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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qnDL22ynLhM
본문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행 10:23-48)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9-24

     사도행전 10:23-48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신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님으로 설명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 빙산의 일부만 알 뿐이고 설명할 뿐입니다. 어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다 알고 입술로 설명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도 신비롭고, 사람을 부르시는 것도 신비로울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사도행전 10장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로마군대 백부장 고넬료를 부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넬료의 경건한 모습을 보고 기억해주셨다가 하나님의 때에 부르기 시작합니다. 환상을 체험하게 했고, 환상 중에 천사를 통해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도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정오 기도하는 시간에 환상을 체험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사면으로 펼쳐진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습니다. 그 안에는 부정한 짐승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저는 못 먹겠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셨고, 한 번 더 말씀하신 후 환상은 종료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을 그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문 앞에 도착해서 베드로를 찾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옥상에 있던 베드로에게는 성령님의 말씀이 말씀했습니다. “지금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19-20절)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니 이렇게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체험들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속 생각해 보십시다.
1.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베드로는 자신을 찾아온 세 사람을 영접해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됩니다. 사실 이 자체도 보통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같은 집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성령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루를 자고, 다음날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가이샤라의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를 24-26절에 자세히 말씀합니다.  

24-26절을 함께 보십시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여기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1) 고넬료의 위대함 무엇입니까?
  ① 베드로가 오는 시간을 맞춰 <친척, 가까운 친구들 모아 놓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혼자 은혜 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많은 사람들도 은혜 받고자 함께 불러 모아 놓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②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는 것입니다. 엎드려 절했다는 말을, 우리가 어르신들을 만날 때 큰 절을 했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엎드리어 절하니>는 말 중에 <절하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세쿠네센’이라고 하는데 <발에 입 맞춘다.>는 뜻입니다.

<엎드려 절하니>를 쉽게 설명하면 성탄 찬송 한곡만 알면 됩니다.
   122장 <참 반가운 성도여> 1절입니다.  
“참 반가운 성도여 다 이리 와서 베들레헴 성 안에 가 봅시다. 저 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보고 ..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 하세 구주 나셨네”

이 찬양의 가사 <엎드려 절하세>라는 표현은 사람에게 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자가 취하는 자세입니다. 지금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그런 자세를 하였던 것입니다. 

  고넬료의 태도를 33절을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성도 중에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한 분 / 목회자와 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분/ 목회자와 성도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들고 있는 분들은 / 이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고넬료는 베드로 사도를 하나님처럼 경배했고, 입술로도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절)하며 말씀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면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목회자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볼 품 없어도, 주님이 우리교회에 보내주셨으니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는 물건들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리 고급도 최신의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전에 사용되니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로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지금 여러분의 앞에 서 있는 것, 하나님께서 보내주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목회자가 성도를 볼 때도 하나님이 성도님들을 한 분 한 분 보내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눈으로 서로를 보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베드로의 위대함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 받기 전에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령 받은 후에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그가 설교를 하면 하루에 3천명, 5명씩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룻다에서는 중풍 병으로 8년이나 고생하고 있던 애니아를 고쳤습니다. 욥바에서는 죽은 다비다도 살렸습니다.
이런 능력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고넬료가 하나님을 맞이하듯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대했을까요? 지금 이단 신천지 교주인 이만희씨 같으면 오는 길에 융단을 깔아 놓지 않았다고 꾸지람을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26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베드로는 고넬료를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베드로의 겸손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기가 조금만 올라가면 자신이 진짜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착각합니다. 대통령도 취임 후 1,2년 겸손하다가 3년이 넘으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줄 착각하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주님 빼면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통해 고넬료의 주의 종을 대하는 모습 / 베드로의 겸손한 모습을 우리도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다음 내용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2. 베드로의 설교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넬료와 베드로 둘 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는,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는 모른 가운데 순종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지만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순종하고 따랐던 것 같습니다.
고넬료도 베드로가 온다고 사람을 초청해 놓았습니다.
베드로도 가이샤라로 가라고 해서 왔지만 <고넬료는 왜 베드로를 초청했는지? 베드로는 왜 지금 여기에 왔는지 몰랐습니다.>
와서 인사를 하고 서로 사정을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하나님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시작, 과정, 결과까지 다 알기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을 믿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하면서 결과를 모르지만, 주님이 하라고 하셨기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결과는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27-33절은 그동안 있었던 서로간의 정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살펴보았기에 이 부분은 넘어갑니다.

대신 34-43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 내용>에 집중해 보십시다. 
설교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하나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고넬료 가정에 모인 사람들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미 제비가 먹이를 가져 올 때 새끼재비가 입을 버리는 모습의 사진입니다. 지금 고넬료의 집에 모여 있는 고넬료의 식구, 친척, 친구들의 말씀에 대한 자세는 바로 이러했습니다. 
여러분! 설교는 하는 사람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설교를 듣는 자의 마음과 태도도 중요합니다. 우리교회도 말씀을 들을 때 이런 간절함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십시다.
베드로의 설교 주제는 <화평의 복음>이었습니다.
36절에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사도바울은 화평의 복음을 더 자세히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페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에베소서 2:13-17)

화평의 복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전체 주제인 <화평의 복음>을 말씀한 뒤에 조목조목 설교를 해 나갑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38절 상반절)
② 예수님은 병 고침 이적, 기사를 통해서, 당신께서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 하셨다.(38절 하반절)
③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39절)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     은 복음의 진수입니다.
④ 예수님은 삼 일만에 부활하셨다.(40절)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셨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초대교회 당시나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유대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와 부활은 골치 아픈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설교를 할 때마다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삼 일만에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특별한 점을 강조합니다.
40-41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십자가에 달려죽는 모습은 모든 사람이 보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도 보았고, 로마 군인도 보았고, 일반 백성들도 보았고, 제자들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선택된 증인들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부활하신 몸을 고린도전서 15장에 말씀한 대로 <게바 → 열두제자 → 오백여 형제 –→ 야고보(예수님 동생) → 바울>이 보았지만, 다 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이 땅에 오셨다, 죽으셨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말하면 믿는 자와 믿지 못하는 자로 나눠집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믿게 하신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온전히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⑤ 우리가 증인이다. (39절 상반절)
⑥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시라는 것입니다. (42절)
⑦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43절)
  베드로는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복음의 진수를 설교했습니다.

3. 설교의 결과 – 이방인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44-46절까지 보십시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종적으로 땅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군대 백부장> 다시 표현하면 <이방인의 집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님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①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44절)
   모인 사람 가운데는 로마군인도 있고, 그의 아내도 있었습니다. 자녀들도 있었고, 친척들도 있었습니다.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가다락방에 120명 모두에게 성령님이 임한 것과 같습니다.

②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고 합니다.(44절)
  이미 고넬료 가정에서 모인 사람들의 말씀을 받는 자들의 마음 자세는 제가 사진으로 보여드렸듯이 입을 벌리고 있는 제비와 같았습니다. 씨 부리는 자 비유로 말하면 <옥토(좋은 땅)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간절한 마음 밭에 말씀이 뿌려지니 성령님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 밭도 옥토이기를 바랍니다. 
 
③ <성령은 말씀과 동시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44절)
  말씀 따로, 성령님 따로 역사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순간 성령님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진 것처럼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순간 성령의 역사로 통해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의 역사로 통해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④ 방언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46절)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자국의 언어로 들었듯이, 지금 고넬료의 집에 사람들도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데 분명 그 설교가 당시 보편적인 언어였던 아람어로 했을 텐데, 그들의 나라의 언어로 들렸고,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의 방언, 고넬료의 방언은 <모두가 입으로 하는 방언이 아니라, 듣는 방언이었습니다.> 자국어로 들린 방언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임함을 보고 베드로는 그들도 세례 받을 자격이 있음을 알고 세례를 베풀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성령세례, 물세례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있었던 이 놀라운 역사가 우리교회에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을 높이며 찬양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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