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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yMw20q3viwI
본문 마가복음 7:24-30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05-14

마가복음 7:24-3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

 

오래전(22년 전)에 삼성생명에서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업광고를 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소개해드리면 기억나실 것입니다.

스물 하나 - 당신은 고개를 두 개 넘어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씨 댁의

큰 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스물여섯 - 시집온 지 오 년 만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당신은 그제야 시댁 어른들한테 며느리 대접을 받았습니다.

서른 둘 - 자식이 밤늦게 급체를 앓았습니다. 당신은 자식을 업고 읍내 병원까지 밤길 이십 리를 달렸습니다.

마흔 -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당신은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자식의 외투를 입고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당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외투를 입혀주었습니다.

쉰 둘 - 자식이 결혼할 여자라고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은 분칠 한 얼굴이 싫었지만 자식이 좋다니까 당신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순 - 환갑이라고 자식이 모처럼 돈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자식의 보약을 지었습니다.

예순 다섯 - 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깊게 주름진 얼굴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아 예배하시려고 오신 여러분은 지난 주중에 어머니의 얼굴을 뵙고 오셨습니까? 멀리 떨어져 계신다면 전화로 목소리 한 번 듣고 오셨습니까? 아니 이미 하나님 나라에 가셨다면 그 사랑스런 음성과 자애롭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려 보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어떤 여인이 예수님에게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려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상황이나 처지를 감안할 때 이 여인의 행동은 거의 막무가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의와 도리로 본다면 대단히 무례한 짓이었고, 결코 아름다운 모습도 아름다운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지금 휴식과 기도의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까지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밤에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 게네사렛 땅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수없이 많은 병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변함없이 그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는 중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논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고 물을 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다”라고 대답하면 정확한 답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십니다.

우리가 과로를 하고,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쉼이 필요하듯이, 예수님도 쉼이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지금 ‘나에게 쉼이 필요하구나? 내가 기도로 영적인 충전을 해야 겠구나’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쉼이 필요하고, 새로운 훈련을 위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역의 중심지인 <가버나움>을 떠나 당시 외국 땅이었던 <두로>지방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두로는 지금 지명은 레바논의 ‘튀레’ 라는 도시입니다.

 

예수님 당시 두로는, 해상무역 항구로서 북쪽에 위치한 시돈과 더불어 꽤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이방으로 전해져야 할 것을 미리 알려주시려는 듯 이방 땅 두로의 어떤 집에 가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24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예수님이 가신 그 집이 유대인의 집이었는지, 이방인의 집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짐작하건데 예수를 알고 공경한 사람의 집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모셔 들였겠지요.

 

확실한 사실은 예수님이 그곳 두로 에서도 편히 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미 갈릴리는 물론이요 이방지역까지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두로에 오신 것을 알고 두로 사람들도 알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본문은 대표적인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25-26절을 보십시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이 말씀에 나오는 여인을 살펴보면

- 이 여인은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귀신들린 사람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여고 3학년이 수능시험을 치고 집에 와서 귀신들림으로 고통당하는 것도 보았고, 무당이 딸에게 내림굿을 하라고 하는데, 자신의 딸 만큼은 자신처럼 무당을 못 시키겠다고 무당이 새벽기도부터 나와 귀신과 싸워서 결국은 믿음으로 승리한 분도 보았습니다. 예배시간에 설교를 방해하는 귀신들린 처녀도 보았고, 수 년 동안 귀신들려 방에 처박혀서 마귀처럼 변한 처녀도 본 적이 있습니다.

본문에 말하는 더러운 귀신 들린 딸,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딸이 귀신 들리지 않았다면> 예수님 앞에 나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도 젊었고,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했다면,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주님을 찾지 않았을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 어쩔 수 없게 되자 주님을 찾아온 분들이 많이 계시듯이, 이 여인도 딸이 귀신 들리지 않았다면 예수님 앞에 나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본문을 대하면서, 귀신 들린 딸의 어머니를 <가난하고, 무식한> 여자일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분석해 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26절에 그 여자를 소개하는 말을 집중해 보십시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① 그 여자는 헬라인이었다고 했습니다. - 예수님 당시 세계는 헬라문명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여인은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부모님들이나, 자녀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영어>문제이지 않습니까? 영어가 세계 통용어기 때문에 영어를 잘 하도록 유치원부터 조기교육을 하지 않습니까? 어떤 가정은 태교부터 영어를 들려줍니다. 그래서 부모들의 꿈에도 소원이 자녀들이 영어를 잘 해서 국제적인 사람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부모들도 외국여행을 할 때마다 영어를 좀 잘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영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듯이,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헬라어를 능통하게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헬라인으로 헬라어를 능통하게 잘 했습니다.

 

② 또 그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수리아(지금의 시리아)와 베니게(지금의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당시 페니키아 사람들은 미술과 공예 등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었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는데, 아마 이 여인도 상당한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집의 부인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경이 이렇게 여인에 대해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 여인의 처치가 더러운 귀신 들린 불쌍한 딸이 없었더라면,

예수님 앞에 나와 이토록 애원할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딸을 위해, 저 이스라엘 갈릴리 출신 예수님의 발아래 겸손과 존경의 표시로 엎드렸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관계는

유대인인가? 헬라인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머니>와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자 예수님>의 관계였습니다. 분명 이 여인은 헬라인으로 헬라어에 능통하고, 상당한 사회적인 지위도 가지고 있었고, 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딸을 위해서 그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쉬고 계시는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 지르며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마 15:22)하며 소리치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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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시 귀신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를 접어두고,

요즈음 많이 읽히는 어머니의 편지 한통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림태주라는 시인이 <그토록 붉은 사랑>이라는 산문집을 냈는데 그 책 중에 나오는 <어머니의 편지>라는 글입니다. 이 ‘어머니의 편지’는,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발견한 편지입니다. 한 번 들어보세요.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 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천국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 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 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중간의 내용 줄입니다. 내용 중에는 이장 집 잔치에 일하러 갔을 때 다른 엄마는 주인 몰래 자신의 새끼들을 불러 음식을 챙겨 먹였는데 시인의 어머니는 그것은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자식에게 먹이지 않았는데. 자식들이 왜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처럼 먹을 것을 주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 자신의 도리는 다 했지만, 자식의 심정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음식을 챙겨주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제 마지막 단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끝>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다 포기하고서라도 배고픈 자녀의 입에 먹을 것 하나 넣어주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다.

본문에 나오는 어머니는 고상한 품위를 자랑하는 헬라여인지만, 딸을 위하여 자신의 가치를 다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15:21-28에 나오는데 마태복음에는 마가복음보다 더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지금부터는 마태복음의 기사를 보충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님께 간청을 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귀신 들렸나이다.”(마 15:22)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예수님의 무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간청했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신 요청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마 15:23)

 

제자들까지 예수님께 귀신 들린 딸을 고쳐서 어머니와 함께 돌려 보내달라고 부탁했건만 주님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7: 27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게 진정 예수님의 음성이 맞습니까? 어떻게 사랑 많으신 예수님이,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자녀의 떡>이라면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우선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것이며, 더구나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가리켜 ‘개’라고 하시다니 과연 이럴 수 가 있습니까?

이 말씀은 이방인인 너에게는 어떤 은혜도 베풀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 어머니 되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딸을 고치위해서 의사를 찾아 갔는데 의사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헬라인이고, 고상한 품위를 가진 여인이어도 더 시상 참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함께 맞서 한바탕 욕설을 하고 돌아서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해야 할 정도의 말씀을 여인이 합니다.

28절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개 취급을 받아도 좋으니 개에게 주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를 받기만 한다면 내 딸이 낫겠다는 믿음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딸을 위해서는 그 어떤 모욕도 좋고, 어떤 대접도 좋으니 / 그저 딸에게 주님께서 주실 수 있는 부스러기만이라도 좋으니 주시면 내 딸이 낳겠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니고는 도저히 이런 말씀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29-30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태복음 15:28에는 조금 더 상세하기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무응답으로, 부정적인 말로 해 보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해 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큰 믿음을 가진 자라고 칭찬 받은 사람이 두 사람이 나오는데 <가버나움에 살았던 백부장(눅 7:2-10)>과, 오늘 본문의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둘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결국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머니는 예수님께 나아와 딸을 고치는 것으로 말씀이 마무리 됩니다.

 

어머니의 간구와 믿음이 승리했습니다.

그렇기에 수로보니게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여인만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일까요?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저를 낳은 어머니도, 여러분을 낳은 어머니도 세상에서 둘 도 없는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라고 말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그 어떤 모욕도, 힘든 일도, 슬픔도 견뎌내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희생의 삶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귀한 어머니를 그리고 아버지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효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면 어머니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우리 주변에 어르신들을 그런 마음으로 섬기시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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