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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Pub3EelWsMU
본문 스데반 순교 이후(행 8:1-4)
설교자 권오진목사
설교일 2017-07-16

사도행전 8:1-4 스데반 순교 이후

 

우리는 지난 시간 기독교의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였기 때문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체포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은 그를 신성모독 죄로 고소했고 심문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스스로 변호해 보라는 요구를 받은 스데반은 창세기부터 말라기의 말씀을 언급하며 거기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데반이 한 일은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산헤드린에게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하며 시작하여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자가 되었다”(행 7:51-53 참조) 면서 너희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설교를 들은 산헤드린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이를 갈았습니다. 거기까지만 했어도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들에게 쐐기를 박는 한 마디 말을 더 합니다. 그것은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그 순간 체험한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늘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다, 보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서계시지 않느냐? 말한 것입니다.

 

이 말에 그들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귀를 막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잡고 성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떼려 죽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첫 째 순교자 스데반이 순교 당한 이유요, 순교당한 방법이었습니다.

 

오늘은 스데반 순교 이후 초대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십시다.

1. 스데반의 시신 처리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순교한 스데반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등 유대 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이는 처형은 아주 극악한 몇 가지 죄를 저지른 경우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하나님에게 불경스럽거나 그분을 모독한 죄를 지은 자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죄 역시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문제는 이렇게 돌로 맞아 죽은 자를 장사를 지내주거나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서 우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 역시 하나님을 거역하는 동일 범죄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돌에 맞아서 죽은 스데반을 장사 지내고, 그를 위해 크게 운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2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이 한 구절의 말씀은 단순히 스데반의 장례식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교인들이 신앙이 얼마나 견고했고, 확실했는가를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스데반의 시신을 장사하고, 스데반을 위해 크게 욺으로써 공개적으로 나도 스데반이 믿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 이것이 스데반의 순교와 장례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데반 순교 이후 초대교회 일어난 실제적인 이야기에 집중해 보십시다.

 

2. 스데반의 순교 씨앗이 땅에 묻혀, 사울이란 열매가 탄생되었습니다.

사울의 이름이 어디에 나옵니까? 오늘 본문 1절과 지난 시간 생각한 7:58에 나옵니다.

1절 상반절에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이 구절에서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고 하는데, 이 말은 “죽어도 잘 죽은 거야”하고 동의한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말입니다.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하고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스데반의 죽음에 사울이 주도적으로 역할을 했고, 순교 현장의 한 복판에 사울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울은 일생동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경험합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7:59)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 하며 기도하는 것은 잊혀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순교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 경험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통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것도 이해가 되었고,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해되었고, 스데반의 순교에 자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에 자신도 선교하면서 그 어떤 핍박을 당해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사울의 등장은 예수님이 주신 한 구절 말씀으로 잘 설명됩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허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위대한 복음의 거장 사울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들은 그 전체를 보지 못하기에, 그저 한 사람의 죽음을 보고 불쌍하다. 안됐다. 허무하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여러분을 한 번 보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을 세우려고 하나님은 부단히 많은 사람들을 숨겨놓으셨을 것입니다.

저를 목회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복음에 미쳐서 살았던 저희 아버지를 세워주셨고, 가난으로 허덕이면서도 복음 전하는 일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어머니를 세워주셨습니다. 그 아버지, 어머니의 씨앗이 심겨서, 저라는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서 직분 받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의 지금이 있기까지는 여러분을 위해서 희생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내가 오늘 있는 줄 아시고, 그들의 희생에 부끄럽지 않는 믿음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스데반의 순교로 큰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1절 중반절에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눈으로 이 말씀을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다면, 그 이후에는 더 좋은 쪽으로 전개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모습을 보고,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불신자들이 모두 예수를 믿었더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전혀 반대 이야기를 합니다. 예루살렘 에 있는 교회에 박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박해도 작은 박해가 아니라 “큰 박해”(1절)가 있었다고 합니다.

3절의 “잔멸할새”라고 합니다.

F. F. 브루스라는 영국의 신약학자가 ‘진멸하다’는 부분을 어의적으로 아주 잘 해석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멧돼지가 포도밭에 들어가서 잘 영근 또는 영글기 시작한 포도를 짓밟아 으깨어 부수다.>

사울이 교회를 짓밟아 으깨어 부수기 위해 각 집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교회의 멤버십을 갖기 시작한 초대교회 성도들을 옥에 가두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이렇게 박해의 기폭제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씀을 보면서 너무 허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본문 말씀 중 한 단어만 바로 알면 우리의 생각은 180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단어는 1절 상반절을 지나고, 단락을 구별해 놓은 다음에 첫 번째 있는 단어입니다. 무슨 단어입니까?

<그 날에>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될 것입니다.

<그 날에> 라는 말은,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그 날을 가리키는 단순한 말로 보입 니다. 물론 그 뜻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에> 라는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는 <바욤 하제>인데, <바로 그날에> / <바로 그 특정한 날에>라는 말입니다. - 더 풀이를 해 보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날에”라는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 두 곳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9: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삼 개월 되던 날 – 히브리어 바른 번역은 <삼 개월 째 되던 바로 그 날에>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로 그날>은 부족공동체에 지나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의 국가공동체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을 그린 날”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오순절 바로 그날에 — 성령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날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그 날에>라는 말이 나오면 이는 보통 날이 아니라, <바로 그날 /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날>이라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 본문이 이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결과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는데, 그 박해의 주동자가 사울이 아니라, 누구라고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손을 빌려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를 가한 것입니다.

 

박해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우리가 말씀을 살펴본 대로 초대교회성도만큼 행복한 자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 충만했습니다. 사랑이 넘쳤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여서 예배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박해가 찾아왔습니까? 이유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너무 행복한 나머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명령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남긴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초대교회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성령이 임했고, 권능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복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구 한 사람 복음을 들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변화 산에 올라간 세 제자들이 말 한 것처럼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 예루살렘에 머물고자 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신앙을 더 성숙시키려고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한 날을 기해 예루살렘 전체 교회에게 핍박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핍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성장에는 – 성장통(growing pain) 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 더욱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저 평안하다고 무작정 좋아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고난을 당한다고 불평하고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여러분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신약의 바울, 그리고 기독교 역사의 인물 중에 고난당하지 않고 성숙한 신앙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도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믿음과 영성을 성장시키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스데반 순교로, 디아스포라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집중력이 지금쯤 많이 떨어졌을 텐데, 저는 지금부터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제가 본문을 사도행전 8:1-4절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으로는 1-3절을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단락을 그렇게 구별해 놓았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엉뚱하게도 4절 말씀까지 선택했습니다. 4절 말씀도 보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면서 마무리도 신통치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원본에는 장과 절이 구분되어 있을까요? 없습니다. 원본은 현재 존재하지 않고 지금 있는 필사한 사본을 보면 장, 절 구분이 없습니다.

우리 성경처럼 장, 절을 구분해 놓은 것은 종교개혁을 한 후인 150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사도행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자신 나름대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도행전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복음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 유대와 사마리아에 전파되고, - 땅 끝까지 순서대로 전파되는 것을 기록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1-7장은 – 성령이 임하고 예루살렘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내용이

8-12장은 –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로 가는 내용이

13-28장은 –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가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우리의 머리에도 이런 식의 전개가 익숙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성경 보는 눈을 하나 더 열기를 바랍니다.

본문 1-3절을 보신 뒤에는 4절로 바로 가지 마시고, <사도행전 9:1로 가십시오.> 거기에는 예루살렘을 박해한 사울이 다메섹으로 핍박하려고 가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신 다음에는 --- 5절로 바로 가지 마시고,

사도행전 11:19 로 가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해가 더 잘 됩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21절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자 그쯤 생각하고 다시 8장으로 가 보십시다.

1절 중반절부터 보십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자 이제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교회에 박해가 가해졌습니다. 가가호호 수색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못살게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살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가족별로 떠났을 것입니다. 떠나는 지역을 결정할 때도 자신들이 가면 살 수 있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는 조금마한 연고가 있는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박해로 모두가 사마리아로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마리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외에 전 지역으로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초대교회 교인수가 3천명, 5천명까지 수를 세다가 그 다음에는 세지 않았다고 했는데, 남자가 만 명까지 성장했다면 한 가족 당 4-5명이라면 최소 4,5만 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 외에는 모두 흩어진 것입니다.

본문 1절의 “흩어지니라”란 말이 그 유명한 <디아스포라>라는 말입니다. 스데반 순교로 순식간에 1만 가정이 선교사가 되어 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흩여져서 그들이 한 일은 4절 말씀처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합니다.

이런 박해를 통한 선교를 도널드 맥가브란은 <하나님의 선교전략>이라고 말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스데반 한 사람의 순교로, 후에 사울이 나오게 되었고, 스데반의 순교로, 초대교회 모든 성도가 선교사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요한복음 12:24 말씀으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으시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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