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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gCGEb4TawVI
본문 사도행전 9장 10-22절
설교자 권오진목사
설교일 2017-08-20

사도행전 9:10-22 아나니아와 사울의 만남

 

엄마가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칩니다.

“엄마가 너에게 사탕 두 개를 주고, 아빠가 사탕 세 개를 줬어. 그럼 너는 지금 모두 몇 개 받았니?” “네 개요” 이렇게 답하면 엄마는 환장하게 됩니다.

“아니 아니지, 다시 잘 생각해봐, 엄마가 사탕 한 개를 주고, 아빠가 두 개를 줬어. 그러면 네 손에는 사탕이 몇 개 있지?” “두 개요”

시간이 갈수록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됩니다. 아이가 이런 식으로 대답하면, 가르치는 사람은 우스갯말처럼 머리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할 것입니다.

급기야 엄마는 극단의 방법을 택합니다.

너 이리와 오른쪽 손바닥을 펴— 해 놓고, 30cm자로 두 대를 때렸습니다.

그리고는 왼쪽 손바닥도 펴 해놓고, 한 대를 때립니다. 그리고는 “너 오른쪽 손바닥을 몇 대 맞았어? <두 대요> 그럼 왼쪽 손바닥에 몇 대 맞았어? <한 대요> 그럼 오늘 모두 몇 대 맞았어? 아이가 그제야 정답을 말합니다. <세 대 맞았어요!>

 

그렇습니다. 아이에게 산수 하나를 가르치는데도 이런, 저런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도록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엄마에게는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심으로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도 변화되었고, 사마리아도 변화되었고, 심지어 에티오피아로 내려가는 내시도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변화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변화는커녕 교회를 핍박하고, 제자들을 잡아들이는데 혈안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생각한 <사울>이라는 자였습니다.

당대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사울이 보았을 때 예수님은 가짜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 역시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메섹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잡아들이려고 다메섹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말씀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박해하느냐?”(4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절)

강력한 빛으로 임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육신의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똑똑하게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에 사울은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유다라는 사람의 작은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때부터 사흘 동안은 보지도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일에 생각한 내용입니다.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10절을 보십시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을 위하여 <아나니아>를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아나니아>하면, 이미 한 사람을 생각했었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바나바처럼 교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밭을 팔았지만 그 돈 전액을 드리지 못하고 숨겼다가, 성령님을 속인 죄로 같은 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죽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동명이인입니다. 아나니아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로 같습니다.

 

1. 아나니아는 어떤 인물인가? 알아보십시다.

1)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10절 “…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

오늘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에 교회 안에서 불렀던 호칭 세 가지 나옵니다.

10절- 제자 / 13절– 성도 / 17절– 형제 끝에서 부터 정리해 드리면

형제(17절) – 예수의 피로 하나 된 사람, 신앙으로 하나 된 사람

성도(13절) – 한쪽을 결별하고 다른 쪽과 교제 한다. 성도는 더러운 세상과 결별하 고, 거룩 하신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일컫 는다.

제자(10절) – 배운다. 스승을 배우는 자, 스승 되신 예수님을 배우는 자를 말합니다.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및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 다니시며 전도하실 때(마 15:21,; 16:13)부터 예수님을 믿고 다메섹으로 이주하였거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때 예루살렘에서 믿고 고향이 다메섹으로 돌아갔을 것으로 봅니다. 하여간 이미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0절에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예수님은 환상가운데 아나니아를 불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주의 종들이 환상을 볼 때는 잠을 자거나,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길을 가면서 생각을 하다가 경험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인물이 환상을 볼 때는 모두 기도할 때 경험하였습니다.

앞으로 생각할 사도행전 10장의 말씀도 보면 가이샤라에 있던 고넬료도 환상을 보고, 욥바에 있었던 베드로도 환상을 보았는데, 둘 다 기도하는 가운데 보았습니다.

 

<환상>이야기를 하면 저도 조금 할 말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도 환상을 본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87년에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신학교 입학한 후 첫 번째 기도제목이 <말씀의 눈이 열리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하나님! 말씀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열어주십시오>라는 기도제목으로 제 혼자 40일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40일이 다 되어갈 때 어느 새벽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간절히 <하나님! 말씀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하며 기도하는데 제 앞에, 영화관에 있는 대형 스크린 같은 큰 화면이 나타났습니다. 그 스크린에는 <눈이 먼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기도하며 자세히 보니 저 자신이었습니다.>

무릎 굻고 기도하는 제가 여기에 있고, 앞에 보이는 화면에는 영적인 눈이 먼 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감적으로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가 시작되었구나 생각하고 간절하게 <하나님! 말씀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하며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화면에 있는 저의 감겨진 눈이 서서히 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눈이 크게 떠지게 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환상을 통해 <주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새벽 환상보고 나서 기숙사에 돌아와 성경을 보는데, 이전에 보던 성경이 아니었습니다. 시편기자가 말씀한 것처럼 성경이 꿀과 송이 꿀처럼 달았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오전에 구약 20장,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신약 20장을 읽었습니다. 하루에 거의 4시간씩 매일 40장을 읽어나갔고, 이 생활이 군대생활에서도 연장되어서 군대 생활을 하면서도 성경 읽는 감격을 누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본문을 보면서 이런 신앙 공식 하나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말씀을 보아야 – 하나님이 음성이 들린다.

기도를 해야 – 환상을 볼 수 있다.

다 알고 있는 말씀 같지만, 뼈가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환상을 보고 응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쉽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요즈음 하나님의 음성이 잘 안 들려요!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어요!> 이런 분이 있다면 이유는 분명합니다. 말씀을 보지 않고 있고, 기도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말씀을 보아야 – 하나님이 음성이 들린다.

기도를 해야 – 환상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말씀생활 기도생활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3) 칭찬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아나니아 역시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정통 유대교도 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율법의 규정을 성실히 준수함으로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들었던 자였음을 봅니다.

‘칭찬 듣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평신도지도자 7명을 선택할 때 기준 중에도 <칭찬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혼자서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해도, 바르게 신앙생활 하지 못하는 분은 주위의 사람들이 칭찬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진짜로 신앙생활을 잘해서 칭찬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족들이 칭찬하고, 직장의 동료들이 칭찬을 합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칭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삐딱한 분들은 자신은 똑똑하다고 하는데 가족이나 주변의 사람들이나, 성도들이 칭찬은커녕 이상한 사람이라고 취급하는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중에 그런 분이 있다면 빨리 신앙생활을 수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칭찬을 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제자였고, 기도하는 자였고,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드디어 주님이 들어쓰시기 시작합니다.

11-12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다메섹 성읍 동문에서 서문으로 나 있는 직진 거리(직가)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지금 현재 기도하는 중인데 사울도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자신이 있는 집에 들어와 자신에게 안수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사울 역시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환상을 본 것입니다.

 

환상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가 대답을 합니다.

13-14절입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는 해를 끼쳤다 하더니 ◌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울이 다메섹에 왜 왔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잡아갈 사람 1순위에 누가 있었을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나니아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기도하는 사람, 칭찬 받는 사람이었던 아나니아는 체포 명단 1순위에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나니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을 포함하여 예수 믿는 자를 잡으려고 오는 자 사울의 정보를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예수님이 뜬금없이 사울에게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나니아는 사울이 이런, 이런 사람인데요.... 하면서 말합니다. 이 말을 하는 아나나아의 마음에 <주님 ...... 가고 싶지 않은데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나니아를 봐 주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15절에 아나니아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가라>, ‘가줄래, 부탁한다’가 아니라 <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이 나오는 15-16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지난주일 살펴본 말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절)했는데, 이를 자는 <아나니아>였고, 행할 것은 15-16절의 말씀의 내용입니다.

15-16절에 사울에게 주는 두 가지 사명이 나옵니다.

두 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15절의 “내 이름을”

16절의 “내 이름을 위하여”

바울의 받은 사명은 <내 이름, 주님의 이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전에는 자신의 이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자신은 빠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복음 자체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두 가지 사명을 받았습니다.

15절에 –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의 사명과

16절에 – 고난을 받아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로 통해서 전해준 이 두 가지 사명을 순교를 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감당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후 즉시 순종합니다.

17-19절을 보십시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가, 사울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사울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는데 사울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형제 사울아>라고 합니다. 사실 사울은 아나니아에게 형제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아나니아 에게는 사울은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었습니다.>그러니 있는 대로 표현하면 <원수 사울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당신도 나와 <예수의 피로 하나 된 사람 / 신앙으로 하나 된 사람>이란 의미로 <형제 사울아!>란 호칭을 사용합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자 사울은 성령 충만을 경험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니 삼일동안 보지 못했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이 떠진 사울은 아나니아의 집례로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세례에는 물세례, 성령세례가 있는데

어떤 성도는 물세례를 먼저 받고, 그 후에 성령 받는 자가 있고,

어떤 성도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시에 받는 자가 있고,

어떤 성도는 성령세례를 먼저 받고, 후에 물세례를 받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울의 경우는 성령세례를 먼저 받고, 후에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둘 다 받아야 합니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삼일동안 금식하다가 음식을 먹었더니 강건해졌다고 말씀합니다.

 

자, 그 다음에 우리가 보셔야 할 것은

성령세례, 물세례 받은 사울이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 보셔야 합니다.

19절 중반부터 22절까지 보십시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은 것이 예수님을 만나고 삼일 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일간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기간을 합쳐봐야 불과 일주일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지 한 주일 밖에 안 된 사울이 뭐를 했다고 합니까?

 

20절에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메섹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도 22절에 보면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제대로 만난 정상적인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님을 제대로 만났다면, 입에서 예수님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믿어보라고 전도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선포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입에서 예수, 예수, 예수님이 나옵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해서 우리의 입술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선포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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