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기다리는 제자들이 한 일 (행1:12-26)

by 정동교회 posted Jan 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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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d-Oo9RkJZL0
본문 사도행전 1:12-26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1-22

사도행전 1:12-26    성령을 기다리는 제자들이 한 일

 

예수님 제자들의 삶은 한 마디로 ‘충격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업을 팽개치고 제자가 된 충격을 시작으로, 예수님과 함께 한 3년 동안의 생활은 충격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충격이었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이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삶을 마감하며 십자가에 달리심이 충격이었고, 죽은지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심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이 열한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도 충격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열한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두 가지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부활하심을 명확하게 입증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했고, 예수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굉장히 당황하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알 것 같은데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사도행전을 강해하면서 부활이야기, 승천이야기, 성령이야기를 말씀드리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얼떨떨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분은 무슨 말씀인지 명확하게 알듯이, 지금 제자들도 얼떨떨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두고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아마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받은 많은 충격가운데 이보다 더 큰 충격은 없었을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3년의 시간이 지나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제 예수님이 그들 곁을 떠나셨기에, 그들이 더 이상 함께 모여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뿔뿔이 흩여져서 자신의 갈 길을 가면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했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남기신 말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성령이 너희들에게 임하면 권능 받을 것이다. /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 너희들이 할 일은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바라시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 행동을 저는 <성령을 기다리는 제자들이 한 일>이라고 정의해 보았습니다.

 

성령을 기다리는 제자들이 한 행동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12-13절 상반절을 보세요.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지금 제자들은 하늘로 올려 지시는 예수님을 본 이후,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시 걸음을 옮겨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면서 어디에 들렀다가 온 것이 아니라 곧 바로 왔습니다.

 

‘집에 갔다 오겠습니다’ ‘고향에 갔다가 오겠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사람이기에, 예수님이 사라졌으니 갈릴리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평소에 알고 있었던 마가의 다락방으로 들어왔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기에,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만 하셨지 <어디에서, 언제가지 기다리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기간은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우리야 오순절까지 열흘 동안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지,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이 쓰신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에 건망증이 심한 재상(宰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엔가 볼일이 있어서 먼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 녀석이 마차 타는 재미에 저도 가겠다며 따라나섰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한나절을 가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 마침 그 근처에 들를 곳이 있어서 아이 보고 “너 여기서 좀 기다리라. 금방 돌아오마!” 하고 볼일을 보러 갑니다. 그런데 재상은 그만 아들과 함께 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일을 마치자 혼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들을 찾습니다. “이 녀석 어디 갔어? 아버지가 돌아왔는데 인사도 안하고 ....” 부인이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아니, 아이는 어떻게 하고 혼자 오셔서 애를 찾아요?” 그제야 아이를 길에 세워놓고 볼일 보러 간 것이 생각났습니다.

재상은 아들을 찾으려고 밤새 다시 그곳으로 헐레벌떡 달려갑니다. 다음날 아침에야 그 자리에 도착합니다. 아이가 없으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 졸이며 가보니 어김없이 그 자리에 사랑하는 아들이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밤새 혼자 서 있는 아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얘야, 우리 집에 가자, 아버지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 집에서 쉬자”하고 권해도 아이는 “아니에요, 아버지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아버지를 기다린 것입니다.

마침내 아들을 찾은 재상은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아이의 행동에서 순종이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순종은 아버지가 서 있으라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순종입니다. 1년이고 10년이고 기다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순종에는 가감(加減)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하신 분의 뜻대로 100% 행동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오순절 나타났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싶다면, 우리도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기록된 말씀에, 선포되는 말씀에 순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순종이 있는 자에게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2.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3절-15절 상반절까지 읽어보십시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라는 말씀을 듣고,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으로 모였습니다. 물론 120명의 수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부활을 한꺼번에 가장 많은 수가 목격한 것은 500여 형제(고전 15:6)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지금 모인 수는 부활을 목격한 모든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20명은 당시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공회의 규칙에 의하면 어떤 공동체 설립을 위한 최소 단위가 120명이었다고 합니다. 의미가 있는 수이기도 합니다.

모인 120명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있었고, 예수님을 극진히 물질과 마음으로 섬기던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공간 안에 모였습니다. 성경은 그 표현을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14절)라고 합니다. 참 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사를 살펴보면 참 재미난 일들이 많습니다. 처음에 선교사들이 와서 교회를 시작할 때 예배당 가운데 커튼을 쳐서 한쪽은 여자석, 다른 한쪽은 남자석으로 나눴습니다. 영천 자천교회에 가보면 그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요, 한 공간을 아예 나무로 막아서 강대상에서만 남자석 여자석을 보게 하고, 남녀 회중은 서로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김제 금산교회는 아예 예배당이 ㄱ자로 되어있어서 남녀를 나눠놓았습니다.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남녀 칠세 부동석(男女 七歲 不同席)”이라는 유교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후에 같은 공간에도 남자석 여자석을 따로 두게 되는 것으로 발전되었고, 지금은 남여 구별 없이 함께 앉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처음 교회의 모습은 완전히 하나 되었습니다. 사도들과 성도들, 남자들과 여자들, 예수님의 가족과 보통 사람들이 하나 되었습니다. 그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서 같이 먹고 교제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도 중요한 일인데, 그들이 모여서 한 일은 더 중요하였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4절 하반절)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본 뒤에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우선 회의를 할 수 있었겠지요. 세미나를 하거나 논쟁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집단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도 보세요. 무슨 행사를 준비하면서 – 먼저 회의를 합니다. 회의를 하면서 의견이 맞지 않아 논쟁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때로는 교회 앞에, 당회 앞에, 담임목사 앞에서 불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슨 문제가 있을 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해야 할 일을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은 하나 된 모습으로 먼저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했습니다.

 

장로교 창시자 칼뱅은 마가다락방의 기도를 일컬어서

<대표적인 기도시간이었고, 아주 끈질긴 기도>라고 했습니다. 진짜 기도다운 기도는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혼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 보다 함께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합심기도에 대해 마태복음 18:19-20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열 명, 백 명, 천 명이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할 때 큰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여성사역자 중 한 사람인 미국의 ‘캐서린 쿨만Cathryn Kuhlman)'은 집회 때마다 엄청난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합심기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 다르고,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은 마치 불과 같습니다. 장작불을 피울 때에도 보면 나뭇가지를 하나 피울 때와 둘 피울 때가 다르지 않습니까? 장작을 많이 가져다 놓고 불을 피우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데에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환자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가 그들의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에도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이 하나 되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한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부부가 같이 기도하고, 친지가 같이 기도하고, 교사들이 같이 기도하고, 구역식구들이 같이 기도하고, 교회가 하나 되어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어떤 행사를 준비할 때, 회의하기 전에 먼저 합심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하되 잡생각을 하면서 기도하지 말고 <합심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3. 부족한 것을 채웠습니다.

120명의 무리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갑자기 베드로가 일어나서 발언하기 시작합니다. 그 발언에 대한 내용이 16절 이하에 나옵니다.

 

베드로의 발언 내용을 요약하면 <지금 12명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결원되었으니 보궐선거를 해서 부족한 것을 채우자>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네 곳에 열 두 제자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2-4, 마가복음 3:16-19, 누가복음 6:14-16,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서 나열되는 열두제자 이름을 보면 이름이 나열 된 순서는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은 베드로로 시작해 가룟 유다로 끝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다릅니다. 베드로부터 시작은 하지만, 한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열 두 제자의 이름이 기록될 때마다 꼬리가 되어 붙어 다니던 가룟 유다의 이름이 삭제되어 버린 것입니다.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천국에 가서도 만나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가룟 유다의 이름이 지워졌을까요? 그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회개할 기회가 수 없이 많이 있었는데도 회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맺고, 그 맨 줄이 끊어지면서 곤두박질해서 내장이 파열되는 끔직한 죽음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제자의 이름에서, 영원한 생명책의 이름에서 지워진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이름이 올라가 있다가 나중에 없어지는 우리가 아니라, 여러분과, 여러분의 남편, 자식들의 명단이 끝까지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제자들은, 주님의 제자로서 함께 선택된 가룟 유다를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입에도 올리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결원된 한 명의 제자를 보궐선거를 통해서 완전한 제자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제안을 베드로사도가 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룟 유다에 대해서 그간 사정을 모두 말하고, 이 모든 것이 성경의 기록대로 되었음을 밝힌 연후에 결원된 한 명의 자격을 말합니다.

 

사도의 자격을 21-2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의 자격은 신학적으로 세 가지입니다. ① 예수님께서 지명하여 세운 자 / ② 예수님의 공생애에 동참한 자 / ③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

 

바울 사도가 늘 콤플렉스처럼 가진 것이 사도권이었습니다. 당시 개척하는 교회마다 반대세력이 “당신은 사도가 아니지 않느냐?” 물었을 때 바울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주님이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지만, <주님의 공생에 활동을 할 때는 제자로 동참하지 못했기에>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늘 편지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롬 1:1) 하면서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여간 이런 자격에 근거해서 두 명을 추천받았는데 한 사람은 <요셉> 한 사람은 <맛디아>였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 후에, 제비 뽑았습니다. 그 방법은 추천 받은 두 사람의 이름을 각기 조약돌에 써 넣고, 이름을 쓴 조약돌 두 개를 둥그런 그릇에 담은 뒤에 그 그릇을 한 참 흔듭니다. 그러다가 하나가 툭 튀어나온 조약돌에 쓰인 사람이 뽑혔는데, 그 사람이 바로 <맛디아>였습니다. 그가 12사도에 포함된 것입니다.

 

자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십시다. / 하늘로 올려져 가신는 예수님을 본 120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먼저 하지 않고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부족한 제자를 기도하고 제비뽑아 보충했습니다. 그러자 다음 생각할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도 은혜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성령 충만하기 원하지 않습니까? 원하신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조금 멍청하게 보여도 100%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모이면 회의하고 논쟁하기보다 모여서 합심해서 성령받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다보면 자신의 부족함을 성령님이 가르쳐주실 때 그 부족함을 보충하십시오. 그때 우리도 오순절에 나타난 황홀하고 아름다운 능력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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