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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xt4PcPXkAyM
본문 사도행전 22:30-23:11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8-08-19

사도행전 22:30-23:11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바울

 

지난주일 우리는 안토니아 요새로 끌려간 바울이 가죽 줄로 매여 채찍질 당하려고 할 때 로마 군인에게 “나 로마시민이야!”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고, 바울이 로마 시민인줄 알고 천부장이 두려워했다는 것까지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시민임을 알고, 하루가 지난 후 바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산헤드린 공회>에 대해서 설명을 해 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시작은 예수님 당시에 처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에게 패망한 후에, 페르시아 제국은 각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지방화 정책을 씁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을 자신의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그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다스리고 통치하도록 해 줍니다. 물론 완전한 실권은 본국이 쥐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그때 만들어진 의결기구가 귀족회의였는데, 에스라시대에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후에 <귀족회의 → 원로회의 → 산헤드린>로 발전해서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산헤드린 구성은 모세가 70명의 장로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이끈 전통에 따라서 대제사장 1명, 그리고 70명의 사람들이 함께하기에 <70인 공의회>라고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의장에 대제사장, 그리고 70인 공회 회원으로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있었는데 그 비율은 시대마다 약간씩 달랐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이스라엘 독자적인 행정법과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체적으로 경비대를 가지고 있어서 이스라엘을 권위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단 사형집행권은 없었습니다. 이 막강한 산헤드린 공회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산헤드린 공회도 함께 멸망하고 맙니다.

 

사도행전 30년 어간 산헤드린 공회는 다섯 번에 걸쳐 소집됩니다.

1차 산헤드린 공회 – 예수님처형 (주후 33년)

2차 산헤드린 공회 – 제자들 경고(행 4:17-18) (주후 33-36년)

3차 산헤드린 공회 – 제자들 처벌(행 5:40-41) (주후 33-36년)

4차 산헤드린 공회 – 스데반 처형(행 7:57-58) (주후 33-36년)

5차 산헤드린 공회 – 바울 재판(행 23장) (주후 59년)

자 바울 문제로 소집된 산헤드린 공회가 지난 4번 모였고, 결의한 것을 보면 이 기관은 만만치 않는 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 한마디로 불의한 재판정이었습니다.

이들은 스데반을 재판하여 로마법을 어기면서까지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던 아주 무서운 재판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산헤드린 공회 앞에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해서 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자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절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보통 사람이라면 재판을 받을 때, 이성적으로 자신을 판단해 주시고, 선심을 베풀어 달라고 하는데 바울은 지금 산헤드린 공회의 모든 의원들처럼 자신도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왔노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바울의 고백이 참이라면, 지금 바울을 재판하기 위해서 모인 공회 의원들은 어떤 사람이 됩니까?

지금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들은 스데반 집사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깨끗하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그들에게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한다면, 그 말 이면에는 <너희들의 과거의 결정은 잘못되었고, 너희들의 현재의 모습도 잘 못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이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그 입을 치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뺨이나, 입을 때리라는 말보다 더 강도가 셉니다. “입을 찢어버리라”는 말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 한 성깔하지요?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주후 48년 대제사장이 되어 주후 58년까지 11년 동안 직임을 감당했는데, 그의 성격은 난폭하고, 거만하며 약탈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 난폭한 성격 때문에 주후 66년 유대 전쟁(주후 66-70년)초기 유대 군중들에 붙잡혀 비참하게 살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바울도 만만치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3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바울 역시 세게 나가지요?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7가지 “화 있을진저!” 하며 그들의 겉은 아름다운 척 하지만, 속은 부패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신앙을 지적하신 것처럼, 바울도 대제사장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하면서 말을 쏘아 붙입니다.

 

그러자 4절에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라고 하면서 바울 너 ... 지금 <대제사장을 욕할 수 있느냐> 하면서, 네가 욕한 사람이 대제사장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바울은 5절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은 자신이 쌔게 몰아붙인 사람이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알고, 잘못되었다고 시인을 합니다. 바울은 그 근거를 출애굽기 22:28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들을 저주하지 말지니라”(출 22:28)

그러면서, 내가 대제사장을 욕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시인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왜 몰라봤을까?

① 바울이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 안질 때문에 잘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③ 공회가 긴급으로 소집되었기에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의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④ 법정이 워낙 소란했기 때문에 누가 말하는지 몰라서 그렇게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분명한 사실은 바울은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줄 몰랐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2. 바울은 바른 말을 했지만, 대제사장에게 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했을까?

대제사장은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 영적 권위를 그 순간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좀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 서기관에게 “화 있을진저”하면서 화를 내셨지만, <화있을진저 제사장들아!> 하면서 화를 내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에 의해 죽어가면서도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그 제사장 직분을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주신 권위 앞에 예수님도 복종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곳곳에서 모든 권위가 무너지고 무시되는 시대입니다.

대통령의 권위, 사장의 권위, 부모의 권위, 스승의 권위가 다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유는 잘못된 몇 명의 권위자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과거 교회에는 목회자의 권위, 중직자의 권위가 있었는데 일부 목회자 때문에, 일부 중직자 때문에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할 사실은

<권위주의는 안 되지만, 목회자와 중직자의 권위는 교회에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목회자도 인간이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다 똑 같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목회자에게 순종하느냐? 우리는 사람이 아닌 주님께만 순종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씀 같지만 그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은 목회자를 통하여 성도를 훈련시켜서 사역하게 하시며, 이를 통해 교회를 세워간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11-12 말씀을 함께 보십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세운 목사로 통해서 교회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행전적 교회라면 영적 권위가 제대로 서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그 직분을 감당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사로서, 하나님 앞에서나 성도들 앞에서 늘 부족함을 고백하고 바르게 서려고 노력합니다. 늘 부끄럽지 않는 종이 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사의 지도를 겸손하게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건강한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장로나, 집사 같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목사를 견제하지 않으면, 목사가 잘못되면 누가 목사를 다룹니까?” 답은 <주의 종은, 하나님이 직접 다루십니다.>

- 잘못된 불을 드린 아론의 두 아들(나답과 아비후) – 하나님이 불살라 죽였습니다.

- 사울 왕도 하나님이 직접 다뤘습니다.

- 예레미야 시대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 본문의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서기 66년 유대 군중의 손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감당할 못을 여러분이 굳이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임을 알고 즉시 <잘못을 고백한 모습 속에서> 오늘 우리들도 일반 세상의 권위는 물론이요, 교회 안에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귄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부터는 권위에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유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말씀드린다면, 우리교회는 목회자인 저는 영적인 아버지로서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성도님들은 기도할 때 마다 여러분의 영적인 지도자인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상호 중보기도가 살아있는 교회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본문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바울이 그 이후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는지 보십시다.

6-10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여러분! 지금 바울의 문제로 열린 5차 산헤드린 공회는 사실 공의나 정의와는 먼 곳이었습니다. <불의한 재판정이었고, 아주 무서운 재판정>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으면 바울도 스데반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공회에서 빠져나오고 그들이 회의를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한 가지 지혜를 내었습니다. 사실 지혜라고 하지만 썩 좋은 지혜는 아닙니다.> 그 방법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이 사두개인, 바리새인으로 양분 되었다는 것을 알고 바울이 믿고 있는 진리를 툭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6절 중반절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이 말에 순식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갈라집니다. 이유는 그들이 같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고, 동시대를 살아가지만 그들이 믿는 것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비교를 해 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비교>

 

바리새인

사두개인

부활, 천사, 영

믿음

믿지 않음

성경

구약과 미쉬나(구전)믿음

모세 오경

신앙스타일

신본주의자, 이상주의자

인본주의자, 현실주의자

정치적 성향

야당

여당(실권자)

 

어떻습니까? 몇 가지만 비교해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점을 바울이 이용해서

- 나는 바리새인이다.

- 나는 <부활 문제로 심문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에 순식간에 산헤드린 공회는 이제 바울을 재판하는 문제에서 벗어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분쟁으로 바뀝니다. 얼마나 그 상황이 심각했으면 천부장 생각에 바울을 그냥 두면 그들에게 찢겨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바울을 빼내어 안토니아 요새로 들어가도록 조취를 취합니다.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악한 세력이 있는 곳에는 늘 다툼과 분쟁, 분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가지고 다툴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평안합니다.

 

자, 이렇게 바울이 안토니아 요새로 들어옴으로 공회는 마쳐졌습니다. 그 날 밤 있었던 일을 11절에 말씀합니다. 너무 귀한 말씀이니 같이 읽어보십시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나씩 생각해 보십시다.

“그 날 밤에” - 아주 어려운 바로 그 날 밤을 말합니다.

군중들에게 맞고, 안토니아 요새에 잡혔다가, 산헤드린 공회가 마쳐진 그 날 밤, 그 어려운 순간 바울은 계시를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본 순간은 평안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순간도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절박한 문제가 없고, 절박한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지금도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 “주께서 바울의 곁에 서서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얼마나 좋은 표현입니까?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 주님이 보이지 않고, 주님이 음성이 귀에 들리지 않아도 주님이 여러분의 곁에 서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두 가지를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담대하라” - 용기를 내라는 말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원어로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이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가 1년 365일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너는 앞으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 치의 앞을 모르는 바울에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환상을 통해 받은 사명 때문에 바울은 2년에 걸친 가이샤라의 감옥생활도 너끈히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믿음 생활은 어떻습니까? 쉽습니까? 아니면 힘드십니까? 비록 이런 저런 일로 힘들다 하더라도 저는 오늘 11절 바울에게 주신 말씀으로 여러분이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주신 비전과 사명 때문에 어떤 환난도 이겨내시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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