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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TrWlSS3tJyk
본문 애니아와 도르가(행 9: 32-43)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9-03

사도행전 9:32-43 애니아와 도르가

 

사도행전은 28장까지 있습니다.

28장까지 내용을 둘로 나누면 1-12장까지와, 13-28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 이야기이고,

13장부터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선교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9장의 마지막 부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동안 생각한 말씀을 보면 주인공이 누군지 잘 모를 것입니다.

8장에는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와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 이야기가 나오고,

9장에는 핍박자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다가 고향 다소로

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행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빌립이야기, 사울이야기, 다시 베드로이야기를 정신없이 하고 있을까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금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이렇게 다양한 이방지역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으로 향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이 유대를 떠나 이방으로 간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서 사마리아, 다메섹, 룻다와 욥바에서도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 전파의 주역은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주역은 성령하나님이시고, 베드로와 사울, 빌립은 주님이 쓰시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주역은 항상 성령하나님이십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역할에만 충성하면 멋진 복음의 드라마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런 이해를 하신 다음, 본문의 내용을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32-35절을 다시 읽어보십시다.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32절에서 “그 때에”라는 말은 31절의 말씀을 받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주축으로 하는 교회들이 평안하고 든든해지며 교인들의 수가 많아졌을 때를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행 1:8)에 따라 순회전도를 위해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룻다에 와보니 이미 거기에는 성도들이 있었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룻다에 복음을 전했을까요? 두 사람을 추정 해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빌립이 전도자였다고 봅니다.

우리가 빌립에 대해 말씀을 살펴보면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 놀라운 영적인 현상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말씀대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8:39-4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성령 하나님이 빌립을 옮겨서 놓은 곳이 해안 도시 아소도인데, 아소도부터 올라가며 있는 도시가 <룻다, 욥바>입니다. 빌립이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 자신의 집이 있는 가이사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다에 성도가 있는 것은 빌립의 전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베드로가 전도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베드로가 전도했다고 보는 이유는?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파송합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에 내려와서 성도들에게 안수하면서 기도하였더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데 돌아가는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8: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룻다에 와서 복음을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자, 중요한 것은 빌립이 전도했건, 베드로가 전도했건 이미 룻다에는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복음의 확장성>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성령의 불이 붙었습니다.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자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박해를 합니다. 성령의 불을 끄려고 핍박의 막대기로 내리칩니다. 그런데 이를 어쩝니까?

산에 불이 붙었을 때, 강풍이 불어오고, 불을 끄려고 소나무 가지로 내리치면 오히려 불이 더 크게 옆으로 번지는 것처럼, 지금 예루살렘에 붙은 복음의 불도 핍박을 통해서 더 확장되어서 사마리아로, 다메섹으로, 룻다와 욥바 지역으로 급속도로 번지게 된 것입니다.

 

그럼 룻다에서 베드로가 한 사역의 내용을 살펴보십시다.

룻다에 전도하고, 심방하려고 간 베드로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애니아> 이름 뜻은 “찬양하다 또는 칭찬받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애니아가 <중풍병으로 침대 위에 누운 지 8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의사였기에, 정확한 병명과 병을 앓던 햇수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혹시 중풍병에 걸려서 고생하신 분이 계십니까? 얼마나 환자 본인이 힘든지, 가족이 힘든지 경험해 보면 알게 되지 않습니까? 성도들을 가끔 만나면 “우리 부모님, 혹은 배우자가 중풍병으로 몇 년 누워있었습니다”라고 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 말씀 자체가 너무 힘든 기간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룻다에 있던 <애니아>는 팔 년이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일반적인 중풍병 환자처럼 몸이 움직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음도 무기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니아에게 베드로는 예상치 못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34절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이 말씀에서 몇 가지 주의하면서 관찰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첫째, 애니아를 낫게 하신 분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점입니다.

베드로가 분명히 말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애니아를 고쳐주신다는 성령의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음성을 들었는지, 아니면 환상을 보았는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애니아를 보는 순간,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신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중풍병자를 보면서 ‘네가 좀 나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낫게 하신다고 확신이 왔을 때, 그 사실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명령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기록된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예수님께서 오늘 내게 해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셋째, 애니아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곧 일어났다”고 합니다.

 

에니아가 일어나는 장면을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하나가 생각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안에 있는 베데스다 못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낫는다는 믿었기에 거기에는 많은 환자가 있었습니다. 환자 중에는 38년 된 환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환자에게 선포합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그러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 5:9)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그리스도의 능력이고,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앉은뱅이도 고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8년 동안 중풍병에 걸려 무기력한 애니아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도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런 역사가 우리교회 안에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는 자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이 무기력한 자들이 활력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온전히만 믿으면 이런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애니아가 고침을 받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35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룻다는 물론이요 사론 평야에 사는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부터는 장소를 옮겨 욥바에 있던 <도르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도르가를 소개하고 있는 36절을 함께 보십시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도르가가 살았던 곳은 – 욥바였습니다.

다비다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도르가는 헬라식 이름으로 뜻은 <노루 같은 여성>이란 뜻입니다.

도르가를 <여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으로서 도르가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서 주의 일을 한 신실한 주님의 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하는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도르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참 신앙인다운 <선행과 구제의> 삶을 살았던 여인이라는 말입니다.

 

지난 목요일 인도네시아에 인편으로 보낼 건축헌금 21,400불을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은 CBS라디오에서 나오는 김서택 목사의 짧은 메시지가 아직까지 생각납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학사보다 놓은 것은 석사입니다. 석사보다 놓은 것은 박사입니다. 박사 보다 높은 곳은 밥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려운 이웃을 보면 따뜻한 밥을 한 그릇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도르가>가 생각났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가 믿음이 좋습니까? 물으면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밥을 많이 사는 사람입니다.>

구역식구에게 밥을 많이 사는 분, 전도회나 선교회 회원에게 밥을 많이 사는 분, 어려운 이웃에게 밥을 많이 사는 분, 그 분이 믿음이 좋은 분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이야기하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믿음이 좋은 분입니다. 좋은 교회도 <선행과 구제>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도 이 부분에 더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였고,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도르가>가 죽었습니다.

37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평범한 사실 하나와, 평범하지 못한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1. <평범한 사실>은 – 세상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착한 사람도 죽고, 악한 사람도 죽습니다. 배운 사람도 죽고, 배우지 못한 사람도 죽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죽고, 안 믿는 자들도 죽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본문에 그렇게 훌륭한 도르가도 병들어 죽었습니다.

죽음이란 이렇게 누구에게든지 한 번씩 공평하게 찾아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만약 오늘 여러분이 죽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어떻게 맞느냐가 그 인생을 결정합니다. 죽음에서 승리한 사람은 모든 것에 승리한 사람입니다.

 

2. <평범하지 않는 사실>은 –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었으면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히고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데, 지금 도르가가 죽었는데 사람들이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다락에 눕혀 놓았다는 것입니다. 장례식을 보류했다는 말입니다. 이대로는 도르가를 보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여놓고는 38절에 사람을 보내어서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간절한 마음으로 초청합니다.> 베드로가 룻다에서 애니라를 고쳤다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욥바에서 룻다까지 거리는 18km 거리입니다. 쉬지 않고 걷는다고 해도 가는데 3시간 이상 걸립니다. 왕복하면 6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욥바에 있는 도르가의 집까지 왔습니다.

와 보았더니 39절과 같은 현상이 벌여졌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 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지 않습니까? <도르가의 죽음 앞에> 도르가의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이 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여러분이 만약 세상을 떠난다면 여러분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면서 울어 줄 사람이 몇 명 정도 되십니까?

<이 분은 아직 더 사셔야 할 분인데! 너무나 훌륭한 분인데! 이 분의 영향을 받아서 내가 오늘 이렇게 되었는데! 하면서> 진심으로 울어줄 사람이 있습니까?

 

본문은 도르가의 죽음 앞에서 우는 사람을 소개하고, 그가 생전에 선행과 구제했던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정 믿음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본 베드로는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감격한 베드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40절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는 다락방에서 울고 있던 과부를 다 밖으로 보냅니다.

그리고는 죽은 도르가와 베드로 둘만 남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기도하는데 <도르가를 보고 기도합니까? 도르가를 등 뒤에 두고 기도합니까?> <돌이켜>라는 말은 보면 답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지금 도르가를 등 뒤에 두고 기도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하거나, 시신을 보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비다의 시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등 뒤에 시신을 두고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께 매달렸다는 말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기도를 마친 후에 베드로는 돌이켜서 시체인 도르가에게 명령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여러분! 이와 비슷한 말씀을 어디에서 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12살 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손을 잡고 한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굼” 했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막 5:41)는 말입니다.

원래 달리다굼이란 말은 <반드시 죽음과 부활을 전제할 때 쓰이는 아주 독특한 용 법의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죽은 도르가에게 <달리다굼>한 것입니다. 그러자 죽었던 도르가가 눈을 뜹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앉습니다. 놀라운 장면 아닙니까? 죽은 도르가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룻다의 애니아 치유사건, 욥바의 도르가 소생사건은 결론이 갖습니다.

룻다에서의 애니아 치유사건 결론은 35절에 나옵니다.

35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욥바에서의 도르가 소생사건이 결론은 42절에 나옵니다.

42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두 사건 모두 예수님이 행하시는 역사를 보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의 역사가 우리교회에서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고 믿는 자가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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