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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K79Sh1QfJGU
본문 주님만 위해 살게 하소서(행 5장:33-42)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6-11

사도행전 5:33-42 주님만 위해 살게 하소서

 

사도행전을 어떤 사람은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안에는 온통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령하나님이 강림하신 이야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사역이야기, 성령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예수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여지없이 예수님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하실 때 자신이 떠나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요한복음 16장에 밝히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고,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임과 동시에 예수행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성령님의 역사를 보셔야 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감옥에 갇힌 제자들을 천사들이 출옥시켜주고, 그들에게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는 사명을 주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풀려난 사도들은 사명에 순종해서 새벽에 성전에 나가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시 산헤드린 공회로 끌려왔는데 그곳에서 사도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 부활하신 예수 / 구원자 예수를 증거하며 32절에 마무리하기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라고 간증하는 부분까지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십시다.

33절을 보십시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

여기에서 말하는 ‘그들은’ 대제사장을 포함한 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회원들을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몇 달 전에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셨던 바로 그 공회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산헤드린 공회가 먼저 처형결정을 하고, 그 후 사형집행권이 있는 빌라도가 추인해 준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 제자들이 등장해서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 구원자 예수’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했는데,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가르치니 그들의 화가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이 첫째, 분노했고, 둘째, 그들은 살기가 생겨서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충분히 그들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런 표면적인 것만 보면서 말씀을 다 이해했다고 말씀하시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산헤드린 공회를 조정하고 있는 세력을 보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배후, 일반 제사장의 배후, 사두개인의 배후, 바리새인의 배후에 지금 누가 있습니까? 사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부흥일로를 갈 때, 가장 싫어하는 세력이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서 교회 안에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베드로사도를 통해서 그 계획이 무산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을 죽인 산헤드린 공회를 통해서 핍박하는 방법으로 교회의 부흥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 33절의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하는 말씀을 보면서 그들의 분노, 그들의 살기 뒤에 있는 사탄의 세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전도를 해 보시면 이런 사탄의 세력을 볼 것입니다.

어떤 분은 순순히 전도지를 받고, 차를 대접받고 고맙다고 하지만

반대로 어떤 분은 전도를 하면 <너나 믿으라> 하면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배후에 사탄이 역사하기에 전도자를 보고 분노하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하고, 목회자를 생각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교회 앞에 쓰임 받는 종이 될까? 어떻게 하면 목사님의 목회를 도와드릴까? 하면서 주님이 기뻐하는 일만 생각하는데, 반대로 일부의 세력은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생각하면서 <분노하고, 목회자도 중직자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다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내면을 성령하나님이 다스리시는지, 아니면 사탄이 다스리시는지 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은 늘 주님을 생각하고, 성령님이 원하시는 생각을 하고, 성령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의 말을 듣고 분노하고 살기등등해서 죽이려고 할 때, 그들이 그런 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말린 지혜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34절을 보십시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그는 <가말리엘>이었습니다. 본문은 가말리엘에 대해서 몇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가진 바리새인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습니다. 이유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괴롭혔고,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꾸짖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말씀대로 실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영성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초심을 버리고 나중에는 그저 외식적인 자들이 되어 버렸기에 예수님께 꾸중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여간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고 간증했습니다.>

 

둘째, 그는 “율법교사”였습니다.

여러분 남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의 성경지식은 오늘 우리들과는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4살부터 하루 3시간씩 모세오경을 외우고, 13살이 되면 모세오경을 모두 암송해야 성인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가? 짐작할 정도이지 않습니까?

 

셋째, 그는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가말리엘이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은 이유를 알려면, 그의 집안을 조금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내에서 율법 해석에 따라 두 학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삼마이(Shammai)>학파, 또 하는 <힐렐(Hillel)>학파였습니다. 그 힐렐 학파를 태동 힐렐이 <가말리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그냥 힐렐의 손자라고만 해도 존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스승이 바로 <가말리엘>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간증을 할 때마다 자신은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정도로만 소개해도 <아하... 그렇구나!>하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이렇게 집안의 배경이 있고, 학문적인 최고의 자리에 있었고, 뿐만 아니라 삶도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던 인물입니다. 가말리엘이 죽자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율법의 영광이 떠났고, 깨끗함과 거룩함이 죽었다” 이 정도로 그의 명성은 당대에 대단했습니다.

 

그런 가말리엘이 공회에서 일어나 사도들을 밖으로 나가게 한 후 발언을 합니다.

35-39절을 읽어보십시다.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가말리엘의 연설에서 우리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연설법을 하나 발견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추상적인 이론을 들어 설명하지 않고, 언제나 역사적인 사건을 들어서 설명합니다. 지금 가말리엘도 그렇습니다. 인민재판 하듯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결의하려는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두 가지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 두 사건이 본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36절에 나오는 <드다 사건>입니다.

드다는 자칭 메시아라고 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나는 여호수아의 후예다. 나는 여호수아처럼 이 민족을 구할 것이다. 맨발로 요단강을 건너해 줄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 영적인 암흑기였던 그때 이분이 진짜 메시야인가 싶어서 따른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죽임을 당하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고 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주전 4년 드다가 죽은 것으로 말합니다.

 

또 하나는 37절에 나오는 <유다 사건>입니다.

유다사건은 37절에 이렇게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구레뇨가 시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그곳 거민들을 호적하게 했습니다. 이유는 세금을 어떻게든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때에 갈릴리사람 유다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께만 세금을 바칠 것이지, 그 누구에게도 세금을 내지 못한다.’ 라는 말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로마정부에 대항하여 일종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니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다 역시 결국은 잡혀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니 그 무리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역사적인 두 사건을 예로 들며,

지금 예수님이 죽고 난 후,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우리가 혼란하게 생각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고,

이것이 사람들의 광적인 운동이요, 인간적인 조작으로 이루어진 운동이라면

이제 없어질 때가 되었으니 조용히 기다려도 답답할 것이 없지 않느냐>라는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가말리엘의 말을 들은 공회회원은 그 말을 수용합니다.

40절 “그들이 옳게 여겨…”라고 가말리엘의 연설의 결과를 말합니다.

저는 이 가말리엘을 보면서, 교회에는 이런 지혜로운 자가 있어야 겠구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없는 일도 만들어서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서를 옮겨도 시끄럽습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해서 교회를 옮기면 그 사람 때문에 그 교회는 시끄러워집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큰 문제가 있어도 지혜롭게 대처해서 조용하게 해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후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말리엘처럼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가말리엘의 연설 후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도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다.

40절입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밖으로 보낸 사도들을 불러 두 가지를 행했습니다.

하나는 <채찍질>이고, 또 하나는 그동안도 그러했듯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함구령>은 이미 앞부분에서 생각했기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채찍질>부분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채찍질은 부모가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아이의 종아이를 걷게 해서 싸리로 된 매로 때리는 정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채찍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영화에서 예수님이 총독 빌라도의 관저에서 맞았던 채찍질을 말합니다.

신명기 25:3절에 채찍질에 대해 기록하는데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 말하면서 그 이상은 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사십까지만 때리라고 했기에, 이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39대를 때렸습니다. 수형자의 상반신을 벗겨서 두 손을 기둥에 묶어놓고 가슴과 어깨를 열세 번씩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물론 그 채찍 끝에는 아주 날카로운 뼈 조각이 붙어 있는 것으로 한 번씩 맞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태형을 할 때, 제판장이 멀리서 ‘때려라’하며 명령하면, 한 사람은 때리고, 한 사람은 그 옆에서 그 수를 셉니다. 이렇게 해서 39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채찍질 하는 동안에 제사장은 그 옆에 서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읽는 말씀이 <신명기 28:58-59> 다음으로 <신명기 29:9> 그 다음으로 <시편 78:38>이었습니다.

신명기 28:58-59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 하면 ◌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 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신명기 29: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시편 78:38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였으니”

이 말씀들을 읽는 동안 채찍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런 태형을 사도들이 맞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4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라고 합니다. 바울은 39대의 채찍질을 다섯 번이나 맞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때문에 사도들도 바울도 매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예수 믿는다고, 예수님을 가르치고, 전도한다고 이런 매를 맞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맞은 후에 신앙생활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요즈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세요. 마치 어린아이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 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신앙생활을 하다가 내 자존심 하나 건들리면 <믿음생활> 전체가 흔들흔들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채찍질을 당하고, 함구령이 내려진 후> 사도들의 반응을 41-42절에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41절에서 깜짝 놀랄 표현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채찍질을 당한 것을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메시지 역에는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치욕당하는 영예를 얻는 것을 크게 기뻐하며 의회에서 나왔다”고 번역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십니까? 이 말씀은 영적인 소속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매를 맞는다는 말은

- 그들의 소속이 예수님 소속이라는 말이지요. 사탄의 소속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가 있는 것도 알았습니다.

- 그리고 신앙의 길은 예수님 때문에 가난하고, 핍박당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 중 핵심 팔복을 여러분 아십니다.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로 마칩니다. 진짜 복 있는 사람은 가난으로 시작해 의(예수)를 위해 핍박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매를 맞은 후 그들은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서 힘드십니까? 고난 중에 있습니까? 더 심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믿는 흔적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에서 여러분이 받을 상급이 클 것입니다.

 

마지막 42절에 보면 <함구령>이 내려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날마다, 장소가 성전이든, 집이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말씀교육>과 <순수전도>가 필수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찬송 한곡이 생각났습니다. 설교 후에 부를 316장입니다. 이 찬송 1-3절 마지막 소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환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주님만 위해 살게 하소서

2. 괴롬이 와도 슬픔이 와도 주님만 위해 살게 하소서

3. 고통이 와도 죽음이 와도 주님만 위해 살게 하소서

 

이제 우리는 사도들의 신앙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추스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 위해 살아가는 / 주님을 증거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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