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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myfIIRKAIjs
본문 마태복음 3:1-12
설교자 권오진목사
설교일 2016-12-04

마태복음 3:1-12 영광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준비하라

 

삼국지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17살 된 유비가 쌀쌀한 겨울날, 길을 나섰습니다. 이제 개울 하나만 건너면 고향인데 아무리 둘러봐도 배가 없었습니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개울을 맨몸으로 건넜습니다. 그런데 개울을 다 건널 무렵, 뒤쪽에서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젊은이 ! 나도 좀 데려가 주게, 물길을 건널 수가 없네!”

 

유비는 행색이 초라한 노인이 안쓰러워 찬 물살을 가르며 노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노인을 업고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강기슭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노인은 갑자기 건너편에 보따리를 두고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비가 "제가 혼자 가서 보따리를 가져오겠습니다." 하는데 노인은 한사코 본인이 직접 가야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유비가 고민 끝에 노인을 다시 업고 개울을 건너갔다가 보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이제 상황이 종료되고 떠나려는 유비에게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습니다. “처음에 나를 업고 개울을 건넌 것이야 어절 수 없지만, 보따리를 찾으러 가겠다고 했을 때, 불평한마디 하지 않고 도와준 이유가 뭔가?” 노인의 질문에 유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중간에 포기하면 그전에 했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은 나지막한 소리로 한마디 조언을 덧붙여 말했습니다.

“앞선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 위해 정진할 때는 결코 남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네” 현명한 유비가 노인에 “그래서 저 자신도 노력한 것을 잊기 위해 항상 노력합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행한 것과 이룬 것에 대한 집착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잊어버릴 수 있을 때, 인정받고 칭찬받고자 하는 욕심까지 잊어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바로 설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더테레사 수녀는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오, 주님

나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존경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사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칭찬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로워지려는 욕망으로부터

찬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선택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조언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기를 끌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모멸 받는 두려움으로부터

경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질책당하는 고통의 두려움으로부터

비방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잊히는 두려움으로부터

오류를 범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우스꽝스러워지는 두려움으로부터

의심받는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1. 세례요한 소개

오늘 말씀에 보면 유비에게 조언 노인의 말씀처럼, 마더테레사 수녀의 기도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을 소개합니다.

히브리어로 ‘요하난’, 헬라어로 ‘요한’입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요한이 성경에 여러 명 나오기에 성경 기자는 그의 사역의 특징을 살려<세례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요한은 짱짱한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이고, 어머니는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이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유대지방에 흩어져 있는 제사장만 대략 2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세례요한도 당시 이스라엘을 주름 잡고 살았던 사두개인, 바리새인, 제사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편하게 살려고만 마음먹었으면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후손이기에 당연히 구원받을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랍비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없다”로 기록해 놓았기에 유대인들은 구원받는다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일반 유대인들이 이런 생각을 했으니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말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들은 선민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 사랑받고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생기를 잃어버린 관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배는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백까지 율법의 조항들을 읊조렸지만 그 안에 생명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세례요한은 그들과 함께 머물고, 그들과 함께 웃으면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광야를 생활의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누가복음 1:80에 보면 세례요한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지금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삶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세례요한이 예언자로 이스라엘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세례요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세례요한은 당시 부패하고 썩은 기득권층에 속하기를 스스로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한이 처음에는 사해 윗부분 서쪽에 위치한 쿰란공동체 일원이었다가 나중에 독립해 나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추정을 해 볼 수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만 추구하는 곳>입니다.

 

2. 세례요한의 모습과 먹은 음식

조금 더 나아가 세례요한의 모습을 살펴보십시다.

4절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 이었더라.”

세례요한은 낙타털을 가공하지 않은 채 거칠고 뻣뻣한 가죽 그대로 옷을 해 입었었고, 가죽 띠로 허리를 매고 있었습니다.

구약에도 세례요한처럼 옷을 입고 다닌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누구인지 아십니까? 엘리야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1:8 “.. 그는 털이 많은(다른 번역 : 털옷 입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세례요한의 모습은 구약시대의 엘리야선지자의 재현된 모습과 같았습니다.

 

세례요한이 먹은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는데,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입니다. 메뚜기의 경우에는 오늘날까지 베드윈족들도 먹고 있는데 메뚜기를 소금에 절여 말렸다가 버터나 야생 꿀에 발라 먹습니다.

 

이렇게 세례요한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생활과는 극과 극의 모습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만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3. 세례요한의 사역

자 그럼, 세례요한의 본질적인 부분인 사역부분을 살펴보십시다.

세례요한이 사역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영적인 암흑기의 종말을 고하고 예수님이 사역할 수 있도록 사역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전환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몇 가지 중점적인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첫째,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마음을 바꾼다. / 새 행실(삶)로 돌아온다. /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사실 ‘회개하라’는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당시 유대인들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책임 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신앙 가운데 불신과 온갖 죄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기독교인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생각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으니 천국을 간다.” 고 생각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우리가 대단한 척하고, 세상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전체를 펴놓고 볼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천국 가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자답게 사는가?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행함>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18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면 ‘나는 믿는 자답게 사는가?’ 물었을 때 분명하게 우리도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대답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 당시 사두개인, 바리새인을 보세요. 겉으로는 얼마나 번지르르 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기도도 많이 했고, 잘 했습니까? 예배생활을 얼마나 잘 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고,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례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라 / 새 행실(삶)로 돌아오라 /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돌아오라>고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세례요한은 삶이 되지 않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후에 예수님이 신랄하게 꾸짖고 저주를 퍼부었던 것처럼 꾸짖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대림절 기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들어 한국교회를 바라보고, 목회자를 바라보고, 중직자를 바라보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대림절 기간만큼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보기를 바랍니다. 세례요한이 오늘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뭐라고 할까? 나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회개하라”는 말씀을 나에게 선포하는 말씀으로 들이시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 새 행실(삶)로 돌아오고 /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천국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천국이라고 말할 때에 <통치권>의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내 마음은 천국입니다.

우리 가정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우리 가정은 천국입니다.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우리 교회는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외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은, 그 동안은 하나님의 통치가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이래로 하늘에서 그가 만든 우주 만물을 통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무슨 의미입니까?

잘 들으십시오. 세례요한이 말씀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은
<천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가, 바야흐로 지상에 그대로 확장되려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메시야의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지상통치가 실현될 것이고, 세례요한은 바로 그분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세례요한이 소개한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 비교

세례요한이 소개한 자신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해 보십시다.

본문 11절을 메시지 역으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이 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너희의 옛 삶을 바꾸어 천국의 삶을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너희 안에 천국의 삶을, 너희 안에 불을, 너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너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에 비하면 나는 잔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분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세례요한이 스스로 하는 말과 달랐습니다. 마태복음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하면서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통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세례요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세례요한은 스스로를 평가하기를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드는 것조차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겸손하게 말씀합니다. 사실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세례요한의 사역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과 그 길로 오시는 왕과는 비교할 수 없듯이 분명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요한이 위대함을 그의 말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당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호의호식하지 않았습니다. 낙타 털 옷을 입었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분명 그 시대의 사람들과는 구별된 진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의 겸손함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말하면서 세 가지로 정리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 너희 안에 천국의 삶을 살게 한다.

예수님은 – 너희 안에 성령의 불을 발화시킨다.

예수님은 – 너희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세례요한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마음에 천국을 회복했고, 성령의 불을 경험했고, 삶이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으로 바꿔졌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세례요한의 말씀처럼 변화되어 있어야 정상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내가 진짜 주님을 영접하였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례요한과 같은 겸손함이 있는지도 확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자 그럼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해 보십시다.

오늘 설교제목은 <영광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준비하라>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는 오늘 우리들이 세례요한 사역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겉모습만 번지르르 하는 성도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원초적인 모습에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 회개하라

- 천국이 가까이 왔다.

- 예수님의 사역을 알고, 그 역사가 나에게 나타나는지 확인하라.

- 세례요한과 같은 겸손함이 있는가? 확인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면서 그 나라에 들어갈 <합당한 삶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은 짧게는 수개월부터, 길게는 수 십 년 주님을 섬겨왔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열정도 있었고, 순수함도 있었습니다. 충성스럽게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뒤에는 헌신의 흔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해방시켜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다시 순수한 마음으로, 세례요한의 마음으로, 세례요한의 선포한 말씀처럼 살아서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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