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17-27 위로부터 내려온 선물
박근혜대통령이 지난 7월 27일부터 닷새간 청와대 안에서 휴가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하면서 휴가 중에 감명 깊게 읽은 책 한권을 국무위원들에게 소개했습니다.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이란 책입니다.
대통령이 감명 깊게 본 책이라고 해서 저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저자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는 예일대 학사, 도쿄대 석사,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언어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입니다. 그는 한국여자와 결혼해서 현재 한국에서 8년째 살고 있고, 경희대학교 국제대학 교수와 그 밖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인 그가 한국에 와서 한국을 연구해 보니 한국만큼 놀라운 나라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은 1960년대 이후 약 50년 동안 놀라운 속도로 경제성장의 가도를 달려왔고, 1970년대 초 오일쇼크, 19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 1997년 IMF 금융위기,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등을 슬기롭게 해치고, 구매력 기준 개인 소득 3만 달러를 돌파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뿐만 아니라 1988년 서울 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 2010년 G-20 정상회의 등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저력을 가진 나라가 대한민국인데, 한국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한국 사람들은 ‘새우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새우 컴플랙스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비롯된 강박관념을 말합니다.
자신이 본 대한민국은 기술면에서도, 문화적으로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풍습도, 정신적인 저력도 대단해서 세계 어떤 민족보다 뛰어난데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을 보니 너무 안타깝다고 하면서, 대한민국이 추구하고 고쳐 나갔으면 좋을 것을 하나하나 지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어보면서 우리 하나님의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선물을 받았지만,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세상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힘겹게 살아가지는 않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너희들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그 정체성에 걸 맞는 삶을 살아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 가치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치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선물을 받은 존재>라고 정의 합니다.
17절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본서의 저자 야고보는 <사탄이 주는 시험과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를 비교하면서 말씀하는데,
시험은 땅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하나님이 주시기에 위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잘 보세요.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누가 주었나? 생각해 보세요.
물 없이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하는데, 물은 누가 주셨지요? / 숨 쉬지 않고 살 수 없는데, 공기는 누가 주셨습니까? / 빛이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데 빛은 누가 주셨습니까? /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영적인 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 된 우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허락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먼저 손 내미셨고,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믿게 하셨습니다. 역시 영적인 면도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완전하고 온전한 선물을 구체적으로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18절에 “그가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 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지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어머니의 태에서 10달 동안 자라다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만약 어머니의 태가 없었다면 그 아이는 세상에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하나님은 말씀이란 태를 주셔서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읽고, 깨달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은 <진리를 통하여 확증된 복음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사역을 해 주셨고, 그리고 그 구원사역을 기록을 남겨서 성경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시대이건, 신약시대이건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 믿음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의 경우에도, 어떤 경로로 통해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믿음생활을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나는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받은 존재>이고, 그 선물 중에 가장 귀한 선물인 <진리의 말씀>을 선물로 받은 존재임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진리의 말씀만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이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성도는,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 말씀 앞부분은 제쳐놓고, 중간부분부터 보세요.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는 이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겨진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닌 말씀이라는 것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권고하기를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합니다.
제가 지난 번 한 번 말씀드렸는데, 시골교회에서 예배를 하는데 장로님 한 분이 예배시간에 설교만 시작되면 고개를 옆으로 심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졸더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말씀을 받아야 할 시간에 말씀을 받지 못하면 백 번, 천 번 예배를 드려도 그분은 영적으로 성장하기 힘듭니다. 말씀을 먹지 못하는데 그 영혼이 살찌고 성장하겠습니까? 그 누구든 말씀을 받지 못하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한 시간은 누구에게든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고 성장시킬 말씀을 듣는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시간은 나의 영성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철저하게 스스로 관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다시 들어가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받으라고 했습니까?
“....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했습니다.
여기에서 “온유함”이라는 말은 <극도의 분노와 ---- 극도의 냉정함의 중간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흥분된 감정이 이성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온유함으로 받으라.”를 문자적으로 풀면 <감정의 흥분됨 없이 말씀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듣고 배울 때, 말씀이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 대해서 <적대적 감정이나 반감 없이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21절 전체를 보시면 이제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즉, 말씀을 받을 때에, 말씀을 받는데 걸림이 되는 불순물을 다 치우라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마음도 버리라 / 냉정한 마음도 버리라 / 악한 마음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만들어 놓고 말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듣는 것 / 배우는 것 /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반복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을 전하는 저는 물론이요, 모든 성도님들은 말씀을 받는 이 한 시간을 소중히 여기시고, 말씀을 온전히 받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3. 말씀을 받은 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받는 일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은 말씀을 받았으면 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본문 중 두 구절을 보십시다.
22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5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 마무리하면서 제자들에게 주실 때에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24-27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신앙은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은 흔들림 없는 신앙이 되고,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는 자를 비유하기를 금방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자 같다고 23-24절에 말씀합니다.
요즈음 거울이야 선명하게 보이지만,
2,000년 전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 거울은 <유리가 아닌 광택이 나는 쇠>로 거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거울에 비친 얼굴은 윤곽이 흐릿하고 불명확하게 보이고, 머리도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금방 거울을 보고 조금만 지나면, 자신의 생김새가 정확히 어떠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자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배울 때에는 하나님이 누구이고, 나는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또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분간하지만, 이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머릿속만 남아있는 말씀이 되거나 다 잊어버리게 되고, 말씀을 행할 때에라야 진정하게 말씀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단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열심을 내는 장점이 있음과 동시에 말씀을 실천하는데는 미약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는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영성공동체를 탐방하면서 들려본 “아미쉬 공동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자동차 왕국이라는 미국에서 그들은 <자동차를 거부하고, 마차를 타는 것을 고집합니다.> <전기, 전화, 세탁기 등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 농사를 지으면서 형편이 되는 대로 세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살아갑니다.>
학교는 우리로 말하면 중학교까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일반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고, 자신들만의 학교에 보냅니다.
학교라고 해 봐야 교실 한 칸이 전부입니다.
한 교실에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공부를 하고, 선생님도 그 학교에서 공부한 아가씨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들 생각에 중학교까지만 공부하면 충분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밖으로 나가 공부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아미쉬 공동체에 놀랄만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06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Lancaster, Pennsylvania)의 니켈 마인즈(Nickel Mines)라는 작은 아미쉬 공동체 마을에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역시 그 마을에도 한 칸 자리 아미쉬 학교가 있었고, 그 교실 안에는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찰스 로버츠라는 정신이상자가 그 학교에 들어가 남자 아이들은 밖으로 다 보낸 다음, 여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총격을 가한 뒤에 범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의 총기사고는 자주 발생하기에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다른 곳도 아닌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며, 폭력과 범죄가 없이 살아가는 ‘아미쉬 사람들의 마을’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난 것이 미국을 포함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범인은 아미쉬 마을 인근에 살면서 주로 아미쉬 낙농가를 대상으로 우유를 수거해 온 트럭운전사였습니다. 그에게도 딸이 있었는데 딸이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죽게 되었고 자기 딸은 죽었는데 아미쉬 학교에는 여자아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여자아이들만 대상으로 총기를 난사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열 명의 소녀 중에 다섯 명은 그 자리에서 죽고, 다섯 명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물론,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총기 사고 현장에서 아이들의 태도와 / 총기사건으로 어린 피붙이를 잃은 아미쉬 유족과 공동체 사람들이 보인 즉각적인 반응과 의연한 대처>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총기사고가 났을 때 소녀들은 하나같이 이성을 잃고 날 뛰는 범인에게 “나를 먼저 쏘세요!”라고 했고, 사고가 터진 그날 해가 저물기도 전에 아미쉬 유족과 공동체 대표는 <범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범인의 장례식에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참여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각지에서 온 성금을 가장을 잃어버린 유가족에게 먼저 할애해 달라고 간청했고,
범인의 미망인과 어린 세 유자녀를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면서 위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이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용서>하라고 했기에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자녀를 죽인 그 범인을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이란 “실천”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과, 우리들, 지난해 있었던 세월호 사건으로 자녀를 잃어버린 한국의 부모님들과 비교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한 가지는
<우리가 들은 말씀은, 행함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 역시 행함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을 선물로 받은 우리가 해야 할 행함으로 소극적인 것, 적극적인 것을 소개합니다.
소극적인 것으로는
1) 듣기는 빨리, 말하기, 화내기는 느리게 하기 - (19절)
2) 혀를 절제하기 (26절)
적극적인 것으로는
1)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 약한 자를 도와주는 것(27절)
2)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27절)입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분명히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말씀을 받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힘쓰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근혜대통령이 지난 7월 27일부터 닷새간 청와대 안에서 휴가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하면서 휴가 중에 감명 깊게 읽은 책 한권을 국무위원들에게 소개했습니다.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이란 책입니다.
대통령이 감명 깊게 본 책이라고 해서 저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저자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는 예일대 학사, 도쿄대 석사,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언어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입니다. 그는 한국여자와 결혼해서 현재 한국에서 8년째 살고 있고, 경희대학교 국제대학 교수와 그 밖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인 그가 한국에 와서 한국을 연구해 보니 한국만큼 놀라운 나라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은 1960년대 이후 약 50년 동안 놀라운 속도로 경제성장의 가도를 달려왔고, 1970년대 초 오일쇼크, 19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 1997년 IMF 금융위기,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등을 슬기롭게 해치고, 구매력 기준 개인 소득 3만 달러를 돌파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뿐만 아니라 1988년 서울 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 2010년 G-20 정상회의 등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저력을 가진 나라가 대한민국인데, 한국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한국 사람들은 ‘새우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새우 컴플랙스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비롯된 강박관념을 말합니다.
자신이 본 대한민국은 기술면에서도, 문화적으로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풍습도, 정신적인 저력도 대단해서 세계 어떤 민족보다 뛰어난데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을 보니 너무 안타깝다고 하면서, 대한민국이 추구하고 고쳐 나갔으면 좋을 것을 하나하나 지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어보면서 우리 하나님의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선물을 받았지만,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세상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힘겹게 살아가지는 않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너희들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그 정체성에 걸 맞는 삶을 살아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 가치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치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선물을 받은 존재>라고 정의 합니다.
17절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본서의 저자 야고보는 <사탄이 주는 시험과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를 비교하면서 말씀하는데,
시험은 땅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하나님이 주시기에 위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잘 보세요.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누가 주었나? 생각해 보세요.
물 없이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하는데, 물은 누가 주셨지요? / 숨 쉬지 않고 살 수 없는데, 공기는 누가 주셨습니까? / 빛이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데 빛은 누가 주셨습니까? /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영적인 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 된 우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허락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먼저 손 내미셨고,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믿게 하셨습니다. 역시 영적인 면도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완전하고 온전한 선물을 구체적으로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18절에 “그가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 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지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어머니의 태에서 10달 동안 자라다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만약 어머니의 태가 없었다면 그 아이는 세상에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하나님은 말씀이란 태를 주셔서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읽고, 깨달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은 <진리를 통하여 확증된 복음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사역을 해 주셨고, 그리고 그 구원사역을 기록을 남겨서 성경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시대이건, 신약시대이건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 믿음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의 경우에도, 어떤 경로로 통해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믿음생활을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나는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받은 존재>이고, 그 선물 중에 가장 귀한 선물인 <진리의 말씀>을 선물로 받은 존재임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진리의 말씀만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이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성도는,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 말씀 앞부분은 제쳐놓고, 중간부분부터 보세요.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는 이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겨진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닌 말씀이라는 것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권고하기를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합니다.
제가 지난 번 한 번 말씀드렸는데, 시골교회에서 예배를 하는데 장로님 한 분이 예배시간에 설교만 시작되면 고개를 옆으로 심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졸더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말씀을 받아야 할 시간에 말씀을 받지 못하면 백 번, 천 번 예배를 드려도 그분은 영적으로 성장하기 힘듭니다. 말씀을 먹지 못하는데 그 영혼이 살찌고 성장하겠습니까? 그 누구든 말씀을 받지 못하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한 시간은 누구에게든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고 성장시킬 말씀을 듣는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시간은 나의 영성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철저하게 스스로 관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다시 들어가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받으라고 했습니까?
“....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했습니다.
여기에서 “온유함”이라는 말은 <극도의 분노와 ---- 극도의 냉정함의 중간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흥분된 감정이 이성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온유함으로 받으라.”를 문자적으로 풀면 <감정의 흥분됨 없이 말씀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듣고 배울 때, 말씀이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 대해서 <적대적 감정이나 반감 없이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21절 전체를 보시면 이제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즉, 말씀을 받을 때에, 말씀을 받는데 걸림이 되는 불순물을 다 치우라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마음도 버리라 / 냉정한 마음도 버리라 / 악한 마음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만들어 놓고 말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듣는 것 / 배우는 것 /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반복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을 전하는 저는 물론이요, 모든 성도님들은 말씀을 받는 이 한 시간을 소중히 여기시고, 말씀을 온전히 받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3. 말씀을 받은 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받는 일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은 말씀을 받았으면 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본문 중 두 구절을 보십시다.
22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5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 마무리하면서 제자들에게 주실 때에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24-27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신앙은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은 흔들림 없는 신앙이 되고,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는 자를 비유하기를 금방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자 같다고 23-24절에 말씀합니다.
요즈음 거울이야 선명하게 보이지만,
2,000년 전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 거울은 <유리가 아닌 광택이 나는 쇠>로 거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거울에 비친 얼굴은 윤곽이 흐릿하고 불명확하게 보이고, 머리도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금방 거울을 보고 조금만 지나면, 자신의 생김새가 정확히 어떠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자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배울 때에는 하나님이 누구이고, 나는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또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분간하지만, 이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머릿속만 남아있는 말씀이 되거나 다 잊어버리게 되고, 말씀을 행할 때에라야 진정하게 말씀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단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열심을 내는 장점이 있음과 동시에 말씀을 실천하는데는 미약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는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영성공동체를 탐방하면서 들려본 “아미쉬 공동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자동차 왕국이라는 미국에서 그들은 <자동차를 거부하고, 마차를 타는 것을 고집합니다.> <전기, 전화, 세탁기 등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 농사를 지으면서 형편이 되는 대로 세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살아갑니다.>
학교는 우리로 말하면 중학교까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일반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고, 자신들만의 학교에 보냅니다.
학교라고 해 봐야 교실 한 칸이 전부입니다.
한 교실에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공부를 하고, 선생님도 그 학교에서 공부한 아가씨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들 생각에 중학교까지만 공부하면 충분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밖으로 나가 공부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아미쉬 공동체에 놀랄만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06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Lancaster, Pennsylvania)의 니켈 마인즈(Nickel Mines)라는 작은 아미쉬 공동체 마을에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역시 그 마을에도 한 칸 자리 아미쉬 학교가 있었고, 그 교실 안에는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찰스 로버츠라는 정신이상자가 그 학교에 들어가 남자 아이들은 밖으로 다 보낸 다음, 여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총격을 가한 뒤에 범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의 총기사고는 자주 발생하기에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다른 곳도 아닌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며, 폭력과 범죄가 없이 살아가는 ‘아미쉬 사람들의 마을’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난 것이 미국을 포함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범인은 아미쉬 마을 인근에 살면서 주로 아미쉬 낙농가를 대상으로 우유를 수거해 온 트럭운전사였습니다. 그에게도 딸이 있었는데 딸이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죽게 되었고 자기 딸은 죽었는데 아미쉬 학교에는 여자아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여자아이들만 대상으로 총기를 난사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열 명의 소녀 중에 다섯 명은 그 자리에서 죽고, 다섯 명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물론,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총기 사고 현장에서 아이들의 태도와 / 총기사건으로 어린 피붙이를 잃은 아미쉬 유족과 공동체 사람들이 보인 즉각적인 반응과 의연한 대처>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총기사고가 났을 때 소녀들은 하나같이 이성을 잃고 날 뛰는 범인에게 “나를 먼저 쏘세요!”라고 했고, 사고가 터진 그날 해가 저물기도 전에 아미쉬 유족과 공동체 대표는 <범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범인의 장례식에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참여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각지에서 온 성금을 가장을 잃어버린 유가족에게 먼저 할애해 달라고 간청했고,
범인의 미망인과 어린 세 유자녀를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면서 위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이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용서>하라고 했기에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자녀를 죽인 그 범인을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이란 “실천”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과, 우리들, 지난해 있었던 세월호 사건으로 자녀를 잃어버린 한국의 부모님들과 비교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한 가지는
<우리가 들은 말씀은, 행함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 역시 행함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을 선물로 받은 우리가 해야 할 행함으로 소극적인 것, 적극적인 것을 소개합니다.
소극적인 것으로는
1) 듣기는 빨리, 말하기, 화내기는 느리게 하기 - (19절)
2) 혀를 절제하기 (26절)
적극적인 것으로는
1)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 약한 자를 도와주는 것(27절)
2)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27절)입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분명히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말씀을 받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힘쓰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