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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MnyOBXUxCoI
본문 마태복음 21장 1-11절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4-09

날마다 호산나를 외쳐라 (마21:1-11)

마태복음 21:1-11 날마다 호산나를 외쳐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날,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 유하면서 아주 놀라운 사건 하나를 경험하시게 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여자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사건을 목격한 가룟 유다는 그 여인을 나무랐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 그 돈이 있으면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 그럴싸한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를 가만두어라, 그 여자는 내 장례식을 내다보고 예를 표한 것이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엄청난 예배였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앞 둔 사람을 위해서 임종예배를 가서 드리듯이,

마리아의 향유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행한 <죽음의 예배, 십자가의 예배>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귀한 예배를 받으시고 다음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성 후에 있을 일도 이미 아셨습니다.

마태복음 20:18-19 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아시면서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먼저 한 후에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1-3절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스스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임금의 경우에 이동하게 되면 사전에 하급자들이 철저하게 준비를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박근혜전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사저로 옮길 때에, 사저에서 재판을 받으려 갈 때에도, 철저하게 동선을 생각해 교통을 통제를 하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갔습니다.

 

하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라 / 나귀를 끌고 와라 / 주인이 뭐라고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면서 예수님 스스로 입성을 준비하셨습니다.

 

2. 이것을 통해서 주님의 겸손하신 성품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왕은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행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아이들 소꿉장난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영적인 진리가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미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어린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마태복음에 없는 사실을 하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는 나귀>라고 강조합니다.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순수하고 순결한 새끼나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겸손입니다.

겸손은, 능력이 있는 자가 ▸ 없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아는 자가 ▸ 모르는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겸손은, 할 수 있으나 ▸ 할 수 없는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못 하실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 11:29) 하신 대로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겸손하셨습니다.

언제까지요? 탄생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면 믿겠노라. 장님의 눈을 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능력을 행하던 사람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믿겠노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아마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품을 가지셨다면, 십자가에서 덜렁 뛰어 내려서 “봐라 이놈들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비난하고, 놀려도 .... 침묵하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셨던 겸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남들이 나를 조금만 낮게 평가하고 대우하면 섭섭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사랑이 없다느니, 내가 할 일 없다느니>하며 섭섭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의 표정이 상상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얼굴 표정에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냐’는 섭섭한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우리도 겸손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입성에 쓰임 받는 자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동네 맞은편에 가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물건을 어떻게 함부로 가져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 갈등 없이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혹시 누군가 왜 가져가느냐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사용하면 비극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오용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내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는 상식적인 사람들은 갈등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잘못 행동하는 일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나귀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나귀 주인은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걸 아시고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미안해하거나 갈등하시는 표현이 전혀 없이 당연한 듯한 태도를 취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나귀를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나귀를 쓰시겠다고 한 이 사건은 단순하고 우연 발생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약 스가랴 9:9에 예언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4-5절 “이는 선지자로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입성이 예언된 사건이라면 나귀를 내어드린 사람 역시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놓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건강이든, 재능이든, 물질이든 주님이 쓰시고자 할 때 기쁨으로 <그래요 여기 있어요. 주님이 다 쓰세요.>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드디어 제자들이 새끼나귀를 어미 나귀와 같이 데려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6-9절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4. 진실한 봉사와 헌신의 삶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이 나귀는 가져왔는데 예수님이 나귀에 타려하니 안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깔아 안장을 만든 후 예수님을 타시도록 했습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본 무리들도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아드렸습니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한 번 보실까요?(그림 참고)

제가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갔을 때, 수사들이 그린 그림을 사 온 것입니다. 주님의 입성 장면을 상상하면서 그린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봉사와 헌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봉사와 헌신은 제자들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위에 얹어 주님을 타시도록 한 것처럼, 나에게 있는 것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 봉사와 헌신은 나보다 잘 하는 사람들을 보고 따라 하는 것입니다.

 

5. 감격과 찬양이 있는 삶

이 장면에서 또 생각할 것은 무리들이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 하더라.” 하는 내용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앞에서 가고, 뒤를 따라가면서 찬송하고 춤을 추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마치 다윗이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기뻐 춤을 추는데 바지가 흘려 내리는 것도 몰랐던 것처럼 지금 무리들이 그런 감격으로 춤추며 소리 높여 찬양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열렬하게 환영하는 내면에는 예수님의 사역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점도 있었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예수를 믿는 자라면 <주님 때문에 춤추고,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점잖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장로교인 이니 기도할 때도 조용히, 찬송할 때도 조용히 그저 적당히 박수만 치고, 설교를 들을 때도 표현하지 않는 등 점잖게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임하여 가슴이 뜨거워질 때, 우리는 마음껏 온몸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소리 내어 기도하고, 설교시간에도 담대히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제목처럼 “날마다 호산나 외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6. 소동하는 예루살렘, 소동하는 정동교회

그럼 마지막 10-11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성이 소동했다고 합니다.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이 누구냐? 누군데 이런 소동이 일어나느냐?” 라고 물었을 때 무리가 말하기를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이십니다.>라고 답변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성이 요동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요동쳐야 합니다.

예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소리로 요동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면서 요동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기쁨이 넘쳐서 요동쳐야 합니다. 그래서 정동교회가 요즈음 왜 이렇게 시끄럽냐? 했을 때 <예수님 때문에> 그렇다고 자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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