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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A8rPVrz4gA4
본문 초대교회의 첫 번째 기적(행 3:1-10)
설교자 권오진목사
설교일 2017-03-05

               사도행전 3:1-10 초대교회의 첫 번째 기적

 

  오늘은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ois Millet,1814.10.4.~1875.1.20.)가
  1857년에 그린 명화<만종>을 보며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만종>은 <이삭줍기>와 더불어서 밀레의 대표적 작품입니다. 
그림을 보면 저녁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들녘에서 한 가난한 농사짓는 부부가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부부의 아래에는 캐다만 감자가 바닥에 흩여져 있고, 바구니에는 씨감자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농기구가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소박하게 감사를 생산한 농부가 드리는 감사의 기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우리가 모르는 내용이 숨겨져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있는 감자 바구니는 원래 아기의 관이었다고 합니다.
흩어져 있는 보잘 것 없는 감자는 당시의 배고픔과 기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농부의 아이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  아기를 묻으려고 하는데 저 멀리 예배당에서 <저녁 무렵에 치는 종>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종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그렇게 그린 그림을 밀레의 친구가 보고, 여기에 아이의 관을 넣지 말자고 부탁했고,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넣고 그려서 출품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밀레의 만종을 X선으로 판독해 본 결과 바구니의 밑그림에 정말로 관모양의 물체가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아이가 죽는 슬픈>상황에서도 멀리 예배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기도하는 부부의 아름다운 믿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언제 어디에서나 기도합니다. 참 신앙인이란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말씀을 보세요. 성령 받은 사람들의 위대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1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제 구 시라고 한다고 해서 오전 9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시간으로 9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시간 법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시간을 정합니다. 해가 뜰 무렵이 한 시입니다.(아침 7시를 한 시라고 함)  해가 질 무렵(오후 6시)이 열 두 시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여섯 시는 정오가 되고, 제 구시는 오후 3시가 됩니다. 오후 세 시가 기도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 정오, 그리고 오후 3시, 이렇게 세 번 기도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하루에 세 번 이나 성전에 가서 기도하면 일은 언제 하나요? 그래서야 먹고 살 수나 있겠어요?’하고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한다고 해서 하루에 세 번 모두 성전에 나가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 번 중에 한 번만 성전에 가서 기도하면 됩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서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의 신앙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베드로와 요한의 영적 상태는 보통 상태가 아닙니다. 최고로 고조 되었을 때였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느끼자 그들의 입에는 방언이 나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설교를 하는데, 설교를 듣고 하루에 3,000명의 사람들이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로 통해서 매력적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쯤 되었으면 ..... 우리 생각에는 베드로, 요한 사도는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미 성령 충만한 상태인데 기도를 할 필요가 없겠다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니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하니 – 예배생활을 더 열심히 했고,
성령충만하니 – 말씀공부를 더 열심히 했고,
성령충만하니 – 찬양을 더 뜨겁게 했고,
성령충만하니 – 기도생활을 더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성령 충만함으로 더 열심히 예배생활하시고 기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성전에 기도하려고 올라가는데. 2절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1,2 절을 재미있게 표현하면 1절과 2절에 <기구한 인생>을 살았던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에는 – 기도하는 인생이 나옵니다.(베드로 요한이지요) 
반면 2-3절에는 – 구걸하는 인생이 나옵니다.
말씀을 보시면서 <기도하는 인생과, 구걸하는 인생>을 비교해서 보시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2-3절 보십시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지금 2-3절에 소개하는 사람에게는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
둘째, 나이는 사십여 세나 되었다.(행 4:22)
셋째는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 가지를 종합하면 그는 당연히 얻어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문제는 몇 십 년 얻어먹고 살다 보니 이제 이 사람은 완전히 얻어먹는 체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매일 마다 미문에 두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구걸하는 인생을 이용해서 또 등을 처먹는 사람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장소를 본문은 성전 <미문>이라고 했습니다. 미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동편에 위치한 문을 말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문이 고린도 건축 양식을 빌어 아름답게 지었다고 해서 ‘미문(美門)’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황금 문’으로 불리는데 봉쇄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구걸한 것입니다. 

장사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 잘 되듯이, 구걸도 잘 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가끔씩 보면 구걸하거나,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오는데 주일에 잘 옵니다. 왜 주일에 올까요? 주일에 교인들이 많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고, 주일에 도와 달라고 하면 목사나 중직자들이 체면 때문에 거절하기 곤란한 것을 알고 일부로 그 시간에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역시 성전에 예배하려고 오는 사람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외식적인 면이 강했기에 그들의 마음을 이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에도 관심이 없고,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기도에도 관심이 없고,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찬송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동전 몇 푼>이 관심의 전부였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첫 번째 기적이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이고, 이것이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앉은뱅이의 고침 받은 사건>을 첫 번째 기적으로 기록했을까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말씀을 보면서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기 바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성도들은 ‘나도 앉은뱅이처럼 고침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할 것이고, 목회자는 ‘나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능력 있는 종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에게는 이런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자신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한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본문을 제대로 보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을 나에게 적용하기 전에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는 저자의 목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자의 목적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1절과 6절에는 신약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 성령받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받으니 얼마나 대단한 종이 되었는지를 봅니다.
반면 2-3절에는 구약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성전 미문에 있지만,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기도에도 관심 없고, 그저 성전을 통해서 자신에게 유익한 국물만  떨어지기를 바라는 모습은 전형적인 구약 교회의 모습입니다. 구약교회의 모습이 신약의 교회 모습으로 변화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도 1절의 모습이 있는 성도도 있고, 어떤 성도는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2절의 모습이 있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2절에 속한 인생은 <구걸하는 인생>이요,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 4-5절을 보세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지금 베드로의 눈과 앉은뱅이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라” 눈과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였습니다만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설교 중에 자신이 안과 의사를 만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안과의사는 직업상 매일 하는 것이 사람들의 눈을 살피는 것이지 않습니까? 누구보다도 많은 눈을 보는 사람인데, 안과의사가 하용조 목사님에게 “목사님 눈에도 표정이 있어요” 하더랍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눈에도 표정이 있어요.>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똑 같은 눈 같이만 눈에는 표정이 있습니다. 지금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눈에도 여러분 나름의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은 눈이 반짝 반짝 빛나는 분도 있습니다. 눈에서 말씀에 갈급함이 느껴집니다. 아마 제 눈에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비치고 있을 것입니다. 반면 어떤 분은 <잠 오기 직전의 눈으로 거물거물>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 ‘목사님 잠이 와서 죽겠어요. 설교 빨리 끝내주세요’하는 표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없네요....) 

지금 베드로와 요한의 눈과 앉은뱅이의 눈에는 나타내는 표정이 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눈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기는 눈이었습니다. 이 눈은 성령받기 전에는 가지지 못한 눈이었습니다. 성령 받고 보니 그 영혼이 불쌍하게 보였고 고치고 싶은 간절한 갈망의 마음이 담긴 눈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반면 앉은뱅이의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본능으로 그동안 늘 그러했듯이 누군가 한 푼을 주려고 하는가 보다 하는 막연한 바람을 가진 눈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의 눈과 — 돈 한 푼만 기대하는 앉은뱅이의 눈>이 드디어 마주쳤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돈 한 푼 얻기를 기대하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고 먼저 선언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앉은뱅이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쓸데없는 사람이 별 소리를 다하네, 없으면 그냥 지나갈 것이지 자기를 쳐다보라, 마라는 왜 해’ .. 하면서 짜증내며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이어서 아주 의외의 말이 나옵니다. “네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우리가 워낙 많이 생각해서 그렇지 ... 사실 이 말씀은 보통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에 붙들리지 않고는 예수님에게 붙들리지 않고는 이런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은과 금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인간을 <돈>으로 평가합니다.
연예인을 A급 B급 C급로 나눌 때에도 돈으로 평가합니다.
사람의 능력도 돈으로 평가합니다.
세상만 그런 줄 아십니까? 교회를 평가하는 것도 교인들을 평가하는 것도 <은과 금으로 평가합니다.> 교인들도 모여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돈, 돈, 돈입니다.
물질만능주의 사고가 교회 안에도 밀려들어온 결과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원래 교회가 그런 곳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와 교인은 언제 어디서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곳이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하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삼 일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 이 소리가 교회에, 성도의 입에서 넘쳐나야 합니다.

  중세의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엄청난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우리의 교회는 땅도 많이 가지고 있다. 건물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 은과 금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었다”고 했습니다.
중세의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한국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문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향하여 걸으라. /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목적으로 걸으라.>는 뜻입니다.
즉 돈만 생각하고 살던 앉은뱅이야! 이제는 그런 삶을 살지 말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을 목적으로 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선언과 더불어 앉은뱅이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놀라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앉은뱅이를 예수님이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예수님으로 인해 걷게 된 것입니다. 

7- 8절을 보세요.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 뛰어 서서 걸    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동안 성전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이 ..
성전 안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던 사람이 ...
예수님으로 인해서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나자
<성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제야 영광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성령충만과 더불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야 제대로 된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절은 앉은뱅이가 걷는 것을 본 백성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9-10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무슨 말입니까? 앉은뱅이의 치유사건으로 – 모든 백성에게 전도의 문을 열리게 되었고, 복음을 들을 귀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다음주일에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우리는 본분을 통해서 몇 가지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1) 우리는 기도하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구걸하는 인생입니까?
2)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충만하게 있습니까? 아니면 은과 금이 있습니까?
3) 우리는 성전에서 찬미하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성전 미문에서 머무는 인생입니까?
  이제 우리 모두도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성령님과 예수님을 소유하고
         능력 있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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