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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KOPkujCuH9o
본문 예수님을 만난 사울(행 9: 1-9)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8-13

사도행전 9:1-9 예수님을 만난 사울

 

<사도행전>은 성경의 여러 책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탄생된 교회이야기

- 성령 받은 사도들이 행한 기적이야기

-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면서 천국을 본 스데반이야기

- 사마리아와 광야로 가서 복음을 전한 빌립이야기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말씀은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역동적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살펴볼 9장 말씀도, 앞으로 복음이 지중해를 넘어, 제국의 중심로마까지 가는 이야기는 모두가 역동적입니다.

 

그렇기에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시선이 역동적인 사건이나, 그 일을 행한 사람들에게 멈출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럴 경우 사도행전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큰 주제는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성령하나님이 언제 임하셨고,

성령하나님이 누구를 사용하셨고,

성령하나님이 복음 전파사역을 어떻게 이루어 가고 있는지

<성령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회심 사건>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들어왔던 어거스틴의 회심, 루터의 회심, 요한 웨슬레의 회심은 사울의 회심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회심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너무나 많이 설교로 들어왔기에 ‘다 알고 있어’하며 머리와 가슴을 닫아버린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어떤 음성을 들려주실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설교가 마쳤을 때, 이 말씀에서 새로운 보화를 찾았다고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 받을 준비된 분은 1-2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함이라”

 

본문은 <사울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러분 사울은 어떤 자입니까?

사울의 이름의 뜻은 ‘큰 자’입니다. 이름만 ‘큰 자’가 아니라 진짜 큰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 사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성경은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①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고,

율법과 유대전통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② 다소에서 자랐습니다.

다소에서 자랐다는 것은 헬라의 문화와 철학에 익숙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③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로마의 모든 정치와 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④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서울대출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만 봐도 사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유대 정통주의자 / 헬라 문화와 철학에 능통한자 / 로마의 정치와 법을 잘 알고 있는 자 / 그 시대 최고 학부 출신>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무식한 사람, 맹목적인 사람이 아니라, <최고의 지성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철저하게 구약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만 믿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귀에 예수님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비상한 머리>, <뛰어난 판단력>을 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에는 목숨을 걸 줄 아는 행동력>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그들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핍박하는 데도 앞장섰고, 스데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진 성도들이 이스라엘 밖으로 갔을 때, 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 오늘 말씀을 보면 다메섹 행을 결심하고 실행한 것입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240km 떨어진 곳입니다. 지형적으로는 해발 685m 고지에 조성된 도시였습니다. 요즘 같은 이동 수단이 없던 당시에는 최소한 4-6일을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사울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무리를 만나기만 해 봐라. 내가 씨를 말린다.” 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이 먼 거리를 간 것입니다. 드디어 다메섹에 거의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울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지라”

사울은 “홀연히 하늘로 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체험을 합니다.

 

여러분! 이와 비슷한 말씀을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어디에서 보았지요?

사도행전 2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할 때 현상을 오늘 본문과 비슷하게 묘사합니다.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실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라고 했는데

그런 역사가 지금 사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홀연히 … 하늘로부터 …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지라”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120명이 있는 공동체에게 성령님이 임하실 때 나타났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사울 개인에게 성령님이 임하실 때 일어난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하나님은 공동체에게 임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에게도 임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은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이 시간에도 놀라운 체험을 하시기를 바라고, 개인적으로도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이어지는 말씀을 또 보십시다.

4-5절입니다. “땅에 엎드려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였느냐 하시거늘 ◌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때 비추었던 빛은 태양보다 수십 배 더 밝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빛이 경험한 사울은 땅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빛과 함께 이어서 소리도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 말씀에서 먼저 볼 것은 예수님이 사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사울아, 사울아”하며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부른 경우를 종종 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모리아 산에 올라가 제사 준비를 완료한 다음,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 할 때, 하늘에서 소리가 급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는 하나님의 소리였습니다.(창 22장)

 

모세가 호렙 산에서 양떼를 치다가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불렀습니다. 뭐라고 불렀을까요? <모세야, 모세야!”> 하며 그의 이름을 두 번 불렀습니다.

 

실로성소에 있던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도 “사무엘아, 사무엘아!”하면서 두 번 부르셨습니다.

 

베다니에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예수님이 마르다를 부르실 때에도 “마르다야, 마르다야!”하며 두 번 불렀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 부른 경우는 대게 <정감>을 나타낼 때, <긴박성>을 나타낼 때,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 그렇게 불렀습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른 것도 사울에게 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부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 사무엘아, 사무엘아 / 모세야, 모세야 /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셨듯이 <오진아, 오진아> 하면서 애정 있는 목소리로 어떤 사역을 함께 하자고 불러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예수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나는 너를 그렇게 사랑했고,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네가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그렇게 기다렸고, 네 사랑을 받아주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너는 어찌하여 나의 사랑에 반응은 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아 사울아,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건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런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의 교회를 핍박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있느냐”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교회는 핍박했습니다. 제자들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기는커녕 이때까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교회를 핍박한 것이 = 나를 핍박한 것이요, 예수를 믿는 사람을 핍박한 것이 = 예수를 핍박했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중요한 신앙의 논리 하나를 얻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은 예수님, 교회는 교회, 성도는 성도로 따로따로 떼어 생각했고 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함부로 말하고, 성도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을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섬기는 교회 목사를 함부로 폄하해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평신도지도자와 성도를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주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를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주일마다 만나는 옆자리의 성도 안에, 목회자와 평신도지도자 안에, 우리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알 때 서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줄 책임이 나에게 있는 줄 알고,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삶아가기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 보십시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울이 대답합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는 말씀을 우리가 깊이 묵상하지 않아서 그렇지, 예수님의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말에서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더 이상 육체로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이 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도,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도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하셨기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은 2,000년 전에도 살아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살아계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로 세미한 음성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며 말씀하고 계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는 시간과 공간이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는 보통 사람들처럼 오랜 시간 힘들게 걸어갔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후 <부활체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체로서의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잠가두었는데도 벽을 통과해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 우리교회에서도 역사하면서 /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도 동시에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시, 공간을 초월하신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임재는 성령님의 임재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성령하나님은 어떠한 에너지나 기(氣)와 같은 존재도 아니고, 세상의 물질이나 귀신이나 무당이 잡신들과 같은 존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임하시는 그 곳에는, 예수님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습니다.

성령님이 계시는 곳에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계시는 곳마다, 예수님이 선포되고 증거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사울을 예수님이 부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는 이미 그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계획을 세워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은 – 순교자로 / 빌립은 – 전도자로 / 바나바는 – 상담자로 불렀고, 사도들은 – 설교자로 / 사울은 선교사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불렀을 때에도,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입니다. 그 부르심의 목적을 알고, 순종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8-9절을 보십시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성경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기간을 3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3일 길을 갔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있었고,

예수님도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들 모두 삼일 후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울도 3일 동안 <‘큰 자’라는 사울의 옷을 깨끗이 벗고, ‘작은 자’란 바울의 옷을 입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은 대부분 자신만 믿고 살아가고 있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시기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시기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울의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사건을 생각했습니다.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나의 삶>,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삶>을 비교해 보시면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지 확인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부르신 부름의 목적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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