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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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오진목사
설교일 2월 14일
누가복음 10:17-24 사순절은 주님을 만날 골든타임입니다.

얼마 전,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쓰신 【주의 음성】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안내하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 앞부분에는 목사님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을 써놓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은 매일 점심시간 전에 반 아이들에게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귀 기울여 잘 들었다고 합니다. 재미가 있었기 보다는 잘 들으면 빨리 마치고 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사무엘상 3장에 나오는 사무엘과 엘리제사장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나,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엘리제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엘리제사장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물었습니다. 세 번이나 똑 같이 <부르셨습니까?> 말하자 엘리제사장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알고, 또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여호와여 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라고 알려주었고, 네 번째 하나님이 사무엘 부르실 때 그렇게 대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에게 충격을 주는 예언을 듣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성경이야기는 끝 날 무렵,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도 울렸습니다.
아이들은 교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빌 하이벨스는 책상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선생님이 읽어주신 성경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다 나가고 선생님과 빌 하이벨스 단 둘이 남았을 때, 빌 하이벨스는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에게로 오는 빌 하이벨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니 빌리?”
빌 하이벨스가 이제 선생님에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아직도 어린 소년들에게 말씀하시나요?”
그때 선생님은 안도의 한숨과 미소를 지으시면서, 두 손으로 빌 하이벨스의 작은 어개를 잡으시고 눈을 응시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빌리, 말씀하시지. 만일 네가 귀 기울여 듣는다면, 하나님이 네게도 말씀하실 거야, 확신한단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손에 쥐어주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빌 하이벨스에게 준 종이에는 시 한 편이 쓰여 있었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오, 사무엘의 귀를 주소서
오 주님, 열린 귀를 주소서
주님의 속삭임을 민첩하게 알아듣게 하소서.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고,
주님께 순종하게 하소서.

이 시를 받은 빌 하이벨스는 그날 시를 암송하게 되었고,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이 시를 읽어보았느냐? 물었을 때 그 시를 당당하게 암송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시를 암송한 그에게 “빌리,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것에 계속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너를 쓰임 받게 하실 것을 확신한단다.” 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이 경험 이후, 빌 하이벨스는 평생토록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무엘을 부르셨던 하나님, 빌 하이벨스를 부르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고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잘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런 분이라면 오늘 말씀에 집중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누가복음 10장은 예수님이 70인 제자를 따로 세워 세상으로 파송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1-2절의 말씀은 이렇게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이 말씀에서 1절을 시작하는 “그 후에”라는 말은,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작정하신 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를 세워 파송하신 것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방문하실 마을에 선발대로 보내신 것과 같습니다.

엄밀해 말해서 2절 하반 절에 말씀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라고 요청하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추수할 현장을 다니면서 스스로 추수할 일꾼임을 깨닫고 결단하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이렇게 70인 전도대를 파송하고 난 후, 일정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들이 돌아와서 선교 보고를 합니다. 그 선교보고 내용이 오늘 본문 17절에 나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본문에서도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지금 제자들은 선교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귀신이 쫓겨 나가는 가시적인 현상을 보았으니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저는 본문의 70인 전도대의 감격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몇 번 간증을 해 드렸습니다만, 제가 신학교 2학년 때 교육전도사로 1년차로 여름수련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대구 백안기도원에서 2박 3일 하는데 첫째 날 학생회 회장이 이상해졌습니다. 집회를 하는데 <주여!, 주여!> 하면서 예배에 방해를 놓았습니다.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자 교육전도사인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로님, 권사님도 계셨지만 비록 교육전도사 1년차이지만 영적지도자가 저였기에 저는 그 학생을 놓고,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기도제목은 <이 아이를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지 않으면 저는 목회자 될 자격이 없는 줄 알고 그만 두겠습니다.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면서 떼를 쓰는 기도를 2시간 정도 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지금 목회를 하고 있으니 답이 나오지요? 그 아이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두 시간 동안 통성으로 기도해서 목이 쉬어서 말을 잘 못했지만, 그 뒤로는 학생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를 보고 자기들끼리 은혜가 되어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해서 그 어떤 수련회보다 은혜 충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때로는 이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눈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고, 그 것을 증거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신앙생활이란 칭얼거리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령관 앞에 보고하는 병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전장에서 적과 어떻게 싸웠는지, 그래서 어떻게 승리했으며 어떤 부분에 상대방이 약점을 드러내었는지 상세하게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그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의 모습이 참된 신앙인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70인 전도대의 보고는 멋진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받은 예수님의 반응은 어찌 영 시원치 않습니다. 어찌 보면 시큰둥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18-19절에 나온 예수님의 반응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하던 순간을 경험한 그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십니다. 그들이 정말 기뻐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작은 승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면서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여기 이 말씀에서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셨다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신 그 일을 통하여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그것보다는 너희들이 하나님께 용납된 존재, 하늘 생명책에 너희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아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은, 어떤 일을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죄인이었다. 그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셨고,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무덤에 뭍이신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 고로, 나는 이제 예수님을 믿기에 의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이제 나는 사탄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렇게 신앙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바로 알기만 하면,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70인 전도대에게 말씀하시는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기쁨은 <그저 귀신이 쫓겨나고 항복하는 그런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었던 너희들, 영원히 죽었던 너희들이.... 내 제자가 되었고, 너희들의 이름이 천국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토도 달 필요가 없이 명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기쁨은 가시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가시적인 현상이 나타났을 때 기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기뻐하고, 자녀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면 기뻐하고, 건강을 회복하여 퇴원하면 기뻐하고, 많은 돈을 벌면 기뻐하고, 승진을 하면 기뻐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기뻐하는 것 .. 등등> 이런 사유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가 같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쁨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어야 합니다.”
유명한 믿음의 선배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사도바울부터 오늘 우리까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내가 구원받은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알 작시한 존 뉴턴이 그 감격을 잘 묘사했습니다. 얼마 전 프리덤이란 영화를 통해서 존 뉴턴의 삶을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감격하는 마음으로 한 번 불러 보십시다.
1.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 나처음 믿은 그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 님의 은혜라 / 또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 님의 은혜로 /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찬양 하리라.
아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참으로 기뻐해야 할 것을 알려주신 후에, 기도의 자리로 옮겨가십니다.
21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이 드린 기도를 보면 두 그룹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한 그룹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엄밀히 다시 말하면 <지혜롭고 슬기 있다 하는 자들> 또 한 그룹은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을 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을까? 오히려 그 반대여야 맞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는 이 말씀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아마 예수님의 기도를 곁에서 들은 사람은 그들이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누구인지 순식간에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기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미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비록 부족한 것투성이 이지만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그 사랑의 은혜에 속하는 사랍니다.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그 아들로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마무리 하는 말씀을 합니다.
23절입니다.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을 보는 눈은 보이 있도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항복하는 것을 보는 것도 큰 복이지만, 주님 말씀대로 행하는 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복입니다.

21-22절의 짧은 구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5번, 아들이라는 단어를 3번이나 사용하시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역의 열매보다 더 큰 기쁨은 하나님께 우리가 받아들여졌고, 그분과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3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1) 우리에게는 주님의 이름을 귀신을 항복하게 하는 권능이 주어져 있다.
2) 우리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
3)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복을(예수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고, 귀로 말씀을 듣는 복) 우리가 기억하고 누리고 살아 갈 때, 우리는 제자 들과 같은 승리를 만끽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고,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설교제목은 <사순절은 하나님을 만날 골든타임입니다.>라고 정했습니다. 설교제목에서 단어정리를 두 가지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골든타임>이란 말입니다.
골든타임(Golden Time)이란 말 그대로 <황금과 같은 시간>을 말합니다. 긴박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인명을 구조할 수 있는 초반의 시간을 골든타임이라고 합니다.
심장이 멈췄을 때 심폐소생술을 하는 골든타임은 4분이라고 합니다.
비행기에서 비상상황이 일어났을 때, 승객들은 90초가 탈출할 골든타임이라고 합니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에는 72시간이 골든타임입니다.

그 다음 단어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 간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의 삶을 생각하며 근신하고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자, 그럼 <사순절은 주님을 만날 골든타임입니다.>라는 말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깨닫는 기간입니다.
문제는 오늘 성도들의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처럼, 사무엘 당시 엘리제사장처럼 <하나님을 알기는 아는데 .. 정작 하나님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도 사무엘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귀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귀를 열어서 주님의 음성을 민첩하게 알아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주님의 마음을 바로 느끼게 되기를 원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40일 특새가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특새에 참석하지 못하는 성도님들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음성을 들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순절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사순절기간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에서 나오는 기쁨과 소망으로 넘쳐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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