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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w7bwLoTGeIA?list=PLxagvfr0a-YYk6-YWcCjYjLErhinUde7s
본문 안디옥교회 이야기(행 11: 19-30)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10-15

사도행전 11:19-30 안디옥교회 이야기

 

복음은 순탄한 환경이나 고난이 없는 가운데 성장하거나 전파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상하게 고난이 없고 환경이 순탄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 같은데 오히려 나태하고 게으르고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고통과 역경이 오면 복음의 불이 꺼질 것 같은데 오히려 복음의 불이 활활 타올라서 사방으로 전파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안디옥교회도 예루살렘교회에 임한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의 불이 전파되어 만들어진 교회입니다.

먼저 19-21절을 보십시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8장으로 가야 합니다.

7장에서 스데반이 순교하고, 그 여세를 몰아 8장에 오면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그 박해를 평신도들이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한 후에,

8:5 부터는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복음을 전한 내용을 이어서 기록합니다.

 

오늘 말씀은 8:4의 말씀 이후 일어난 또 다른 말씀입니다.

19절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어떤 사람은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갔고,

어떤 사람은 육로를 따라 북상해서 베니게와 안디옥까지 이르러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이란 도시에 복음이 전해진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의 세 번째 가는 도시였습니다. 첫째가 로마, 두 번째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세 번째가 안디옥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에 벌써 인구가 오십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굉장한 수준입니다. 특기할 것은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오십만 명중 7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안디옥에는 회당도 많고 유대사람이 모이는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도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안디옥에 예루살렘의 핍박으로 인해 평신도들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고(19절),

그 중에 일부는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20절)

중요한 것은 누가 전했는지 이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저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13장의 말씀을 보면 안디옥교회 선지자와 교사 중에 “구레네 사람 루기오”라는 말이 나오기에 루기오가 복음을 전하는 자 중에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는 추정하지만, 어쨌든 오늘 본문에는 전도자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도자의 이름은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들로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21절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비록 소수의 사람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꿈을 이루기 위해서 힘쓰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게 되었고, 복이 넘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도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정에도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에게도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교회에도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힘든 우리나라에도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름 없는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니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고, 수많은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모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살펴보고, 예루살렘교회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파송하게 됩니다.

22-24절을 보십시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교회를 살펴보고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바나바>를 보냅니다. 생각 없이 이 말씀을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만, 말씀을 깊이 보면 아직도 예루살렘교회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데반 순교로 인해서 사도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지켰고, 헬라파 유대인들은 흩여졌습니다. 그들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는데 사마리아에 복음의 불길이 일어나자 <베드로와 요한>사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복음의 불이 타오르자 지금은 사도가 아닌 평신도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바나바보다 사도들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사도들의 잘못을 하나 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아직까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 이방인들에게 가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한다는 것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안디옥으로 가지 않고, 평신도였던 <바나바>를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면 다음 주에 생각할 예루살렘교회 야고보의 순교이야기가 눈에 보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구체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정도로 하고 넘어갑니다.

 

안디옥에 온 바나바는 이미 앞에서 몇 번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에게 둔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4:37)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사도들은 전부 사울을 두려워해서 만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사울과 사도들 가운데 서서 중간 역할을 해 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9:27)

잘 생각해 보면 바나바는 드러나게 예루살렘교회에서 일하지는 않았지만, 교회가 꼭 필요한 자리에 등장하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안디옥교회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안디옥에 보내야 하는데 그 많은 성도 중에 <바나바>를 선택해서 보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오자 놀라운 현상을 보았습니다.

23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안디옥에 도착해서 무엇을 보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교회를 파악하려고 왔으니 <몇 사람이 믿는가? 어떤 일이 생겼는가? 과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방사람이 많으냐? 유대사람이 많으냐?>는 것을 따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볼 때도 은혜부터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은혜를 보고 사귀세요.

교회에 와서도 이왕이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사람 옆에 앉으려고 하셔야 합니다. 옆에 앉은 사람이 한 시간 예배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졸거나, 주보에 낙서를 하거나, 기지개를 펴거나 하품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옆에 앉는 순간 전염이 됩니다.

반대로 옆에 앉은 사람이 은혜 충만한 사람이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찬송을 하는데 집중합니다. 기도인도자의 소리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설교는 집중해서 듣고 메모할 것이 있으면 메모를 하고, 아멘 소리를 내면 옆에 있는 사람이 덩달아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나바처럼 은혜를 보고, 은혜를 전파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24절에는 바나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말이 나옵니다.

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故 옥한흠 목사님은 이 말씀에서 <“착한 사람”은 <자연 인격>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신앙 인격>>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연인격>은 “선천적인 기질과 후천적인 영향으로 형성되는 것”이고,

<신앙인격>은 “신앙생활로 통해 영적인 은혜를 받아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나바는 이 둘 모두를 골고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들을 보면 이 둘을 다 갖춘 사람도 있고, 반대로 둘 중에 하나가 부족하여 교회와 성도를 힘들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을 다 갖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나바는 자연인격과 신앙인격을 갖추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았습니다. 그런 그가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더 견고하게 주께 붙어 있으라.> 권면했습다. 그 결과 24절 하반 절에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합니다.

 

복음의 불이 붙은 안디옥교회에 + 지도자 바나바가 와서 권면하니 = 복음의 불이 더욱 활활 타올랐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교육부서에 아이들이 가진 복음의 불씨 위에 + 교역자와 교사들의 지도로 = 복음의 불이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구역에도 구역 원들의 복음의 불씨 위에 + 구역장과 권찰의 지도로 = 복음의 불이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교회에도 성도들의 복음의 불씨위에 + 목회자의 지도로 = 복음의 불이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보통의 경우, 이렇게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 교회가 부흥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안주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자리를 남에게 내어주기 싫어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내가 개척해서 교인이 몇 천 명, 몇 만 명 되면 이것은 내 교회인데 어떻게 다른 목사를 담임으로 앉혀하면서 앉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사위에게 그 교회를 세습하고, 지금도 교회의 법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세습을 시도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가 부흥하자 교회를 위해서 사울을 찾으러 갔습니다.

사울과 바나바의 관계는 이미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사울과 사도들의 중간에 서서 만나게 해 준 사람이 바나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이 가이사랴에서 배를 타고 다소로 가는 길에도 배웅해 주었을 것입니다.(행 9:30)

 

인정적인 면에서는 이런 관계이지만, 사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사울이 훨씬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바나바인들 왜 모르겠습니까? 바울과 자신을 비교했을 때 성도들이 누구를 더 좋아할지는 뻔 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주저함 없이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습니다.”

본문 25절에 <찾으러>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사울을 다소에서 만나기 힘들었다는 말입니다. 당시는 요즈음처럼 주소,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소문을 해서 찾았는데 찾기 만만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서 안디옥으로 와서 바울과 함께 1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자와 동역하기를 원하는 <바나바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1년이란 기간 동안 바나바와 사울은 가르치고, 성도들은 배웠다>는 말에 집중해서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왜 성장을 하지 않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배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배움, 교회적인 배움의 기회가 있을 때 배워야 하는데 배우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한 주일에 한 번 예배시간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데도 배울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 문을 닫아요. 어떤 분은 예배시간 새로운 은혜를 받아 가는데, 어떤 자들은 졸거나 엉뚱한 짓을 하다가 돌아갑니다.

여러분 어떻게든 배워서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되어지기를 바랍니다.

 

1년 이런 세월을 보냈더니 안디옥에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니 정상이 아니에요. 모두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저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크리스티아노스’ / 영어로는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하는데

헬라어 ‘크리스티아노스’ =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Christ’와 + 출신을 의미하는 ‘ian’(이안)이 합해졌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조금 풀어 설명하면, 안디옥의 일반사람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향해 <예수 밖에 모르는 사람들, 예수쟁이들, 예수 도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만한 안디옥 시민들은 자신과 예수 믿는 성도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붙였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성경에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오늘 본문 16절과 행 26:28, 벧전 4:16> 이렇게 3번 나오는 말입니다만, 지금은 전 세계 예수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고 하고, 스스로도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그저 이름만이 아닌 진짜 처음 안디옥 성도들에게 붙여진 이름처럼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해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 진짜 <크리스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한 단락 남은 말씀을 보십시다. 이 말씀은 안디옥 시민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까지 받은 안디옥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27-30절입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교회가 한 참 부흥하여 재미있을 때에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들이 왔다고 합니다. 예언자들을 말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아가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예언을 했는데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아가보의 예언대로 로마치하에 모든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글라우디오 황제 때>라는 것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주후 41-54년까지 로마제국을 지배한 황제인데 참 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로마 제국 곳곳에는 흉년이 끊이지 않아 민심이 무척 소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에 황제의 자리는 가시방석 같았을 것입니다.

 

그 흉년이 안디옥에도 닥쳤고, 예루살렘에도 닥쳤습니다. 기록을 보면 아마 예루살렘이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하였기에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작정하기로 결의합니다. 그 내용이

29절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여기에서 우리는 헌금의 원칙을 발견합니다. 성경적 헌금의 원칙은 <각각 그 힘대로>입니다. 자신의 형편에서 그 힘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0절은 실행에 옮겼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새로 만들어진 안디옥교회가 – 영적인 영향을 받은 모 교회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낸 것입니다. 안디옥교회 편에서나 예루살렘교회 편에서나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 것이 많은 부분입니다.

 

우리는 두 교회 전체를 통틀어서 정리해 보면 성령 받은 성도, 성령 받은 교회에는 세 가지 특징이 초대교회에서는 나타남을 봅니다. 첫째는 전도한다. 둘째는 구제한다, 셋째는 선교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요소는 오늘 우리교회에도 있어야 할 요소이고, 여러분에게도 있어야 할 요소입니다.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전도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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