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7~10 예수님의 정체성 ③ 나는 문이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9장의 말씀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한 사람이 등장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 그 길에 맹인 한 사람도 지팡이로 길을 더듬어 가며 가고 있었습니다. 같은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밝히 보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평생 보지 못하고 살아가니 그것이 안타깝게 생각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랍비님, 이 사람이 눈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 때문입니까?”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이 대답해 주셨습니다.“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리고는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맹인의 눈에 발라주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쩐 일입니까? 매일 아침마다 세수를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상을 밝히 보게 된 것입니다.
이때, 이 사람이 느꼈을 감격은 겪어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제대로 알 수 없을것입니다.
눈을 뜨게 된 그는 예수님을 찾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때로 부터였습니다.
<맹인이 보게 되었다> <맹인이 예수님 때문에 보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축복해 주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경험하고,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나는 — 이다’ 자기 정체성을 들은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순수하게 기적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부류와,
반대로 기적을 의심하고, 예수님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부류였습니다.
이런 두 가지 반응은 오늘날도 여전히 나타납니다.
같은 복음을 듣고도, 한 부류는 믿고 그 분을 따르지만, 또 한 부류는 의심하고 따르지 않는 부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순수하게 믿고, 주님을 따르시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맹인이 보게 되었습니다.> <맹인이 예수님 때문에 보게 된 이 표적으로>
아들과, 부모가 나눠졌습니다.
아들은 –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언자로 믿었습니다.
부모는 – 아들이 보게 된 것은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유대교에서 출교되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에서도 <바리새인과 제자들이 나눠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 <맹인이 눈을 뜬 사실>은 명백하기에 그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표적을 행했다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 ‘나는 세상의 빛’이신 분이셨기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분명 <맹인이 –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뜨고 보게 되었는데>그에게 마음을 다해 축복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님들도 축복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웃사람들도 축복해 주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도 축복해 주지 않고 오히려 눈 뜬 이 사람을 그들의 사회에서 출교해 버렸습니다. 무서운 결정입니다.
출교당한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다시 찾아가셔서 <내가 너를 고쳐주었고, 내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메시야로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왔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고, 반대로 바리새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꼬투리를 걸면서 그럼 우리가 “맹인이네요”라고 시비를 걸어옵니다.
<시비를 걸어오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 이다!”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시는 말씀이 오늘과 다음주일에 생각할 요한복음 10장의 앞 분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0장 앞부분을 분해하면
① 목자와 양(1-6절)
② 문 되신 예수(7-10절)
③ 선한 목자 예수(11-18절)
④ 그 비유의 결과(19-21절)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정체성을 밝힙니다.
“나는 문이다”(7절, 9절)
“나는 선한 목자이다(11절, 14절)
그 중에 오늘은 “나는 문이다”라는 부분을 생각하고, 다음주일에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는 정체성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나는 문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에 양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농사도 짓고 살아가지만, 목축이 더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를 가보면 양을 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양을 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목자의 집 가까이에 양의 우리를 두는 방법입니다. 우리나라 시골에 소 우리나 돼지우리를 상상하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양의 우리를 목자의 집 가까이에 지어 놓고, 아침이면 양을 몰고 들로 산으로 데리고 가서 풀을 먹인 다음, 저녁이면 우리로 몰고 와서 가두어 둡니다. 밤중에 사자나 이리가 와서 안전하도록 문을 튼튼하게 잠갔다가 다음날 아침 다시 양들을 일일이 부르고 점검하여 들로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양의 우리가 일정한 장소에 없는 경우입니다.
목자는 아예 양들을 따라 풀이 많은 곳으로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24시간을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몰골에서 양이나 야크를 기를 때에도 이런 방법들 사용합니다. 낮에는 풀을 뜯어 먹이다가, 밤이 되면, 천막을 치거나 아니면 동굴이나, 혹은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에 양들을 모아 놓고 그대로 같이 밤을 지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그 당시에 목자들이 양을 치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목자는 오로지 양을 잘 치기 위해 풀을 따라 이동 시켰고, 밤에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자가 양의 문이 되어서 밤새워 지켰습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들에는 어린 아이들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 어쩌면 인간으로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그 문제를 가직 누구라도 이해하기 쉬운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양과 인간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① 눈이 어둡다(먼 거리를 보지 못한다.)
양의 가시거리는 15m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보이는 세계도, 보이지 않는 세계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 중에 <내일 어떤 일이 있을지? 모래 무슨 일이 있을지 보입니까?>
<1주일 후의 주식의 변동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②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염소는 혼자서 잘 살지만 양은 항상 무리지어 함께 다닙니다. 사람도 부모와 자식, 형제, 교우들,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③ 목자가 이끄는 대로 다닌다.
양은 목자가 풀이 있는 곳, 물이 있는 곳으로 이끄는 대로 따라 다닙니다.
사람도 어려선 부모와 선생님이, 장성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노년에는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예수님과 목회자가 이끄는 대로 다녀야 풍성한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해서 예수님이 1-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듯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는 양이다> 한 번 따라 해 보실까요 <나는 양이다. 우리는 양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목자가 없이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절대 혼자서는 행복하게 살 수 없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를 못했습니다.(6절)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의 “나는 문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라는 말의 이미를 구약 성경으로 설명하다면 <무슨 상징어>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 애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은 후,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도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신의 집 브엘세바에서 출발해서 벧엘까지 도착했을 때 해가 졌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벧엘에도 여관이 있겠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노숙을 하게 됩니다.
평평한 자리를 찾고, 돌을 하나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누었습니다.
눕기는 누웠지만 잠은 쉽게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모의 품을 떠났습니다. 형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죽음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외삼촌이 있는 하란까지의 길도 험난했습니다. 외삼촌이 자신을 반갑게 맞아준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늦게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면서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누운 곳에서부터 하늘까지 사닥다리가 놓여있었습니다. 천사들이 그 사다리로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리고 사닥다리 꼭대기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 꿈을 꾼 야곱은 다음 날 아침 돌베개를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벧엘 :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예수님은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사닥다리를 인용하며 예수님 자신이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영적 사닥다리임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유일한 통로가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원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연결통로가 막혀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불법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를 막기 위해서 미국에서 장벽을 높게 설치해서 못 들어가게 한 것처럼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라는 높은 장벽이 막혀 도저히 인간은 하나님께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벽을 뚫고, 하늘로 가는 문을 여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밝힙니다.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우리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문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우리를 이어주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막힌 담을 자신의 육체로 허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보다 먼저 와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하는 자들은 다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전에 메시아를 자칭한 <드다>와 갈릴리의 <유다>는 사실상 강도였고, 사기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말씀 중 절정에 해당되는 말씀을 보십시다.
9-10절을 함께 읽어보실까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에서 우선 눈에 큼직하게 들어오는 부분을 보세요.
<누구든지> - 여러분 세상에 존재하는 문은 모두가 일정한 자격이 갖추어져야 들어가 갈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입학의 문을 통과하려면 공부를 잘 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기업 취업의 문을 통과하는 것도 자격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도 들어가려면 허가가 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문은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인, 황인, 흑인 차별이 없습니다. <교육의 정도, 사회적 지위, 건강하거나 아픈 자 / 빈부귀천, 남녀노소>등 세상에서 내거는 조건은 필요 없어요.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가는 문임을 믿는 자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9절 : 구원을 받습니다. / 풍성한 꼴을 얻습니다.>
<10절 :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10절 말씀은 요한복음의 기록목적과 같은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면, 목자 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풍성하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독한 시편 23편을 분석해 보면 <예수님의 문을 통과해서 하나님을 목자로 삼는 자자가 누릴 풍성한 삶을 5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 부족한 것이 없는 삶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모자람이 없고 차고 넘치는 초과분이 파도처럼 항상 넘칩니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입니다. 돈이나 건강, 성공에 있어서 좋은 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목자 되시니 부족함이 없어서 좋은 것입니다.
양들은 모든 위험이 지나가고 안정감을 느낄 때 비로소 자리에 눕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위험을 제거하고 편히 쉬게 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인도를 받는 삶입니다.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란? 주님이 가신 길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꼴만 풍성히 먹는 게 아니라 생수도 흡족히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위기를 탈출하는 삶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란 예수님이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놀라운 삶으로 변화시켜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넷째, 적들 앞에서 상을 받는 삶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풍성한 삶이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위로와 상급을 주실 정도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절)
이 복을 누가 받았습니까?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에게 가는 유일한 <문>이 되시기에, 그 분으로 들어가고 나옴으로 시편 23편의 다섯 가지 복을 우리 모두 누리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