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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aldSSAR1WPg
본문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 31)
설교자 권오진목사
설교일 2017-08-06

고린도전서 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정치인들이 당대표가 되거나 대통령후보가 되면 가장먼저 국립묘지를 방문합니다. 왜 국립묘지를 갈까요? 거기에는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다가 죽은 분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음을 생각하며, 나도 이분들처럼 국가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결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새로운 다짐을 하려면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금년 4월,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이 쓰신 책 하나가 나왔습니다.

【에클레시아 :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란 책입니다.

이 책 <프롤로그> 부분을 조금 읽어드리겠습니다.

『최근에 나온 신문기사 하나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종교인구 표본 집계’를 다룬 기사였는데, 머리기사가 이랬다.

“대한민국 ‘제1의 종교’ 된 개신교 … 10년간 120만 명 이상 증가.”

이해가 안됐다. 내가 만나는 목사님들 대부분이 교회 출석 성도가 줄어들고 있다고 고민하고 있는데, 그리고 장로교를 비롯하여 각 교단의 자체 조사에서도 신자 숫자가 뚜렷하게 줄고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해 전문가들이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는데, 그중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스스로 개신교 신자라 생각하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성도, 이른바 ‘가나안 성도’들이 통계치에 반영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그것이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간혹 교회 바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듣는 말이 떠올랐다.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아요.”

참 가슴 아픈 말 아닌가? 왜 종교는 기독교라고 하면서 교회는 나가지 않는 걸까? 이 질문에도 여러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근본적으로 ‘교회에 대한 오해나 잘못된 지식’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은 이런 이유 때문에 출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첫 단락에 사랑, 교회의 본질 / 이란 제목으로 목사님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목사님이 미국에서 3개 교회를 섬겼는데 3개 교회 모두가 너무나 좋은 교회였는데 한국으로 귀국 후 들린 소식은 3개 교회 모두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사랑의 기둥>과 <영성의 기둥>으로 든든히 서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다시 생각해보십시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새로운 신앙적인 결단을 하려면 어디로 가야하겠습니까?

목사를 포함한 평신도지도자, 성도들은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답은, 신앙의 뿌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신앙의 뿌리는 <골고다 언덕 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 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십니다.(히12:2)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까? 무슨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죄와 허물과 죽음과 슬픔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의 출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주님의 죽으심>에서 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오늘 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오늘 기독교인중에 저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맞는지 의심되는 성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고 하는데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따라갔던 제자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후반부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주님 덕 좀 보자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열 제자는 어떤 반응을 했는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이용해서 덕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언제 변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고 변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격하고 변합니다. 결정적으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임재 함으로 완전히 변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목회자와 평신도지도자, 성도가 새로워지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다시 <주님의 달리신 십자가> <나를 위해서 처절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하시고, 피와 물을 다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서 “예수님! 당신이 달리신 십자가로 인해 내가 오늘 여기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회복의 1단계, 신앙회복의 1단계는 – 십자가로 나를 가져가고 그 은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회복한 사람들은 다음 단계로 가서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23-2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자는, 자신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헬라어 성경 그대로 직역하면

“나는 매일 죽음의 위험 가운데 있노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30절(한절 앞)의 “… 언제나 위험을 무릎쓰리요”라는 말을 더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나는 주님을 만나 엄청난 위험을 무릎 쓰고 있고, 심지어는 매일 죽는

심정으로 사역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이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는 것은 고린도후서 11:23-27에 잘 말씀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렇게 바울의 삶은 매일 엄청난 위험을 무릎 쓰면서 죽는 심정으로 사역했습니다.

 

둘째, 만약 나에게 죽음의 위험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을 강해하면서 앞으로 생각하겠지만,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 때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당하고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1:13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으니, 나도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위험이 있다면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생활하다가 결국은 목이 베여 참수를 당해 순교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이후, 그의 삶도 예수님을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위해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게까지 힘들어지고, 성도들의 신앙관이 이상해진 것은 목회자의 잘못이 큽니다. 어려서부터 우리가 배운 신앙관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떡 부스러기에만 집중하게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 건강해진다. / 예수 믿으면 – 자녀가 잘 된다 / 예수 믿으면 – 부자 된다. 예수 믿으면 – 무조건 천국에 간다.> 하는 소리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무의식에는 예수님을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각합니다. 예수 이름을 사용하면 <금이 나오고, 은이 나오고 보화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믿음생활을 바르게 하는 자에게는 이런 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결과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찬찬히 보십시오.

하나님을 제대로 믿었던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자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을 어떠했습니까?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도바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의 삶은 <날마다 죽는 삶이었고, 실제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순교로 마친 삶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의 길입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진행되는 <정동한마당축제>의 주제는 “다시 거룩한 순교신앙”으로 입니다. 참 믿음의 삶을 살다가, 순교한 자들을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고 싶어서 그렇게 정해 보았습니다.

내일은 주기철목사님, 손양원목사님의 순교기념관을 답사하려고 합니다. 순교기념관을 답사할 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기념관 안에서 만큼은 <침묵>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침묵은 최고의 영성수련방법입니다. 침묵하면서 그분들의 신앙을 통해 여러분 개개인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준비를 하면서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후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순교한 분이 몇 분이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용인에 있는 <한국 기독교순교자 기념관>과 <한국교회 순교자 기념 사업회>에는 전화를 해서 직접 물어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에 순교자가 몇 명쯤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순교자는 몇 명쯤 됩니까?

 

제 손에는 <한국교회 순교자 명단>이 있습니다.

A4용지 23장에 순교자의 이름과 순교당한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통계를 낼 수 없지만,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 한국교회에는 주기철, 손양원목사님을 포함하여 2,600명의 순교자가 있다고 합니다.

 

신학자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씀처럼 2,600여명의 순교자의 피가 한국 땅과 한국교회에 뿌려졌기에 오늘 우리가 있고, 한국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가 저와 여러분이고, 우리교회와 한국교회라면 <사랑의 기둥으로, 영성의 기둥으로> 든든히 서 가야 할 것 아닙니까? 교회마다 사랑으로 충만하고, 영성이 깊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성도들의 신앙은 갈수록 이기적이 되어가고 있고, 영성은 날이 갈수록 얕아지고 있습니다. 싸우는 교회들은 심심찮게 들립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제가 아는 부목사님이 장문의 문자로 상담을 해 왔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1층에는 담임목사측이 예배하고, 2층에서 장로 측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부목사인 자신은 담임목사 측에 가서 예배해야하는지, 아니면 사례를 지금 주고 있는 장로 측에 가서 예배하는 것이 맞는지 물어왔습니다. 기막힌 사연 아닙니까?

 

오늘 한국교회와, 목회자와 평신도지도자가 새로워지려면 신앙의 기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이 걸었던 신앙의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지금은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때처럼 피를 흘리는 순교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있습니다.

 

순교를 나눌 때 적색순교, 백색순교 두 종류로 나눕니다.

적색순교(赤色殉敎) - 예수님을 위해 형장에서 피를 흘리면서 순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백색순교(白色殉敎) - 예수님을 위해 피를 흘리며 순교한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의 삶에서 순교의 각오로 살아가는 그 결단을 백색 순교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백색순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고 하면 예수님을 영접하였지만 내 몸에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것들을 죽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죽여야 할 것 : <혈기 / 욕심 / 교만 / 정욕>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까지 <혈기가 남아있고, 욕심이 넘치고, 교만하고, 세상적인 정욕이 있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 때문에 교회는 힘들어집니다. 이 사람 때문에 성도들는 상처받게 되고, 교회는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기, 욕심, 교만, 정욕>을 죽여야 합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으로 성도들을 감싸줘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둥>과 <영성의 기둥>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이 사랑의 삶을 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 안에서 내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바보가 되어주셨듯이, 나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백색순교의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저도 살아가고, 여러분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본문에서 하나만 더 생각하십시다.

사도바울을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며 결단하고 순교의 삶을 살도록 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한국교회에 2,600여명의 순교자가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본 나가사키에 26명의 순교자를 포함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일본에서 나올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백색 순교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원동력은 <부활신앙>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점은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신앙의 결승점은 어디일까요? -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시작되지만, 예수님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 놓 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도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순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는 대 전제 속에는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 전체가 답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렇게 명백한데 무엇을 걱정하느냐? 나도 예수님 때문에 죽는다고 해도 주님처럼 나도 부활할 것이기에 날마다 죽는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이 분명한 자는 <순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활신앙>이 분명하지 못한 자는 <바울처럼,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나는 순교할 수 없어요!>하면서 벌벌 떱니다.

부활신앙이 분명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과 내일 우리는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십자가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어보십시다. 그리고 십자가로 인해 구원받은 자답게 믿는 것이 힘들어도 세상이 우리를 조롱해도 백색순교자의 삶을 살아보려고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것이고, 부활의 주님께서 천국에서 우리를 기쁨으로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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