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2016.08.22 00:00

소명의 사람(렘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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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8월 21일
예레미야 1:4-10 소명의 사람

지난 한 주간 휴가기간을 보내면서 몇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금년 7월에 발간된 조정래 씨가 쓴 【풀꽃도 꽃이다】1, 2권입니다. 태백산맥, 아리랑의 저자로 유명한 조정래 작가는, 이 책에서 지금 우리나라의 사교육 시장이 연간 40조가 넘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이 문제는 정부의 책임이고, 교육계의 책임이고, 사회의 책임이고, 학부모의 책임이기에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책임을 지고 해결해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몇 년에 걸쳐서 조사를 한 것을 바탕으로 한국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 책입니다.
자녀를 둔 부모님, 교편을 잡고 있는 선생님이라면 꼭 한 번 읽으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책의 주인공은 강교민 선생님입니다.
강교민 선생님은 진짜 선생님다운 선생님입니다.
학교 교장이나 교감에게 굴복당하지도 않고, 학부모에게 쩔쩔 매지도 않으며 오로지 학생들의 바른 길로 지도하는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물론 가상의 인물이지요. 저자는 책 서문에 주인공 ‘강교민’ 선생을 소개하고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주인공 ‘강교민’이란 이름은 무슨 뜻의 줄임 말일까요?> 하면서 독자들에게 퀴즈를 냅니다.
1, 2권을 모두 읽어도 ‘강교민’이란 이름의 뜻을 저자는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저 독자로 통해서 궁금해 하도록 합니다. 강교민이란 이름의 뜻은 저자가 직접 인터뷰를 하면서 소개하기에 인터뷰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강교민’의 뜻은 <강력한 교육 민주화>를 줄인 말입니다.
문제 많은 한국교육 현실에 <강력한 교육 민주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저자의 마음을 ‘강교민’이란 이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주인공 <강교민>선생의 삶을 통해서 <소명의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라도 바른 소명을 회복한다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았습니다.
소명(召命)이란 ‘어떤 일을 하도록 부르는 명령’을 뜻합니다.
원래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명령이 소명이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일을 하도록 부른 자가 있습니다. 교사, 공무원, 군인은 국가가 불렀습니다. 회사원이나 직장인은 사장이나 회장이 자신들을 불렀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지 ‘소명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도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소명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내적 소명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단계를 소개하면, 소명으로부터 시작하여 – 중생 – 회심 – 의인 – 양자됨을 거쳐 = 성화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 8:30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합니다.
이 말씀에는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사다리가 부르심(소명)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부르심이 곧 내적 소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으로 향하는 첫 번째 역, 첫발을 딛는 사다리, 곧 출발점이 되는 소명을 경험합니다.
소명을 받을 때 특별한 환상이나 이적이 없을 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가 받은 명령입니다.

둘째, 외적 소명입니다.
외적 소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부르시는 소명을 말합니다. 저에게는 목사임직이 외적인 소명이고, 여러분에게는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 교사 등이 외적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받은 소명을 소개합니다.
예레미야가 받은 소명 안에는 내적인 소명, 외적인 소명이 다 들어있습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 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의 해당자가 예레미야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라고 생각하고 이 말씀을 한 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를 모태에 짓기 전에 나를 이미 알았고,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성별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5:16에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하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내가 교회에 첫발을 디딜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나를 아셨고, 내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셨고, 항상 주님의 품에 보호하여 주셨다가 ....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에 — 나를 하나님의 전에 나오게 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예레미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말씀을 들은 예레미야는 전혀 생뚱맞은 반응을 하나님께 보입니다.
6절에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 저를 보십시오.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여기에서 유의할 단어는 <아이>라는 말입니다. <아이>라는 히브리어는 <나아르>라는 단어인데, 영아로부터 결혼기의 청년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이때 예레미야의 나이는 최소 17살부터 많으면 20대 초반 정도였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의미는 <연령적으로 어리다는 말이 아니라, 선지자 직을 감당하기에 아직은 부족하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7-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 하나님이 가라는 데로 가고, 하나님이 말하라는 대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곁에서 너를 지켜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는 9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 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내 입에 두었노라” 하셨습니다.
<신성한 어루만짐>이 있었습니다. <신성한 어루만짐>을 신학적인 용어로 “디바인 터치”(divine touch)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부르시면서, 그의 입술로 통해서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의 사역자가 되게 하도록 만져주시는데 <하나님의 손을 내 밀어서 예레미야의 입에 터치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신 하나님은, 그로부터 백 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에도 이와 유사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5) 라고 탄식하자, 하나님을 모시고 선, 스랍, 곧 천사 하나가 제단의 숯불을 가지고 날아와 이사야의 입술에 대면서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 하시며, 죄 사함을 선언에 주셨습니다. 이제 깨끗해진 입술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신성한 어루만짐>, 디바인 터치”(divine touch)를 경험한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는 신성한 어루만짐 대신,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모세가 소명을 사양하면서 이유로 삼은 것도 입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4:10 “...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와 같은 모세의 변명에 답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과 늘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며, 말 잘 하는 형 아론이 그 입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 이사야, 모세도 소명의 순간 모두 입을 변명거리로 삼았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각자에게 소명을 주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명은 10절에 나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는 – 남 유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열방을 위한 예언자로 임명되었고,
하는 사역으로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서 4가지 사역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사역을 하고 ///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2가지 사역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합니다.>
즉 전반적인 사역이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같은 동시대에 살아도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어르신들과, 6.25를 경험한 어르신들과,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에 태어난 청년들과는 고생이야기를 하면 말이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예언하는 자라도 예언한 시대적인 배경이 어떨 때인가? 하는 것에 따라서 고생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예언했던 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도 백성들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서 52장, 예레미야애가 5장 = 총 57장의 예레미야가 기록한 말씀을 보면, 그가 얼마나 힘든 사역을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 예레미야는 결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행복마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포기해야 했으며,
-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배척 받는 깊은 고독과 고립을 견뎌야 했습니다.
-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했다고, 성전의 유사장에 의해서 매를 맞고, 감금, 투옥 되었습니다.
- 수많은 비난과 음해를 받았습니다.
-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강제로 끌려가, 동료 백성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명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소명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소명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소명에는 내적 소명, 외적 소명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내적인 소명은 각자 다르기에 접어두고, 외적인 소명부분만 생각해 보십시다.
외적인 소명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개인적인 외적 소명과 전체적인 외적 소명입니다.
1) 개인적인 외적 소명 – 우리가 받은 직분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의 소명이 있었고,
예레미야가 예언자의 소명이 있었고,
바울이 사도의 소명이 있었듯이,
저와 여러분이 받은 직분이 분명한 소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소명에 충실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세요. 목사인 저는 소명을 다하는 목사인지, 장로님들은 장로의 소명을 다하고 있는지, 안수집사, 권사는 안수집사, 권사로 소명을 다하고 있는지, 서리집사 교사, 찬양대원으로서 소명을 다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소명의식의 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와 중직자는 모두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어루만짐>“디바인 터치”(divine touch)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져주신 것은 아니지만, 주의 종의 손을 통해서 안수를 받아서 직분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직분을 받을 때는 ‘나는 부족합니다’ 라는 겸손이 있고, 열정을 다하겠다고 하는 다짐도 있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그것을 잃어버리고 소명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40년을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41년 이상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순교할 때까지 59년 정도 섬겼습니다.
사도바울도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33년을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직분의 소명을 받고 지금 얼마쯤 되셨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충성하고 계십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 맡기신 개인적인 직분의 소명에 다시 충성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2) 전체적인 외적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 지상명령(至上命令)이지요. 마태복음 28:18-20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전도와 제자화>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받은 소명입니다. 문제는 전도하는 일에 모두가 게을러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유는 옛날보다 전도가 힘들어진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전도와 제자화>를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이기에 전도하는 일에 다시 힘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19세기 위대한 시인, 사상가, 목사인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년 5월 25일 ∼ 1882년 4월 27일)이란 분의 잠언 하나와 시 한 편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에머슨은 7대를 성직자(聖職者)로 이어온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단한 집안이지요.
8살 때 에머슨은 아버지를 여의고, 고학으로 하버드 대학(신학부)를 졸업했습니다. 1829년 보스턴 제 2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나, 아내의 죽음과 교인들의 불화 등으로 인하여 목사직을 그만 두고 그 이후로는 강연 활동을 주로 한 분입니다.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靈感)을 주고 정신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우리나라 명사들이 에머슨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직까지 알려지고 있습니다.

7막 7장의 저자이고, 전 국회의원었던 홍정욱씨는 에머슨의 잠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입니다.
<길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지 말라.
대신 길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 너의 발자취를 남겨라.>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나, 많은 분들은 에머슨이 쓴 시 한 편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시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제가 잘 낭송하지는 잘 하지는 못하지만 낭송해 보겠습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지성인들에게 존경받고, 아이들로부터 호의를 얻는 것
정직한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분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아이를 낳든, 한 뙈기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러한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멋진 시입니다. 에머슨은 성공을 특별한 것에 두지 않고,
무엇을 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명의 사람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내가 섬기는 교회, 내가 사는 지역, 내가 사는 나라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난다면 그 사람은 신앙인으로 성공한 사람이고, 소명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내적 소명, 외적소명을 분명히 확인하셔서 받은 소명으로 구원 받음의 단계를 뛰어 넘어,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교회와 이 나라가 더욱 좋은 곳이 되도록 만들어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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