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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zs8isbSU9zo
본문 사도행전 6장 8-15절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6-25

사도행전 6:8-15 스데반, 닮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안에 네 가지 중요한 직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은 사복음서에 예수님의 제자로 불립니다. 예수님이 직접 선택하신 12명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처음에 열두 명으로 출발했지만 후에 유다가 빠지게 되고, 그 자리에 맛디아가 들어옴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를 중심한 사도들은 <말씀사역과 기도사역에 전무했습니다.>

 

둘째는, 평신도지도자입니다. 사도들로 감당하기 힘든 구제와 재정, 그리고 행정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일컬어 일곱 집사라고 하지만, 바른 이해는 안수 받은 평신도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의 장로와 안수집사 그룹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셋째는, 일반성도입니다. 사도행전에는 그들을 제자라고 합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 열심히 모여 예배하고, 사도들에게 말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입니다. 아마 이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 했으니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도들은 얼마나 힘이 났을까요?

 

넷째는, 특별한 사도, 선교사 - 바울이 있습니다.

열두 사도 외에 유일하게 사도라고 불리는 특별한 자가 <바울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열매로 탄생된 바울로 복음은 지금의 터기, 그리스를 지나 로마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지금도 교회마다 이 네 그룹이 헌신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목사는 – 말씀사역과 기도사역에 전부합니다.

일반성도는 –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열심히 모이고 성경을 배우는데 힘쓰고,

안수 받은 장로, 집사들은 – 자신의 직분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합니다.

교회의 후원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는 - 전 세계로 나가 복음사역에 힘쓴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 교회로 통해 지금도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안수 받은 일곱 명의 평신도지도자 중에 첫 번째로 소개된 스데반에 대해서 집중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8절과, 10절을 보십시다.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의 이름의 뜻은 “면류관”입니다. 그의 부모가 이름을 지었겠지만 기가 막히게 지었지요, 최초로 순교의 면류관을 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엄청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은 사람이라는 면에서, <면류관>이란 이름의 뜻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스데반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데반 개인의 이력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가문의 배경도, 학문적 배경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에 소개 된 내용을 통해서 스데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6장 앞부분부터 나온 내용을 포함하여 찾아보면 스데반은

3절 “성령과 지혜가 충만”

5절 “믿음과 성령이 충만”

8절(오늘 본문) “은혜와 권능이 충만”

10절 “지혜와 성령으로”

보세요, 이 말씀에서 소개된 것을 나열하면 스데반은 <성령, 지혜, 믿음, 은혜,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안수 받은 장로, 안수집사 한 분 한 분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교회를 포함하여 한국교회 전반을 살펴보십시오. 안수 받은 이들의 모습에서 스데반에게 있는 이런 모습이 충만한지 말입니다.

우리교회 장로님, 안수집사님은 <성령충만, 지혜충만, 믿음충만, 은혜충만, 권능충만>한가? 아니면 <불평충만, 불만충만, 원망충만, 비판충만 등 주님이 바라시지 않은 것들로 충만하지는 않습니까?>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이 가지고 있었던 <성령, 지혜, 믿음, 은혜, 권능> 충만이 나에게 있는가? 없으시다면 이것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이 가진 이 모든 것의 기초에는 성령 충만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사람이든, 사역이든 항상 성령 충만 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성령 충만하니 – 지혜, 믿음, 은혜, 권능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 예수님의 영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가득해서 밖으로 넘친다는 말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혔다는 말입니다.

성령에 절대복종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이 크게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가뭄이 심할 때, 큰 양동이에 물이 철철 넘쳐보십시오. 농부를 포함해서 그 물을 서로 사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하나님은 놀랍게 사용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처음에는 구제하는 사역을 위해서 부름 받았지만, 구제사역에만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재정 관리도 하고, 행정도 맡아서 했습니다. 그는 기적도 행했습니다.

8절 하반절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는 말씀대로 귀신 들린 자, 병 든 자를 고치는 사역도 했습니다.

 

그분만 아닙니다. 스데반은 말씀도 가르쳤습니다. 9절을 보십시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이 말씀에서 집중해서 보셔야 두 단어는 <회당> <논쟁>이란 단어입니다.

 

<말씀사역>은 원래 – 사도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지난주일 생각한 대로 사도들이 구제문제로 정신이 없이 일하다가 헬라파 유대인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은 것을 계기로 본질적인 사역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사도들의 주 사역은 <기도사역과 말씀사역>입니다. 제가 지난주일 이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한국교회가 부흥하려고 하면 모든 목사들이 <말씀사역과 기도사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들이 말씀사역, 기도사역은 하지 않고, 정치한답시고, 노회와 총회에 기웃거리면서 본질적인 사역을 놓쳐버리면 그 목사님이 계시는 교회는 부흥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말씀사역과 기도사역>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사역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성도들도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사도들의 말씀 사역의 주 무대는 성전이었습니다. 교인이 2, 3만 명 이상으로 확장되는데 소그룹에서 성경말씀을 일일이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제가 하루에 3-4구역씩 돌아가면서 23개 구역식구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입니다.

구역은 구역장으로 임명받은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님들이 열심이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역을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 집중해서 보실 첫 단어를 <회당>이라고 지적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회당은 ‘한 장소에서 서로 서로 함께 모인다.’는 뜻입니다. 성인 12명만 있으면 세울 수 있습니다. 회당이 종교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스데반이 말씀을 가르친 장소가 바로 이 <회당>이였습니다.

<말씀사역>이 본업인 사도들은 – 성전에서

<구제사역>이 본업인 스데반은 –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9절에는 스데반이 말씀을 가르친 회당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

여기서 잘 보셔야 할 것은 <자유민>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자유민이지요. 하지만 로마가 세계를 통치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통치를 받는 나라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로마시민, 둘째는 종, 셋째는 자유민이 있었습니다. 비율은 각기 3분의 1정도가 되었습니다. 자유민이란 로마로 인해 종이 되었다가 어떤 계기로 자유를 얻게 된 자를 말합니다.

본문에 말하는 자유민을 역사적으로 보면, 주전 53년 폼페이우스가 유대를 토벌한 이후 로마의 노예로 끌려갔다가 자유민이 된 후손이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었다고 보여 집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구레네인(시실리아) / 알렉산드리아인(이집트) / 길리기아(터키) /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소아시아)> 등 이스라엘 사방에서 살던 사람들이 자유를 회복하고 이제는 예루살렘에 와 정착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끼리 모여 회당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후에 나오는 바울은 본문의 <길리기아(터키)>에 소속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서울에 각 지방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서울에는 전라도사람, 경상도사람, 충청도사람, 전쟁 통에 내려온 함경도 사람, 평안도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있었고, 심지어는 교회에도 지역성향을 띠어, 우리교회는 경상도사람이 주축이 되고, 우리교회는 전라도 사람이 주축이 되어 교회를 꾸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와 비슷합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지방색이 있는 회당에서 들어가 <논쟁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9절 하반절 “…더불어 논쟁할새” 논쟁하는 방식으로 설교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행한 그리스 아덴에서 설교가 논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논쟁하는 방식으로 설교한 이유는? 헬라문화가 논쟁하는 방식으로 학문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정치는 – 로마가 지배했지만, 문화나 학문은 – 헬라문화가> 세계를 지배했기에, 그 논쟁문화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회당 안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문제는 <논쟁>은 항상 논쟁의 승자와 패자로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도행전 7장을 통해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보겠습니다만, 스데반은 지성적인 사람이었고, 성령 충만하였기에 회당에 있는 자유민과 논쟁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논쟁의 결과는 – 스데반집사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10절을 보세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문제는 논쟁한 다음입니다. 논쟁에서 패하면 패한 사람이 ‘우리가 졌다. 그래 네가 전하는 예수님이 구원자가 맞구나!, 우리가 잘못했으니 회개하고 예수 믿을게’라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어디 사람이 그렇습니까? 자신이 졌다고 생각하면 이긴 사람을 향하여 이를 갈면서 복수하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논쟁해서 지게 된 회당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 앞에 고발합니다. 11-14절을 보십시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회당 사람들은 사람을 매수해서 두 가지 건수 걸어서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했습니다. 하나는 성전문제요, 또 하나는 율법문제였습니다.

 

성전문제는 – 예수님이 “이곳을 헐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한 적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를 왜곡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말씀하셨지만, 그 성전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르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려고 온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 부활해서 너희들에게 <부활생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자들은 성전을 헐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헐라고 예수도 가르쳤고, 지금 스데반도 가르치고 있다고 거짓 증인을 세워서 말한 것입니다.

 

또, 율법문제는 – 14절에 있는 대로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고 이야기 했다면서 율법에 대한 문제로 고소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고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서

마태복음 5:17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고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당의 사람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자신들이 논쟁에서 폐하게 되자, 율법을 고치라고 한다면서 스데반을 고발하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고발당한 스데반의 입장으로 내려가 생각해 보십시오.

평신도 지도자로 안수 받고 나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구제부, 재정부, 행정 전반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로 통해서 기적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회당마다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에게 돌아온 결과는 <공회 앞에 잡혀 온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때 어떤 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때 나타난 스데반의 표정에서 스데반의 위대성을 다시 한 번 발견합니다.

15절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여러분, 옆에 있는 성도의 얼굴을 한 번 보십시오.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까?

저는 제일 부러운 사람이 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는 목사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를 하면서도 싱글벙글 웃는 목사님도 계시는데 그런 분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또 어떻게 하면 저렇게 은혜로운 얼굴이 될까? 궁금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모든 상태가 얼굴에 나타납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예배에 온 사람들 – 얼굴에 싸운 표시가 납니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 – 얼굴에 불편한 표시가 납니다.

집에 좋은 일이 있는 사람들은 – 당연히 얼굴이 싱글벙글하면서 표시가 나겠지요. 이것이 보통 사람의 얼굴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명언 가운데 “사람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십이 넘어 갖게 된 얼굴은 40년 동안 축적된 삶이 나타나는 것이기에 그 얼굴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 성도를 다시 보세요. 온화하게 보이십니까?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성령 충만이 느껴지십니까? 스스로의 얼굴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본문에 스데반은 예수님을 죽이고, 사도들을 박해하였고, 그리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산헤드린공회 앞에 있었는데도, 그 적대세력의 눈에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고 하용조 목사님이 쓰신 책에 보니

스데반 집사가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스데반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스데반의 경우 몸은 세상에 살았지만 마음과 영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에 천사의 얼굴이 가능했다.

구약의 모세의 경우에도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사십 주야를 시내 산에 머물렀다가 산 아래 내려오니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백성들이 쳐다보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둘째, 스데반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스데반은 자신을 재판하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얼굴은 평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스데반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 중에 만난 한 집사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 집사님이 저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곁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00(누구, 누구)집사님 같은 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안수 받은 자들 중에 이런 좋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안수 받고 교회를 힘들게 하고, 목회자를 힘들게 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걱정됩니다. 멀지 않아 주님 앞에 서야 하는데 그 때 주님께 뭐라고 대답할 것인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성도여러분, 안수 받은 평신도 지도자여러분

오늘 본문에 소개된 스데반은 우리가 닮아야 할 인물입니다.

성령 충만해서 주어진 일은 물론이요, 복음전하는 일까지 닮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저와 여러분의 얼굴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들과 동일한 찌들고 힘든 얼굴이 아니라 스데반의 얼굴처럼 <천사의 얼굴>로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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