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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11월 22일
요한복음 18:33-38a 진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기

오늘은 사도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의 순교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폴리캅(A.D 69-155)은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서 서머나에서 열두 번째로 순교한 사람이었습니다.
소아시아에 박해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그 박해의 손길이 폴리캅에게도 이르렀습니다. 폴리캅을 추격하던 사람들이 그의 은신처를 알고 급습하였으나 거기에는 폴리캅은 없었습니다. 추격하던 사람들은 은신처에 있었던 두 젊은이를 체포하여 고문을 가하였고, 그 중 한 젊은이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폴리캅이 옮겨 가 있는 새로운 은신처를 발설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폴리캅을 잡으려고 새로운 은신처로 왔습니다. 이때 폴리캅의 제자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고 애원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될지어다.” 하면서 친히 그들 앞에 나아갔습니다. 폴리캅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들 잡으려는 사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86세의 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잡힌 폴리캅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달라고 하여 허기를 채운 다음, 기도할 수 있도록 한 시간의 여유를 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라고 하자, 그는 선 채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내내 은혜 충만한 가운데 기도를 멈추지 않고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폴리캅의 기도를 들으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경건한 노인을 붙잡으러 왔다는 것에 양심의 큰 가책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기도를 마치자 그들은 폴리캅을 나귀에 태워 암피트리테(amphitrite) 사형장에 데리고 갔습니다. 사형장에 들어서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오 폴리캅! 남자답게 강하고 담대하라! 고통에서 담대하라!” 폴리캅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곁에 서 있던 총독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이를 고려하여 봐줄 테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황제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 어때?” 이 말을 들은 폴리캅이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내게 절대로 해를 입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왕 나의 구주이신 그분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폴리캅은 장작더미 위에 올려가 양 손이 뒤로 묶인 채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그는 하늘을 보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주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여, 주께서 저를 오늘 이 시간을 위해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그리스도의 잔을 함께 마시고 수많은 주의 순교자들의 반열에 들어가게 해 주시고,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썩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하옵나이다. ..(중략) 영원토록 신실하신 주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저에게 보여주신 대로, 오늘 저를 주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주시옵소서. 이 모든 일에 대해 주를 찬송하오니 주께 영광을 돌리옵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폴리캅이 순교하기 전, 서머나 에서만 열한 명이 순교하고, 열두 번째로 폴리캅이 순교한 이유는? <예수님을 자신의 왕이고, 자신이 구주>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왕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움직이는 왕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왕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움직이는 왕은 누구십니까? <그 왕이 나 자신도, 세상의 왕도 아닌 / 오직 한 분,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의 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한 해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 마지막 주일을 교회력에서는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정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의 의미는 주보에도 소개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중의 왕 되심을 축하하고, 온 세상이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로 새롭게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설교를 들으시면서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나의 왕은 누구인가? 나의 왕은 예수님인가?> 끊임없이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도 “유대인의 왕이 누구냐?”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 받는 장면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정을 생각하면서, 지금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법원에 있는 재판장을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림으로 남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을 보시기를 바랍니다.(그림 자료 영상참조)
그리 높지 않는 단상에 재판장 빌라도가 앉아있습니다. 그 아래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빌라도는 의자에 앉아있고, 예수님은 서 계셨기에 눈높이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을 맺는 흥미로운 대화가 시종 진행됩니다. 흔히 우리 법정에서 볼 수 있는 준엄한 검사나 변호사, 판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토론 장 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과연 법치주의를 표방했던 로마의 전형(典型)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여러 번 읽어보면, 재판장 빌라도는 진리에 목마른 학생 같아 보이고, 피고로 붙들려온 예수님은 그 학생을 가르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고매한 스승 같은 역전(逆戰)된 위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빌라도 재판정의 심리 요지는 예수가 “왕이냐? 왕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을 고발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에게 세 가지의 죄목을 덮어씌웠습니다. ① 유대 백성을 미혹하고
②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했고,
③ 자칭 왕이라고 주장했다.
이 세 가지 죄목 중에 빌라도는 가장 정치적인 중요한 문제, 해결하지 않으면 황제 가이사에게 책잡힐 만한 세 번째 안건으로 심문을 시작한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렇다/ 아니다’라고 간단하게 답변을 하지 않고,
도발적인 대답을 합니다.
3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 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 당신이 묻는 질문이 <재판장 자신이 묻는 질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재판장에게 해 준 말인지>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재판장이 주도적으로 심리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등 떠밀려 심리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밝혀달라는 말입니다.

질문의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정확한 답변을 하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만약 재판장인 빌라도 개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궁금해서 묻는 다면 대답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당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이 생각한 <왕>에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기다린 왕은 이중 적었습니다.
하나는, 나라를 현실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에서 구할 정치적인 왕을 기다렸고,
다른 하나는, 예언자들에 의해서 언급된 유대 나라와 세상을 구할 영적인 메시아 의 왕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그들이 기다린 영적인 왕은 맞았지만, 정치적인 왕은 아니었기에 <아니다>라고 대답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빌라도에게, 당신 스스로의 질문이냐? 아니면 고소한 자들의 질문이냐? 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자 35절에 빌라도가 매우 엉뚱한 반문을 합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 말씀에서 <내가 유대인이냐?> 는 말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 질문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자신은 이 소송을 제기한 장본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객관적인 태도로 재판에 임할 뿐이라는 뜻으로 돌립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자랑이 법치주의자로 돌아온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고소자들을 의식하며,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라고 심리하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 속에서 빌라도는 고소자들이 제기했던 어떤 종류의 선동을 하였는지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어지는 36절에는 이 재판을 반전시키는 진술이 나옵니다. 소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술입니다.
본문을 보세요.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주장하는 나라와, 이 세상에 속한 나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비교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차이점>

세상나라 1. 영원하지 않다.
인류의 역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나라들과 문명들이 일어섰다가 사라져갔는지 모릅니다. 물론 민족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 1. 영원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도 끝도 없고 멸망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세상나라 2. 사람이 통치한다.
옛날에는 왕이 통치했고, 지금은 공산국가에서는 독재자가 통치하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나 수상 총리가 통치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다스리는 곳에는 전쟁과 테러, 압제 등이 있습니다.
하나니나라 2.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세상나라 3. 이기적이다.
한 국가, 한 민족의 핵심 사상은 이기심입니다. 가까운 일본을 보세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도 보세요. 물론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나라 3. 이타적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섬기는 자가 리더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천사들도 섬기고, 성도들도 섬기는 자입니다.

세상나라 4. 권력 중심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이기게 돼 있는게 이 세상 나라입니다. 또한 세상 나라는 정신적이지 않고 물질적입니다.
하나님나라 4. 영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인 것에는 가치를 두지 않고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는 차이가 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당신이 왕으로 있는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재판장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갈수록 자신이 혼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빌라도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나라는 세상나라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이 새로운 나라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새로운 나라에 대해서 궁금해 하면서 소설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37절 상반절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지금 빌라도의 이 질문은 <지금 네가 주장하는 나라는 지상에 있지도 않는데 왕 같은 행세를 하는 너는 누구냐?>의미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상의 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이냐? 아니냐?는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을 합니다. 37절 이어 지는 말씀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
예수님은 드디어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왕 됨을 확실히 증거 합니다.
- 나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다.
-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
- 왕은 왕인데 진리를 증거 하는 목적을 가진 왕이다.
※ 예수님이 말씀하는 진리는 - 사전에서 말하는 <보편타당한 지식>이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은 바로 그 구원의 절대 진리, 즉 복음을 말합니다.
- 그리고 이미 나를 믿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나의 음성을 분명히 알아듣는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기소된 문제와는 거리가 먼 재판장의 관심사가 여과 없이 이어서 나타는 말을 합니다.
38절 상반절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자 정리를 해 보십시다.
오늘 빌라도의 재판정의 심리요지는 처음에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아니냐?>로 됩니다. 그리고 심리 마지막에는 <진리가 무엇이냐?>로 발합니다.
이 재판의 흐름을 통해서 예수님은 조용하면서도 명확하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 나는 왕이다.
- 나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다.
- 나는 진리의 왕이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에서 7번이나 반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나는 ,, 이다(에고 에이미)에서 6번째로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심을 밝혔습니다.
요한복음 14:6에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나라의 왕, 진리의 왕임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사역하셨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의 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가? / 내 생활의 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가? / 내 가정의 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가? / 우리교회의 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작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고 변두리에 모시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마치 먼 친척이 이야기하는 것 같이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런 효력도 발하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1960년대 미국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교수였던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가 자신의 책에 쓴 가정부이야기입니다. 가정부 이름은 <에밀리 윌슨>이었습니다.
한 번은 미국 36대 <린든 존슨 1963-1969>대통령이 급한 일로 <갈브레이스> 교수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요즈음처럼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니 집으로 전화를 한 것입니다. 대통령의 전화를 가정부인 <에밀리>가 받았습니다.
“여기는 백악관이요. 급한 일로 교수와 통화할 일이 있으니 교수를 바꿔주시오.”

이때 에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지금 피곤하셔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금은 바꿔드릴 수 없 습니다.”
대통령은 격앙된 말투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대통령이오. 급한 일이오. 당장 깨우시오”
<에밀리>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저의 주인은 <갈브레이스> 교수님이시고, 저는 그를 위해서 일하도록 고용된 사람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끝내 그녀는 대통령에게 전화를 바꿔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갈브레이스>교수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네 가정부 참 잘 두었더구먼,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꼭 전해주게, 내가 그녀를 백악관에서 고용하고 싶다고.”

가정부 에밀리는 자기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 역시, 그들의 주인, 그를 통치하는 왕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다윗은 시편 16:2에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 이다” 고백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송가 중에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란 곡이 있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이제 다시 깊이 생각하시고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왕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 왕, 그 주인이 바로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 그분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평하는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



한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이 솟아나오고 바로 옆에는 차가운 냉천이 솟아나와 사람들은 언제든지 온천과 냉천을 이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나와 온천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빨래를 하고 냉천에서 헹굴 수가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여행객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 너무 부러워서 동행하던 안내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지요.”그러자 안내인은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웬걸요. 이 마을 사람들은 불평이 너무 많답니다.

찬물과 더운물이 나오는 것은 좋은데 빨래비누가 나오지 않아 늘 불만이랍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남이 부러워할 만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보다 더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건 아래 살아가고 있음에도 감사해 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평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이 있음에도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불평 하는 것에 더 익숙해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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