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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IndMQWoTvv8
본문 다시 부흥이 일어나다.(행 5:12-16)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5-28

사도행전 5:12-16 다시 부흥이 일어나다.

 

우리는 지난 시간 생각하기 싫은 한 사건을 생각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에 사탄이 잠입하려는 사건이었습니다.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서 교회에 들어오려다 성령 충만(사로잡힘, 절대복종)한 베드로에게 들통이 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자리에서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구약에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건이 있습니다. <아간 사건입니다.>

아간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면 여리고성 점령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향하는 여호수아를 만나주십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 5:1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소명을 주실 때도 이 말씀을 하셨지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힘은 세상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거룩함에 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방법을 여호수아에게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제사장은 양각나팔을 가지고 앞장서라. 그 뒤에 법궤가 따르고, 그 뒤에는 군사들이 따르라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에서 이런 방법으로 전쟁하는 것은 전무후무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방식대로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 돌고, 일 곱 번째 날은 일곱 바퀴를 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바퀴를 돌때 제사장은 양각나팔을 길게 불고, 백성들이 함성을 지르면, 성이 함락된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전쟁의 방식이었지만, 여리고성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만 듣고도 온 몸이 굳어갔고, 결국은 성이 완전히 함락되었습니다.

 

여리고성의 전쟁을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타티 전쟁>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나타티>라는 말은 → <나탄> 에서 나온 말입니다. 뜻은

① 네 손에 다 주었다. ② 네게 다 허락했다.

③ 너로 봉헌케 하겠다. ④ 너로 하여금 이 가나안 땅을 새롭게 만들어 가겠다.

설명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시켰습니다. 40년 세월 동안 출애굽 1세대는 죽고, 2세대로 구성된 공동체가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왜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까? 하나님이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해서 들어왔습니다. 순종만 하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전부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부를 하나님이 주실 텐데, 첫 번째 점령하는 여리고성 만큼은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타티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타티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요, 여호와의 전쟁이요,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지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읍도, 사람도, 짐승들도, 전리품도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방법대로 완벽히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나서 두 번째로 아이 성과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완벽한 승리를 한 여호수아 군대는 어떤 전쟁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아이 성과의 싸움에는 군사 3천명만 나가도 이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스라엘의 패배였습니다. 36명의 이스라엘의 군인이 죽었습니다. 문제는 죽은 36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마음이 무너져버린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 패배문제로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게 된 이유를 말씀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수 7:11)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건을 속여서 감추어 놓은 사람이 있어서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그 사람이 <아간>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간을 추궁하였더니 아간이 범죄사실을 실토합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수 7:21)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는 것 중에 <보고, 탐내어, 숨겨놓았다.>는 것입니다. 아간 역시 자신이 숨겨놓으면 하나님이 모르실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전쟁에서 불순물이 들어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간과 그의 가족, 훔친 물품을 아골 골까지에서 사람은 돌로 쳐 죽이고, 숨긴 물건은 불살라 처리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보셔야 할 것은 그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한 돈 일부를 숨겼다가 죽었구나, 아간이 <전리품을 훔쳤더니 죽었구나!> 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거룩하고, 성결하고, 순결하기>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 나는 거룩하고, 성결하고, 순결한가? 하는 것을 물어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은 여호수아 때나 초대교회 때처럼 하나님의 눈을 속인다 해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죽이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막 살아도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여호수아시대에 역사하신 하나님, 초대교회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정리될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성결함, 순결함을 많이 상실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끊을 것 끊어야 하는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분들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끝내기를 원합니다.

청년들에게 성적으로 순결을 말하면 “목사님 지금이 어떤 시절인지 아세요?” 하며 도리어 저를 이상하게 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여러분에게 대수롭지 않는 것 같겠지만, 성결, 순결은 영적인 문제와 깊이 연관이 되어 있기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청년들이나 장년 모두가 세상이 나를 타락하게 만들고, 순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대답하고, 끊을 것은 끊고 거룩함과 정결함을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의 내용을 생각해 보십시다.

성령을 속이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었을 때, 초대교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아간을 정리한 후 이스라엘이 연전연승으로 가나안을 점령했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정리하고 나자 초대교회 또 다시 부흥이 찾아왔습니다.

 

12-14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십시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이 말씀에서 부흥의 요소를 4가지 정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12절 상반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먼저, ‘표적과 기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표적’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적’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적’은 헬라어로 <테라스>이고 영어로는 <wonder>로, <아주 놀라운 사건, 깜짝 놀랄 사건, 초자연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가면 ‘표적’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테라, 혹은 세메이아> 영어로는 <sign>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이적(기사)’과 ‘표적’을 다 사용합니다.

그러니 표적은 뭐냐, 이적(기사)은 뭐냐 –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같은 사건인데 표적이라는 관점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보이는 발전적인 신앙입니다.

 

예를 들면, 성전미문에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적(기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압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돌보신다.> 며 그 사건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의 구체적인 현상을 15-16절에 소개합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런 놀라운 일이 누구를 통해서 일어났습니까?

12절 상반절에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의 손을 통해 일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부터 1921년 사이에 하나님께서 김익두 목사님을 특별히 쓰셨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일합방으로 민족적 기운이 꺾이고 많은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칠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김익두 목사님을 통해서 성령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대구 근방에서 일어난 것만 해도

경산에서 중풍병자가 고침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월리교회에서는 혈루증을 앓던 성도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현풍교회에서는 아래턱 기형 환자 박수진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당시 장로교 헌법에는 “금일에는 이적을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도행전과 사 복서에 나오는 이적과 기사가 정지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적과 기사 운운하는 것은 이미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금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김익두 목사를 통해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자 결국 1923년 장로교 총회에서는 이 조항을 수정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적 기사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면 지금도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세워주시는 목회자를 통해 이런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항존 직분자들도 꼭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능력, 섬기는 능력, 화해의 능력, 상담의 능력,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 열심히 모였습니다.

12절 중반절 “…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부흥기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열심히 모였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그러했고,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부흥시기에고 그러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보았고, 소식을 들었던 성도들은 솔로몬 행각으로 모였습니다.

솔로몬 행각은 일백 육십 개의 기둥과 지붕이 있고 벽이 없는 복도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솔로몬 행각은 가르치고 토론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왜 모였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4장의 말씀을 보면 지금 성도들이 모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베드로를 잡아들였고, 협박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칫 잘못하면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유는 아나니아 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끝난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삼 일 만에 살아나셨다.

예수님이 영으로 우리와 함께 지금도 계신다.

우리가 이 땅에 살다가 언젠가 죽겠지만 그래도 걱정 없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날 것이기 믿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초대교회 교인들은 <부활신앙>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살아계신 소식을 더 듣기 위해 예배가 있고, 말씀이 있는 솔로몬 행각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자리로 모이는 것과 믿음과의 관계는 밀접합니다.

지난주일 청년주일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설문조사한 결과 예배의 참여횟수와 믿음의 관계는 유의미한 관계로 나타났습니다.

지금 초대교회 교인들은 마음이 하나 되어서 열심히 모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13절에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라고 합니다. 왜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사람들은 그 모임에 가담하면 언젠가는 화를 당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이 없었기에 상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배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모이십시오.> 목회자가 억지로 광고해서 체면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강권해서 자동적으로 모이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백성들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13절 하반절 “… 백성이 칭송하더라”

여러분! 교회에는 교회 안 밖으로 두 가지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시끄러워야 합니다. - 싸우고 분쟁하는 시끄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시끄러운 소리는 이런 것입니다.

기도하는 소리로 교회가 시끄러워야 합니다.

찬양하는 소리로 시끄러워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소리가 시끄러워야 합니다. 주차장에 예배하려고 오는 자동차소리로 시끄러워야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교 장로회 통합이라고, 자칭 장자교단이라며 설교시간에 기침소리만 간간히 들리고, 기도하는 데 옆 사람 숨소리까지 들리고, 찬양하는 데 손뼉 하나 마음껏 치지 못하고, 남의 눈이 의식 되어 손 한번 들지 못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설교시간에도 아멘하기가 부담스러워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교회는 조금 시끌시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시끄럽지만 지역주민들의 입에서는 교회가 시끄럽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정동교회는 우리 지역에서 꼭 필요한 교회>라고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교회 핵심 5대 비전 중 두 번째가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교회”이지 않습니다. 그저 구호로만 그치는 비전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입에서 정동교회는 지역에서 꼭 필요해! 라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비록 불신자에게 누가 근방에 좋은 교회가 어디냐고 물을 때 그분들의 입에서 “교회에 가려면 정동교회에 가세요. 정동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라고 칭찬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교회의 아름다운 소식이 널리 알려질 것이고, 지역 주민들이 우리교회를 칭찬하게 될 줄 믿습니다.

 

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14절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초대교회가 성령 충만을 회복하니 남녀의 큰 무리가 교회로 나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성령 충만을 회복하기만 하면, 믿는 자의 수는 늘어날 줄 믿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매주 이렇게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아나나아와 삽비라 부부로 통해 사탄이 들어오려는 것을 성령하나님이 막으셨더니, 다시 부흥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와 교회의 <거룩과 순결>을 가로막는 세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셔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과 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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