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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mAsWW90MioQ
본문 로마서 8:1-4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9-07-28

로마서 8장 강해 ① 로마서 8:1-4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오늘부터 7주간 동안 로마서 8장 말씀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7주간 강해를 하고 성도님들의 반응을 봐서, 1장부터 강해를 시작하던지, 다음 기회로 미루어 놓든지 하겠습니다.

어떤 방식을 선택하던 분명한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로마서의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는 16장 433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시 고린도에서 3개월 머물때 겨울을 보내면서 로마서를 기록합니다. 그 때가 서기 57년경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무척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길이 자꾸 막혀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편지부터 먼저 써 보낼 생각을 하고 <더디오>라는 비서를 불러서 구술을 했습니다. 바울이 시력이 별로 좋이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한 마디 한 마디 불러 주는 대로 더디오가 받아 적어서 기록을 끝내자

바울은 이 편지를 여 집사 뵈뵈의 손에 들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전해 주도록 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기독교 역사상 교회를 개혁하고, 부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로마서로 인해 세계역사가 개조되었습니다.

로마서로 인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서로 인해 <어거스틴, 마틴 루터, 요한 웨슬리>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로마서를 제대로만 알고 믿는다고 하면, 오늘 한국교회에도 우리 개인에게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목사님도 몇 년 전부터 로마서 강해를 시작했고, 그 설교가 <복음으로 산다.>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습니다. 책 서문에 로마서를 강해한 이유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복음이 무능한 게 아니라 우리가 몰라서,

우리가 무지해서 무력해 보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도 복음을 제대로 알고,

그 복음의 능력을 제대로 경험하면,

교회에서 복음을 잘 가르치기만 한다면,

복음은 여전히 역사하는 능력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받았다.

내가 로마서를 비장하게 꺼내 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찬수 목사님이 로마서를 강해하게 된 동기에서도 밝히셨듯이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복음을 들어야 할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교회 밖이라고 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들어야 할 자들이 많다고 말씀한 것에 유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교회 안에 있지만 복음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들,

- 구원의 감격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자들

- 말씀을 들어도 감각(감격)이 없는 자들

- 심지어 잘못된 복음에 익숙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성도들에게 <로마서를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시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가서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발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여러분이 로마서를 보다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로마서 중에 중요한 세 곳말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① 1장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많은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로마서의 주제로 봅니다. 짧은 두절이지만 로마서 16장 전체를 압축한 말씀과 같습니다.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머리에 떠올리게 됩니다.

1511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루터는 그가 속한 종파의 사명을 띠고 로마로 갔습니다. 그때 루터는 30세의 청년이었습니다.

<사진 1, 성 계단 성당>

로마에 도착한 루터는 많은 순례자들의 틈에 끼어 <성 계단 성당(Scala Santta)>를 무릎을 꿇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계단을 일명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총독 빌라도에 의해 돌아가시던 날 모욕과 고통을 받으며 오르내리셨다는 전설이 담겨있는 28층계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여간, 지금도 성지순례를 가면 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루터도 다른 순례자들처럼 그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에 그 마음에 떠오르는 구절이 로마서 1장 16-17절이었습니다.

특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번개처럼 그의 심령에 부딪쳐 왔습니다. 그는 중도에서 계단을 걸어서 내려왔고, 이때 이미 그의 마음은 로마교회와 결별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근거로 1517년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② 3장 23-25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 말씀은 로마서의 중심이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말씀 중에 25절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가 있고,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고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쿠퍼도 이 말씀에서 영혼의 평안을 얻었다고 하고, 우찌무라 간조도 25절 말씀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③ 13장 11-14절 (성도님들과 함께 읽어보십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힘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의 수는 한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사진 2. 성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을 살아서 거의 어머니 모니카 눈에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서기 386년 여름, 괴로워서 무거운 가슴을 누르며 정원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지 모르게 가늘고 미묘한 아이들의 노래가 그의 귓전을 때렸습니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 (들고 읽어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무엇에 홀린 듯 서재에 들어와 성경책을 펴 보았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장 끝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눈에 불을 켜고 11절 이하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거꾸러져 강렬한 회심을 경험합니다.

 

훗날 그가 기록한 글에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되겠다. 더 이상 읽어갈 필요가 없다. 이 구절을 읽는 중에 갑작스럽게 찬란한 빛이 내 마음에 환하게 비추었고, 그 모든 의심의 먹구름이 말끔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회심의 역사가 우리교회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미국, 엠허스트대학교 총장 실리가 –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에게> 한 말씀을 들어보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보일 것입니다.

“네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 놓고 날마다 잡아당기며 발육상태를 관찰하는 것과 똑 같은 것으로서, 이는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너 스스로 깨끗해지려고 애쓰지 말고 다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우러러 보아라.

그러면 평안이 네게 임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옛날 믿음의 선배들을 변화시킨 로마서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로마서 이해를 위해 한자 한 자 필사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귀중한 사명을 다한 <멜란히톤>도 로마서를 두 번이나 필사했다고 합니다.

옥한흠목사님은 로마서 8장을 성도들에게 암송하도록 권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전에 사역훈련을 할 때, 8장의 말씀을 암송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암송하셨던 분들은 다시 암송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암송가능하시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교회 앞에서 암송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필사든 암송이든 어떤 방법이든 –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럼 로마서 16장 가운데 8장을 강해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을 학자들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흐르던 여러 갈래의 강물이 로마서 8장에서 하나의 생수의 강을 이루어 하나님의 어린 양 보좌 앞에 깔린 수정처럼 맑게 흐르고 있다”

“성경이 다 불타서 없어진다 해도 로마서 8장만 있으면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경건파의 창시자 슈페너는 “만일 성서를 반지에 비긴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며, 로마서 8장은 그 보석에서 가장 반짝이는 부분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로마서를 하나의 산에 비긴다면, 8장은 꼭대기까지 올라선 곳, 곧 절정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서른아홉 절 말씀은 성경의 핵심임과 동시에 우리가 겪는 문제에 대해 전천후적인 대답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 마음의 정욕이 발동할 때, 성령의 은혜가 의심날 때, 고독을 느낄 때, 기도의 응답이 오지 않을 때, 고통에 빠질 때, 소망이 흐려질 때 등>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여러분의 문제에 해답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문제가 이 말씀을 통해 해결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가 앞으로 7번 강해할, 로마서 8장의 서론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내용 구성은 간단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 결코 정죄함이 없다”

 

간단한 말씀 같지만,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 7장을 포함한 1장부터 7장까지의 내용 전체를 알아야 합니다.

앞부분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지금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 대다수는 종살이를 하고 있는 자들이었겠지요. 그들은 과거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다면 삶에서 예수님처럼 완벽한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장 영적으로 행복한 사람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세례를 받고,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면서 큰 트럭에 치어 천국 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 말씀은 인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세례를 받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믿음은 있지만 우리의 삶의 현실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진흙구덩이처럼 더럽고 추합니다. 그러니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고 싶지만, 육신으로는 세상의 더러움이 자신의 몸에 묻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 앞에 선 죄인들이라 할 수 있지요.

 

지금 바울이 말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의의 종이 되었지만, 육신을 가진 인간이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는데, 그때 불신자와 사탄이 성도를 정죄를 하여, 그것으로 고민하는 자들에게 그것 가지고 고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말씀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죄를 짓는 불신자와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죄를 짓는 불신자가 – 국가의 법 조문을 어기는 자라면,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은 – 가족들 중 다른 가족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죄 용서함을 받았기에, 우리를 가지고 그 어떤 사탄마귀도, 사람들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라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누구도 정죄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절, 3절, 4절에는 이에 대한 부연설명을 합니다.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말씀은 우리가 지난 주일에 생각한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된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열매는 자동으로 맺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을 내 속에 넣는 것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하기에, 전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의 법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은퇴하신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교회 담임목사이셨던 이재철 목사님은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을> 이해하기 쉽게 <새와 돌>에 비유했습니다.

우리가 돌을 아무리 세계 하늘로 던져도, 돌은 금세 떨어지고 맙니다.

이와 반대로, 두 손으로 새를 잡아 공중으로 던지면 새가 날개 치며 곧 솟아오릅니다. 이유는 새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가 죄를 지으면 죄의 바닥으로 이내 추락하게 되지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로 한 순간, 성령의 법이 우리를 끌어올려 영원한 생명으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화 하나를 소개해드립니다.

그리스 임금 중에 자리우커스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통치하던 시대는 성도덕이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간음이 일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지 간음을 저지르면 그 사람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게 하는 법을 선포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사람이 간음하다 발각되어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의 아들이 간음한 사실일 발각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나중에 왕위를 이어받아 나라를 통치해야할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장님이 된다면 어떻게 나라를 통치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임금이 특별 사면을 해준다면 이미 법에 의해 장님이 된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에 임금은 고민 끝에 아들의 한쪽 눈을 찌르고, 자신의 한 쪽 눈을 찔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법은 법대로 지킬 수 있게 되었고, 아들 또한 죗값을 치러 왕위를 물러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임금이 아들을 대신해 자신의 눈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도 죽어야 했지요. 그런 우리를 위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사셨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없는 것입니다.

 

4절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되었기에, 우리는 육신을 따라는 삶(자신을 쫓지 않는 삶,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살지 않고, 율법에서 요구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전체와, 8장 서론, 그리고 1-4절 말씀의 이미를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과, 앞으로 생각할 말씀을 통해서 <복음의 본질>을 바로 아셔서 그 옛날 바울이 가졌던 뜨거움과, 믿음의 선배들이 경험했던 새로운 변화를 여러분에게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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