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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VyczjFw8Veg
본문 바른 설교, 바른 응답(행 2:37-41)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2-19

 

 

사도행전 2:37-41 바른 설교, 바른 응답

 

성령 받은 베드로가 처음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처음 한 설교였지만 그 어떤 설교자도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설교를 했습니다. 모범적인 설교였고, 표본적인 설교였고, 성공한 설교였습니다. 쉬운 말로 잘 한 설교였고, 바로 된 설교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 속에서 선포한 설교였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두 가지 주제로 설교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성령강림의 역사를 의심하고, 술에 취해서 그렇다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 하여, 그렇지 않다 <지금 이 현상은 요엘서 2장에 나오는 약속의 성취사 건이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성령강림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했습니 다. 예수님의 삶, 십자가에 죽으심,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언급하고 예수 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부하나님께서 받아 예수님이 이 땅에 보내주신 영이 바로 성령하나님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는 36절 말씀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1. 설교에 대한 반응

베드로가 이상과 같은 설교를 하자, 군중들이 반응을 했습니다. 그 내용이 37절에 나옵니다. 3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 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첫 반응은 “마음에 찔려”입니다.

둘째는 “어찌할꼬” 입니다. 중요한 두 가지 반응입니다. 하나씩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1) “마음에 찔려”

여기서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는 뜻은 <칼로 베임을 당한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아마 성도님이 살아가면서 예리한 면도칼로 종이를 잘라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판판한 책상 위에 종이를 놓고 면도칼로 자르면 칼날이 예리해서 종이가 잘렸는지 안 잘렸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나 조금 흩트려 보면 종이는 너무나 분명하게 잘려 있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말씀이 임하면 나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는 쪼개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정확히 말씀한 히브리서 4:12-13 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에 의하면 그것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했습니다. 연극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배역을 보여주듯이, 모든 사람들은 가면을 쓴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면이 있을 것이고,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면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가면 속에 본 모습을 보지 못하지만, 성령하나님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속에 파고 들어가서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님이 들어가면 그의 본 모습이 완전 해부되어 그의 실체가 들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그들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었지만, 베드로의 입으로 선포되는 말씀의 날카로운 칼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자르기 시작하자 마음이 예리한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쪼개지고 찢겨졌다는 말입니다. 왜 그들의 마음이 찔렸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 성령을 모독하고 슬프게 하고 거슬렀던 것 때문에 마음이 찔린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왜 설교를 했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보고 의심하고, 조롱하는 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설교를 들은 그들이 자신들이 <성령을 모독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찔린 것입니다.>

 

②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성령강림사건은 오순절에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에 돌아가신 지 불과 50일 밖에 안 된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목도한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생각하면서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누가 죽였냐? 그러면 그들이 답하겠지요.

- 대제사장 가야바다. 가야바가 예수님 죽일 때 우두머리였다.

- 총독 빌라도가 죽였다. 그가 십자가형을 언도했고, 내어주었다.

- 직접 못 박은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 죽였다.

- 은 30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죽인 것이다.

-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군중들이 죽인 것이다.

 

이렇게는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자신들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설교를 하면서 그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강력한 말씀으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36절 다시 보세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은 <바로 너희다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베드로가 설교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했을 것 같습니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지요. “베드로 선생, 말조심하시오. 내가 언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소?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시오.”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과, 베드로에게 임한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의 반응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가야바 때문도 아니요, 빌라도 때문도 아니요, 로마 군인 때문도 아니요, 가룟 유다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라야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해서이고,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임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어찌할꼬”

오늘날 교회의 비극은 이 “어찌할꼬”가 없는 데 있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이 쓰신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목양실에 있는데 누가 목양실 문을 두드리더랍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주었더니 대뜸 할 말이 있다고 하시면서 목양실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른 기도회를 인도해야 했기에, 지금 기도회를 인도하려고 나가야하니 지금은 대화할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정색을 하고 대들더라는 것입니다.

체면도 예절도 없이 “내가 잘못한 것을 누가 목사님에게 고자질했습니까? 오늘 새벽에 하신 말씀은 분명히 저를 두고 한 것 같은데 도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고 욕설을 썩어가면서 대들더랍니다.

그 말씀을 들은 목사님이 그 성도에게 “나는 성도님 이름도 모르고,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릅니다. 성도님을 고자질한 사람도 없고, 누가 고자질 했다고 해도 그것을 두고 나는 설교하지 않습니다.”라고 화를 내면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리면 자신을 돌아보면서 “어찌할꼬?”하면서 회개할 방법을 찾아야지, 목사님을 찾아와서 그런 행패를 부리는 성도가 진정한 성도입니까? 얼마나 교만한 태도입니까?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이런 교만한 마음이 없으십니까?

내가 돈이 조금 있다고, 건강이 있다고, 배경이 좀 좋다고, 직분이 있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찌르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할꼬” 하는데 인색하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어찌할꼬”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5) 라고 했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할렐루야” 하며 찬양한 것이 아니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라기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매 주일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난도질을 당해서 여러분의 원래 모습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실상을 깨닫고 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하며 진심으로 고백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2. 베드로의 해결책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 “어찌할꼬” 하는 그들에게 베드로사도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3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베드로는 3가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1)“회개하라”

회개는 기독교 최대의 메시지입니다.

세례요한이 선포한 첫 메시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예수님이 선포한 첫 메시지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그만큼 회개는 중요합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 즉 “방향 전환”을 말합니다. 엉엉 울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길로 가던 자가, 사단이 원하는 길로 가던 자가 <방향을 180도 바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2)“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라.”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기에서 “각각”이란 말도 중요합니다. 구원은 개별적이라는 것입니다. 부인의 치맛자락 잡고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정도 설명하고

<세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제가 세례문답을 할 때 세례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렇게 교육합니다.

“세례는 나는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예식이다.”

우리교단에는 세례를 베풀 때 목사가 머리에 물을 뿌리는 방법으로 세례식을 합니다. 그러나 침례교회나 다른 교단에서는 온 몸을 완전히 물속에 잠갔다가 나오는 방법으로 세례식을 합니다. 물에 완전히 잠그는 의미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나란 사람은 죽는 것입니다. 내 고집, 내 자아는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세례인 것입니다.

 

“세례는 영적인 결혼식과 같다”

남여가 사랑하면 동거할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동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떳떳하게 결혼식을 하면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부로 인정해 주듯이 우리가 교우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으면 떳떳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학에서는 세례를 “이미 예속되었던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에 예속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란 그리스도라는 큰 공동체에 예속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예수당의 당원이 된다는 뜻이 세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야당, 여당과 같은 당원이 아니라> 세례 받았기에 <예수당의 당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회개하고, 세례 받으면“죄 사함”받고 “성령의 선물을”받는다.

죄 사함 받는다는 말은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기에 넘어가고,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의미는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으리라> 혹은 <성령의 선물들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은사들이 여러분과 우리교회에 충만히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39-40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베드로는 첫 설교 이후에도 계속해서 역사적 증거를 들어서 확증하고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의 가르침을 끝이 아니라 가르침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정도로 보시고 이제 마지막절로 가 보십시다. 마지막 절에는 <설교의 열매>가 나옵니다.

 

3. 설교의 열매

41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여러분! 사도행전을 매주일 마다 흥분되지 않습니까? 저는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흥분하게 됩니다.

2장에서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나고 베드로가 설교하자 하루에 3천명이 세례를 받습니다.

3장에는 40평생 한 번도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4장에는 하루에 5천명이나 믿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앞으로 이 말씀으로 설교할 것만 생각해도 저는 흥분이 됩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에도 이런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개개인에게도 이런 흥분과 기대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41절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보십시다.

 

(1) 3,000명이라는 숫자 – 본문만 보아서는 남자만 헤아린 것인지, 여자도 함께 헤아린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사도행전 4:4에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는 말씀과 비교해 보면, 남자를 중심으로 통계를 낸 통계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자를 포함했다면 더 많은 수가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2) 변화 받고 세례 받은 3,000명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앞에서 생각한 대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슴을 치고 회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3) 성령의 대역사가 일어난 자리에 회개한 3,000명만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의 수가 총 몇 명이었는가? 기록하지 않고 <오직 회개한 3,000명만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통계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우리가 지금 다 한자리에 모여서 예배합니다. 교역자들은 여러분이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리든 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열정적으로 예배하는 자들도, 때론 설교를 들으면서 조는 사람들도, 예배의 자리로 나왔지만 지겨워서 몸을 비트는 사람도 예배에 참석한 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고 통해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들을 때에 눈물어린 심령으로 하나님을 바로 보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예배한 자로 인정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매시간 예배할 때, 본문에서 계수한 3,000명의 인원에 우리 모두가 포함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의 바른 설교를 듣고, 바른 응답을 했던 그들처럼 저는 바른 설교를 하고, 여러분은 바른 응답을 해서 사도행적의 기적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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