몇 부족의 사람들과 함께 다메섹까지 쫓아가서 ...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포로들을 찾아서 옵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예루살렘 왕이었던 멜기세덱이 영접했습니다.
멜기세덱은 구약에 잠깐 나타난 아주 신비한 인물입니다. 그의 행위는 예수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나타내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고, 축복기도를 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멜기세덱에게 자신이 빼앗아온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승전소식을 듣고 소돔 왕도 마중 나왔는데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전리품은 아브라함이 다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신과 싸움에 동행한 자들의 분깃만 주시고, 자신은 사람도 필요 없고, 전리품은 실오라기 하나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이 전쟁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이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 후 상황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목숨 걸고 전쟁에 참여하여 조카 롯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을 구출했고 엄청난 전리품을 가져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인기도 많이 올라갔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브라함의 손에 쥐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아마 그의 마음 상태가 자신도 모르게 공허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세 마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 지금 네 부족을 무찌르고 왔지만, 아브라함의 마음 한편에는 이 부족이 언젠가는 자신을 보복하기 위해 쳐들어 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네 방패요” - 방패가 군인을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안전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이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 다음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이 말씀은 우리가 집중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메시지역에는 “네가 받을 상이 매우 크다!”
새 번역에도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고 번역 했습니다.
그럼 히브리어 원문에는 뭐라고 번역했을까요?
히브리어 원문에도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창세기 14장 사건과 연결시키면 이런 뜻이 됩니다.
<네가 전쟁에서 이긴 것도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대문이고, 네가 소돔 왕에게 사람과 전리품을 다 내 줌으로 인해서 사실상 빈손으로 돌아온 것 같지만,....
진정한 보상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줄 보상이 매우 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브람이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2절에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에게는 자신의 기업을 계승할 자식이 없다고 말씀드리면서, 자신의 종 엘리에셀이 자신의 계승자가 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물질을 주셔도 자신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종에게 물려줄 재물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절 중반절에 “..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그리고는 그 말씀을 확신시키기 위해 5절에는 밖으로 나가서 –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라고 말씀하신 후, 별의 숫자를 셀 수 없듯이 앞으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나타난 아브라함의 반응과, 아브라함의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6절에 나옵니다. 6절은 본문 중 가장 중요하고, 이신칭의 교리의 성경의 최초 근거가 되는 구절이 됩니다. 6절을 보세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새 번역 성경에는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 을 의로 여기셨다.”
여기에서 <의>는 히브리어 <체다카(tsedaqah)>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체다카는 ‘바른 자세, 태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단어를 의미를 알고, 6절을 다시 본문을 읽어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것을 지녀야 할 바른 자세/ 태도로 여기셨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짧게 요약하면 “믿음은 사람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5:6의 바른 해석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럼 이 말씀에서 <믿음이 무엇인가?> 몇 가지 답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1. 믿음이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태도이다>
믿음은 피조물인 사람이 피조물답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한 번 보세요.
-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사건(4장)
- 노아 홍수사건(6-9장)
- 바벨탑 사건(11장)을 보면,
피조인 사람이 끊임없이 피조물의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피조물의 자리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돌아온 것은 멸망이요 심판뿐이었습니다.

현대사회는 어떻습니까?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까?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바보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한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창조주 하나님,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 살다가 그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하면서 첫 번째로 정의해야 할 것이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없고, 반대로 사람이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할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만 바르게 정리되면 우리도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처럼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은 ‘진리의 말씀 위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참된 믿음입니다.
본분이 아브람은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의 기초는 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4절)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도 이와 같으리라”(5절) 이렇게 아브람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도 그러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분명한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자신의 경험위에 세우면 안 됩니다. 이유는 사람의 경험은 천차만별이며, 거기에서는 어떤 원리와 원칙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집단 적이 경험, 국가적인 경험위에 믿음을 두면 문제가 생깁니다.

경험에 믿음의 근거를 두면 안 된다는 이유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8장부터 몇 장에 걸쳐서 나오는 사건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남 유다로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당시 유다 왕은 히스기야(13대왕)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제외한 외곽에 있는 성읍을 앗수르가 점령했습니다.
<라기스에 본부>를 차린 앗수르 산헤립 왕에게 히스기야가 비굴한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군대를 후퇴시켜 주십시오. 당신이 정하시는 대로 조공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은 11톤, 금 1톤을 고공으로 바치라고 했고> 히스기야는 성전과 자신의 보물 곡간에 있는 모든 금과 은을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성전 문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내어 보냈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군대를 후퇴시키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산헤립은 조공은 받아 챙기고 입을 닦아 버립니다. 그리고 언제 그러했느냐는 식으로 장군 세 사람과 막강한 군사를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기도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열왕기하 19:32-34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이 응답 후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치셨습니다. 한 순간 185,000명이 송장이 되었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수도 니느웨로 ‘걸음아 나 살려라’며 도망갔지만 아들의 반역으로 죽게 됩니다.

이 경험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엉뚱한 생각, 엉뚱한 신학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이 있는 한,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성은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한 번의 경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경험에 근거한 신앙은 이렇게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근거입니다.
오늘 교독한 말씀 중에 히브리서 11:6 말씀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을 통해서는 일하시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로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셔봐야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인지, 자신이 잘 나서 그런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그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사장이 상사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면 열심히 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믿어주지 않으면 일 할 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님도 선생님도 믿어주지 않는 학생은 공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믿음이 없는 자들을 통해서는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을 믿는 자들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아브람에게 → 이삭도 주었고, 가나안 땅도 주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모세에게 → 홍해의 기적을 행하게 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여호수아에게 → 여리고성의 기적을 행해주셨습니다.
- 예수님을 믿은 38년 된 환자에게 → 일어설 수 있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하다 보면,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 → 하나님의 임재와 기적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믿음의 어원적인 정의를 해드리겠습니다.
<믿음>이란 단어보다 <내가 믿는다.>는 말이 먼저 있었습니다.
<내가 믿는다.>를 뜻하는 라틴어는 끄레도(CREDO)인데,
끄레도는 <꼬르 COR + 도(DO)>의 합성어입니다.
꼬르(COR), 또는 꼬르디아(CORDIA)는 <심장, 마음, 심령>을 뜻하는 단어이고
도(DO)는 ‘주어 버린다.’ ‘고정 시킨다.’ ‘놓는다.’ ‘위치를 정하여 세운다.’ ‘의뢰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는다.>는 끄레도(CREDO)의 본래의 뜻은 “심장 또는 마음을 상대에게 주어 상대에게 고정시켜 의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믿는다는 말을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적용하면, “나의 마음을 예수님께 주어 예수님께 고정시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지어보십시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피조물인 사람이 간직하며 살아가야 할 삶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 믿음은 반드시 진리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 귀한 믿음을 회복하셔서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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