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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V9z8HPoYv0o
본문 사도행전 28:11-28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8-11-25

사도행전 28:11-28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바울은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꿈을 이루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도 이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고린도에 3개월 머물며 로마서를 기록할 때 자신의 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10)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로 가고자 하는 꿈을 꾸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야되는 이유를 이어 두 가지로 말씀하는데 하나는 바울이 받은 은사를 나누기 위함이고(롬 1:11), 또 하나는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함(롬 1:15)이라고 밝힙니다.

 

로마로 가고 싶어 했던 바울의 꿈은 그로부터 4년 만에 이루어집니다.

꿈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그 여정을 <바울의 로마 여행지도>를 보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림자로 1. 바울의 로마 여행지도>

지금까지 여러 번 봐왔던 지도기에 익숙하지요.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은 체포됩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받게 되었고, 예루살렘에 있다가는 로마로 가지도 못하고 죽겠다는 느낌을 받은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로마 <로마총독부>가 있던 가이사랴로 옮겨져서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합니다. 가이사랴에서도 재판이 있었지만 바울의 죄는 발견하지 못했고, 바울이 로마 황제께 상소했기에 바울의 원대로 로마로 압송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드라뭇데노로 가는 배를 타고 항해하다. <무라에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호로 갈아탑니다. 그레데 섬에서 뵈닉스 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하며 죽을 고생을 합니다. 결국 배는 파선되었고 276명은 무사히 멜리데 섬에 도착합니다.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일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겨울 3개월을 보낸 후 276명은 로마로 다시 출발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일행이 탄 배가 알렉산드리아 호라고 밝혔는데 파선한 배가 아니라, 다른 배를 말합니다. 대한항공에 여러 비행기가 있듯이 알렉산드리아 호도 여러 배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멜리데 섬에서 출발하여

145km 떨어진 수사구라에 도착해 – 3일 정박해 있었습니다.

수사구라에서 출발한 배는 레기온에 도착해 – 1일 정박합니다.

레기온에서 출발한 배는 370km 떨어진 보디올에 하루 만에 도착합니다.

370km라는 먼 거리였는데 남풍이 불어서 쉽게 도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때는 쾌속선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보디올 부터는 육로로 걸어서 로마로 가게 됩니다.

바울 일행은 보디올에 7일을 머물렀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바울을 환영하였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7일 후에 보디올을 떠나 – 압비오 광장 – 트레이스 타베르네(개역판 삼관(세 여관)을 거쳐서 로마로 들어갔다는 말씀을 기록합니다.

눈 여겨 보실 것은 <바울이 보디올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바울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바울을 영접하기 위해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로마행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때 이미 로마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바울의 사역을 도울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이 바울이 로마로 온다는 소식을 들고 영접하려고 온 것입니다.

로마로부터 53km 떨어진 <트레이스 타베르네(삼관)>까지,

로마로부터 69km 떨어진 압비오 광장까지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 쉽지, 실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들어오면 그때 찾아가서 맞이하면 되지, 로마에서 그 먼 곳에 나와 바울을 영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그 먼 곳에 나와 바울을 영접하였습니다.

1. 여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우리가 모델로 삼을

<교역자들과 성도들의 아름다운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을 영접하려고 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로마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이었겠지요. 바울이 4년 전 고린도에서 로마에 편지를 보냈을 때 로마서 16장에 보면 문안인사를 하라고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간호학 책에 나오는 세계 최초 간호사 – 뵈뵈 집사(롬 16:1)

바울의 동역자로 자신의 목이라도 바울에게 줄 수 있었던-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롬 16:3-4)

바울의 사랑을 받은 – 에베네도(롬 16:5)

로마 교인들을 위해서 수고한 – 마리아(롬 16:6)

바울의 친척이었고 바울과 함께 갇혔던 적이 있던 –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의 아들 - 루포, 구레네 시몬의 아내(롬 16:13)

 

이 사람 외에도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쓸 당시, 로마에는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로 통해서 복음을 들은 많은 자들도 바울이 로마로 온다고 하니 바울을 영접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만남의 장면을 저자 누가는 15절 하반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여러분!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이보다 어떻게 좋게 표현하겠습니까?

목회자가 성도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고, 자신들의 동역자와 성도를 보면서 마음이 담대해져서 사역을 더 힘차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가 오늘 교회 안에는 형성되고 있습니까?

성도는 목회자를 보고 싶어 하고, 목회자는 성도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런 성도들 때문에 담대히 힘을 내어서 사역하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

 

<그림 자료 – 책 표지 그림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저는 얼마 전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이란 설교집을 읽어보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목사님은 미국 복음주의의 아버지로서 지금까지 미국 교회가 배출한 최고의 설교자입니다. 특히 설교 내용의 깊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목사님입니다.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노샘프턴교회를 23년 목회하다가 자식처럼 길렀던 교인들에게 배척받아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소한 이유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참 신앙이란 무엇이며, 참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하는 목사님과 교인들 사이에 신학적인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당시 다른 교회들처럼 분명한 회심 체험이나, 성도로서의 가시적인 삶의 열매가 없어도 단순히 기본적인 신앙고백만 동의하면 교회의 정회원이 될 수 있고, 그는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처음에는 교회의 관행을 묵인해 오다가 1748부터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가시적으로 분명한 회심한 증거를 보이는 사람만이 교회의 회원이 되어 성찬식을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회심체험, 삶의 열매가 없어도 신앙고백만 동의하면 교인이고,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성도의 생각, 아니다 신앙생활은 <분명한 회심체험이 있어야 하고, 가시적으로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의 생각 중 어느 쪽에 동의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가 교회 안에서 2, 3년간 논쟁으로 이어졌고, 교회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해임 건의안이 상정되었습니다.

투표 결과 해임 찬성 230표, 해임 반대 23표로 에드워즈 목사님의 해임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해임이 결정되고 10일 뒤인 1750년 7월 2일, 자신의 해임을 결정한 노샘프턴 교인들에게 고별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본문은 고린도후서 1장14절이었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후 1:14)

설교 주제는 “목사와 교인들은 심판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반드시 서로 만나야 한다.” 였습니다.

왜 목회자와 교인들은 심판 날 다시 만나게 될까요?

에드워즈 목사님은 3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목회자와 교인들은 세상에 있을 때 서로를 어떻게 대접했느냐를 그리스도 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나야 한다.

둘째, 자신들의 분쟁을 그리스도에게 재판받기 위해 만나야 한다.

셋째, 서로에게 한 행동에 대해 영원한 판결과 보상을 받기 위해 만나야 한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이러한 강조를 통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평가로 끝나지 않으며, 최종 결론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라는 사실을 주목하게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심심찮게 교회의 분쟁소식을 듣습니다. 멀리도 볼 필요 없이 우리 주변 교회에서도 들려옵니다. 대부분 그 분쟁은 대부분 목회자와 성도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에서 말씀하는 핵심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목사와 교인들의 사이가 분쟁하지 않고 아름다운 관계가 되도록 서로 간에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관계 샘플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5절 하반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저와 여러분도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이 그동안 겪어 오셨던 다른 목회자와의 관계도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예수님께 목사에게도, 성도들에게도 서로 서로 최선을 다해 섬긴다고 수고했다고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바울이 로마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또 하나를 생각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로마로 갈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영적으로는 바울의 말대로 풍랑을 만나고 파선하고, 멜리데 섬에서 뱀에게 물렸으나 죽지 않았고, 멜리데 섬의 1인자 보블리오의 부친의 열병을 고쳤기에 리더가 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초라한 죄수복을 입었을 것입니다. 손과 발에는 쇠고랑 찾기에 소리가 쩔렁 쩔렁 났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바울은 영락없는 죄수일 뿐입니다.

그가 로마로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 누가는 바울의 로마 입성을 재미있게 기록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누가는 바울이 타고 있는 알렉산드리아호 뱃머리 장식을 의도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배의 머리 장식이 <디오스구로>였다고 말입니다.

난하 주에 보면 <디오스구로> = <제우스 쌍둥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 시간 그리스로마 신화 제우스와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케스터 / 폴룩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화에 나오는 신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 로마에 바울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우스구로 장식을 한 배에 — 바울이 올라탔습니다.

신화에 나오는 신을 믿는 로마에 – 바울이 입성을 합니다.

분명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초라하게 입성하는데, 바울이 가는 곳마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의 동역 자들이 나와 바울을 환영합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저자 누가의 눈에는 바울의 로마의 입성은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와 같은 존재입니다.

바울이 간 도시마다 변화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 가면 아시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바울이 유럽에 가면 유럽이 뒤집혔습니다. 그 바울이 지금 어디에 들어옵니까? 바울이 당시 세계의 패권을 잡고 있었던 로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들어왔다는 것은 로마는 이미 복음 안에서 정복된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로마 입성을 개선장군의 입성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그 표현이 14절 하반절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을 이 말씀에서 정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갔다는 것은 로마가 복음 안에서 작살났나는 표현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시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들어간 것이 주후 61년으로 보는데 그로부터 252년이 지난 서기 313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믿을 자유를 선포합니다. 바울이 가진 복음이 결국 로마를 뒤엎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로마를 여행해 보면 로마 한복판에 베드로성당, 바울 성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이 그곳을 뒤엎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가진 자의 힘입니다.

오늘 사탄은 성도들을 연약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사탄은 교회를 연약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마치 나라가 부유하고 가정이 잘 살면서 아이들이 약해진 것처럼 말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품고 있는 복음이 놀라운 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영접한 나 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통해 – 가정의 복음화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 대구의 복음화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 세계 선교의 놀라운 지평이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 우리는 모습이 외형적으로는 바울처럼 초라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군사임을 믿으시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로마에 도착한 바울이 전도하는 내용을 살펴보십시다.

16절을 함께 보십시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죄수의 몸으로 끌려간 바울을 군인이 지켰습니다. 군인 한 사람이 24시간씩 바울을 지켰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대충보시면 안됩니다.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기에, 바울을 지키는 군인들은 <황제를 지키는 군인입니다.> 그 군인의 팔과 바울의 팔을 같이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둘은 <먹어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화장실에도 같이 갔어야 합니다.>

그러니 군인이 바울과 하루 종일 같이 있게 되면 어떻게 변할까요? 바울의 가슴 속에 있는 뜨거운 복음이 군인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하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면서 옥중서신인 빌립보서 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고백합니다.

 

또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사흘 후부터는 유대인중 높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불러서 복음을 전합니다. 다른 곳에서도 회당에서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한 것과 같지요. 그 내용이 17절에서 22절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23-24절만 같이 읽어보십시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바울의 일과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의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의 나라, 둘째는 예수에 대하여 입니다.

사실 둘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핵심이 예수님이니 하나이지요.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짬짬이 옥중서신을 써서 교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열심히 전도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기에,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하여 지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옥중생활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주어진 삶을 살면서 주일에만 잠깐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이 주님을 생각하는 삶,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르신 목적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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