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조회 수 66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5월 29일
마가복음 2:1-12 협력하는 교회공동체

옛날 옛날에 있었던 세 부족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들으시고 마음에 드는 부족을 하나 골라 보세요.
첫 번째 부족은 <경쟁하기를 좋아하는 부족>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겨 1등을 하는 것으로 목표로 삼았습니다.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경쟁을 했고, 동굴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경쟁을 하였습니다. 결국 서로 1등을 하기 위해서 죽이고 싸우다가 결국은 가장 강한 1명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곧 죽고 말았는데 이유는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족은 <혼자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부족>입니다.
이들은 혼자 사냥을 하고, 혼자 일하고, 혼자 동굴에서 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홍수가 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들은 다른 사람의 처지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기 동굴에만 제방을 쌓았습니다. 이들은 후에 극단적인 개인주의자가 됨으로 재생을 하지 못하고 결국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부족은 <협력을 좋아하는 부족>입니다.
이들은 집단을 이루어 사냥을 하며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마을 전체가 잔치를 했고 매우 즐겁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독특한 인성을 계발하는 방법을 발달시켜 이 부족은 계속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세 부족 중에 어느 부족이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협력을 좋아하는 부족>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협력은 21세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제가 21세기 교육에 필요한 4가지 요소를 말씀 드릴 테니 암기해 보세요.
<21세기 교육에 필요한 4가지 요소>
① 협력, 협동
② 효율적 의사소통
③ 높은 사고력
④ 창의력
자 외울 수 있겠습니까?
① 협력, 협동 / ② 효율적 의사소통 / ③ 높은 사고력 / ④ 창의력
옆 사람에게 4가지를 말씀해 보세요. <쉽지 않으시죠?>

자 그럼 제가 암기하기 좋게 모션을 취해 볼 테니 따라해 보세요.
① (손 잡고)협력, 협동 / ② (입으로)효율적 의사소통 / ③ (머리에 손대고) 높은 사고력 / ④ (양팔을 펼친다) 창의력

자 이제는 기억하시겠지요. <① 협력, 협동 / ② 효율적 의사소통 / ③ 높은 사고력 / ④ 창의력>

21세기 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첫 번째 요소가 <협력, 협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잘 되지 않습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한국교회를 보십시오, 협력하고, 협동하는 것이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그렇습니다. 같은 교회를 섬기면서 <교육기관은 교육기관대로, 선교기관은 선교기관 대로, 구역은 구역대로 협력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속한 부서 내가 속한 기관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깨트려야 할 요소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협력하는 사역>이 얼마나 중요 한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가버나움 어떤 집에 있었을 때 발생한 일을 소개합니다.
1절에 보면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에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인산인해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머문 집이 누구의 집일까요? 주인을 두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한 부류는 1장의 말씀과 연결시켜서 이 집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집이라고 추정합니다.
또 한 부류는 예수님의 집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예수님의 집은 나사렛에 있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을 떠나서 가버나움에 가셔 사셨다고 하는 말씀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4:13에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고 합니다.
또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 마태복음 9:1절에 보면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라고 하는데 이 말씀에서 <본 동네>라는 말은 예수님이 살던 집이 있는 동네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학자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집이 <예수님의 집>이었다고 추정합니다.

자, 베드로의 집이였건, 예수님의 집이었던 중요한 것은 그 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집안에는 물론이요, 집 밖에서도 사람이 모였습니다. 왜 모였을까요?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싶어서 모였을 것이고, 또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으니 병을 고치고 싶어서 모였을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그 집에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네 명의 친구가 침상채로 들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는 왔지만 주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집 밖에 많은 사람이 있었고, 집 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쩔 수 없네, 오늘은 일단 돌아가자’ 면서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네 친구는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머물고 계신 집 지붕위에 올라가서 환자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아 내리는 방법을 계획한 것입니다.

사실 이 방법은 우리나라 가옥구조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옥구조를 이해하시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집은 지금처럼 철근 콘크리트로 짓지 않았습니다. 허술하게 지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대체적으로 그들의 집은 지붕이 평면이었고, 집 옆면에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붕은 굵은 나무로 대들보를 놓고, 작은 나무들을 걸쳐 놓은 후, 진흙으로 발라서 비가 새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풀이나 짚을 엮어서 그 위에 덮거나 또는 단단히 다져서 흙 기와로 덮었습니다.
따라서 네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친구는 큰 어려움 없이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오늘 본문이 있었던 그 장소를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데, 갑자기 지붕에서 소리가 납니다. 얼마 후에 약간의 흙과 짚이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지붕이 훤히 뚫리고 집 안에서 하늘이 보였습니다. 그것도 잠시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이 지붕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마 침상을 내리는 네 친구들의 얼굴도 보였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사실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바랐던 말씀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가 바란 말씀은 11절에 나오는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먼저 선포하셨습니다. 이 <죄 사함의 선포>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죄를 사해주는 문제는 사람이 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죄를 사해주는 문제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는 말에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 /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메시아 선언>이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면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보다 더 귀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작은 믿음을 보시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선포에 서기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이 말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예수님이 지금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네들끼리 수근 거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의 속을 아셨습니다.
8절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독심술>을 가지고 계심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는 순간 이미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를 다 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 보통 사람들은 <중풍 병을 고치는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풍 병을 고치는 것은 우선 눈으로 보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를 사해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기에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죄를 사해주는 것이 더 힘들고,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두 가지를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죄 사함을 선포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어서 <중풍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11-12절을 보세요.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는 순간 <중풍병자는 고침을 받았고, 일어나서 자신이 누워서 온 침상을 들고, 그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 기적을 본 모든 사람들은 다 놀랐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서 공동체가 협력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몇 가지 분명한 교훈 보시면서 우리교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1) 공동체의 믿음이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충북 보은에 가면 <보나콤>이란 신앙공동체가 있습니다. 라틴어 (보나: good(좋은 착한) / 콤 : community(커뮤니티 : 공동체)) 좋은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보나콤에서는 공동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공동체란?
도저히 함께 지낼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사는 곳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곳
그렇게 살다가 어느 새 내가 변하는 곳


참 멋진 정의라고 생각됩니다.
중풍병자 이야기로 돌아가 보십시다. 중풍병자를 네 명의 친구가 상에서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절) 죄 사함을 선언해 주었고,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은 친구 네 사람의 믿음인가? 아니면 중풍병자를 포함한 다섯 사람의 믿음일까요? 다섯 명 모두의 믿음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의미로 보면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명의 믿음이 대단했다는 것을 칭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금 행동이 남들에게 조롱을 받을 수도 있고, 자신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중에 집도 수리해 줘야 할 만큼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예수님께로만 가면 반드시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중풍병자 한 사람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정동교회 공동체 모두도 우리가 가진 어떤 문제든 예수님께서는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에 어떤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데리고만 오면 주님이 그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공동체의 협력이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중풍병자 친구들의 협력은 대단합니다. 만약 네 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의 집에 의논만 했다면 친구는 고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친구를 불쌍히 여기기만 했다면 그 역시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하고 협력했습니다. 중풍병자의 집과 예수님이 머무신 집이 얼마 떨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협력해서 누워있는 친구의 침상을 한 귀퉁이씩 들기도 하고, 메기도 해서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왔던 것입니다. 사람이 많아 들어가지 못하자 지붕위로 올라갔고, 지붕을 뜯었고, 지붕에서도 한 귀퉁이씩 줄을 메어서 내렸습니다.

네 친구는 키도 차이가 났을 것이고, 힘도 차이가 났을 것입니다. 생각역시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협력했더니 친구의 중풍 병이 나은 것입니다.
오늘 교회공동체가 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의 생각, 달란트, 믿음이 다 다르지만 협력하기만 한다면, 우리교회로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공동체의 창의력이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친구를 고쳐보겠다는 열심을 품었습니다.
그 열심히 침상 채 아픈 친구를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데려왔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들어갈 수 없는 장애가 생겼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그 환경에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내리겠다는 기발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누가 제안했는지 모르지만 공동체가 모이니 한 사람의 생각보다 월등히 나은 생각을 찾아내었고, 그 기발한 창의력이 중풍병자를 고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 구차하게 핑계를 대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환경 때문에, 돈 때문에, 회사 일 때문에, 사업 때문에, 누구 때문에, 핑계하지 않고, 그 환경에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 찬양예배 란을 보세요. 좋은 글 하나 실었습니다. <읽어드립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아마도 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해 왔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서툰 걸음걸이를 시작했을 때
당신은 처음으로 넘어졌습니다.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당신은 물을 먹고 허둥댔겠지요.
처음 야구배트를 휘둘렀을 때, 당신은 공을 잘 맞출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강타자라 부르는 사람들, 그들은 홈런을 제일 많이 치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많은 스트라이크 아웃을 기록했습니다.
베이브 루스(Babe Ruth)는 1,330번 스트라이크 아웃을 경험했지만
714번의 홈런을 때렸습니다.

영국의 소설가 존 크레시(Jhon Creasey)는 564권의
책을 출판하기 이전에 753번의 거절 편지를 받았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시도조차 하지 않아 사라지고 마는
그만큼의 기회에 대해서 걱정하십시오.】 멋진 글이지요.

우리가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상황을 시도해 내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한 사람의 <중풍병자> 네 명의 친구가 예수님께 메고 와서 고침 받은 사건에서, 오늘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부족할 지라도, 우리가 협력해서 한 마음을 섬길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더욱 협력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379 로마서 강해 44. 은혜로 남은 자들(롬 11:1-12) 2021.02.14 375
378 로마서 강해 43.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롬 10:14-21) 2021.02.07 357
377 로마서 강해 42. 예수 잘 믿으세요 (롬 10:5-13) 2021.01.31 292
376 로마서 강해 41. 삶의 모든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롬 10:1-4) 2021.01.24 258
375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0-24) 2021.01.17 996
374 거룩한 염려로의 초대 (마 6:25-34) 2021.01.10 256
373 희년(禧年, Jubilee)을 구현하는 교회 (눅 4:16-21) 2021.01.03 179
372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잠 16:1-9) 2020.12.27 434
371 동방박사들의 세 가지 선물 (마 2:1-12) - 성탄축하예배 2020.12.25 1501
370 다시 오실 그분 (계 22:10-21) 2020.12.20 201
369 그가 오신 이유? (히 2:14-18) 2020.12.13 724
368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막 8:27-38) 2020.12.06 260
367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행 11:19-26) 2020.11.29 313
366 로마서 강해 40.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롬 9:30-33) 2020.11.22 295
365 고통중에도 찬양하다 (합 3:16-19) 2020.11.15 329
364 로마서 강해 39. 내가 너를 빚었단다.(롬 9:19-29) 2020.11.10 421
363 로마서 강해 38. 주권은 하나님께 (롬 9:14-18) 2020.11.01 281
362 로마서 강해 37. 출발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하라 (로마서 9:6~13, 사도행전 11:19~26) 2020.10.25 208
361 로마서 강해 36. 동족에 대한 바울의 고통 (롬 9:1-5) 2020.10.18 294
360 로마서 강해 34. 그리스도인의 승리 (롬 8:1-39) 2020.10.11 234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11 ... 25 Next
/ 25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