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조회 수 47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6월 12일
누가복음 7:36-50 파격적인 주님의 용서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그림 정도는 누가 그렸는지, 그림 제목은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1492-1498년까지 7년에 걸쳐 완성된 그림입니다. 1492년 1년 이라는 긴 기간 동안 예수님의 그림을 완성하였고, 그 후로 6년 동안 나머지 11명의 제자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그림을 보고 예수님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행한 최후의 만찬의 모습이라고 이해하시면 문제가 있습니다. 이유는 이 그림은 예수님 사역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세 가지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테이블 모양이 잘못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처럼 사각형의 테이블이 아니라, 한글 자음의 ‘ㄷ’자 모양의 3면 테이블이어야 합니다.
원래 3면 테이블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된 유대 땅에서 급속하게 보급되었습니다. ‘ㄷ’자로 움푹 들어간 곳을 통해 종들이 음식 서빙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둘째, 테이블에 앉는 좌석 배치가 잘못되었습니다.
3면 테이블에는 상석과 말석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상석은 왼쪽 날개 부분이고, 말석은 오른 쪽 날개 부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테이블에서 상석은 당연히 그 식탁의 주빈이었던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좌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처럼 가운데가 아니라 왼쪽 날개의 중앙에 있어야 합니다.

셋째, 테이블에 앉는 자세가 잘못되었습니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은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누워서 먹었습니다. 머리는 테이블 쪽을 향하고, 쿠션에 왼 팔을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당연히 발은 뒤에 있는 벽을 향하게 됩니다.
당시는 주로 밀로 만든 빵을 즐겨먹었는데, 빵과 야채를 넣어 만든 죽, 우유를 먹었습니다. 빵은 칼을 쓰지 않고 손으로 떼어 먹었기 때문에 식사 전에는 꼭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빵을 떼어 우유나 야채 죽에 찍어 먹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유대인들의 식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이 식사자리에서 있었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36절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 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하며 시작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금처럼 하루에 세끼를 먹지 않았고 두 끼를 먹었습니다.
아침은 이른 아침에서 정오 사이에 간단히 먹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쓰는 표현으로 <아점>으로 간단하게 먹었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저녁식사를 정식으로 먹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식사는 대부분 정식으로 먹었던 저녁식사를 말합니다.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것도 저녁 식사였고, 최후의 만찬도 저녁 식사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서 식사를 한 것도 저녁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의 이름은 44절에 있는 대로 ‘시몬’이었습니다. 본문을 아무생각 없이 보면 본문에 나오는 ‘시몬’이 예수님의 수제자 시몬 베드로로 보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9명이 등장하는 데, 그 중 한 사람 <바리새인이었던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6천 명 가량 있었다고 합니다. ‘바리새’란 ‘분리된 자’란 의미로, 율법에서 깨끗하지 않다고 하는 것들로부터 분리하려는 태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 명의 바리새인 앞에서 바리새 회의 규칙을 지킬 것을 맹세하고, 1년간 예비 기간을 가집니다. 이때 본인은 물론 가족가지도 회원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회원이 아닌 사람과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
둘째, 회원이 아닌 제사장에게는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
셋째,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 목요일>에 금식한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통해 바리새인이 되었고, 바리새인이 된 후에도 율법을 엄격하게 연구하고 지켰습니다. 그들이 서기관, 제사장,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 되었기에 사회적으로도 대단한 존경을 받고 살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 시몬’ 역시, 당시에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할 만큼 넉넉한 집안이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몬의 집에 예수님이 저녁식사에 초대 받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주빈의 자리<좌측 중앙>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고, 대접하는 바리새인 시몬은 <좌석 중앙>의 주인의 자리에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한 여인, 불청객이 등장합니다.
37절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라고 합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여자를 소개하는 말이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합니다. 여자를 <죄인>이라고 분명하게 소개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죄인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세리>요, 또 한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분명히 그들과 공존하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공식적으로 ‘죄인’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라고 말 할 때, 다른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 여자가 <창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봅니다.

당시 가장 사회적으로 존경받았던 바리새인 / 율법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바리새인과 : 당시 사회에서 가장 추하게 인정받았고,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창녀가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는지가 본문의 관전 포인트입니다.
본문의 주연은 <예수 그리스도> / 비유로는 : 돈을 빌려주는 사람
조연으로 남자 배우에 - 바리새인 시몬 / 비유로는 : 오십 데나리온 빚 진자
조연으로 여자 배우에 - 창녀 / 비유로는 :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

자, 그럼 본문의 기록된 순서대로 <죄를 지은 한 여자 : 창녀>의 행동부터 살펴보십시다. 본문을 읽어 보시면 알겠습니다만 창녀는 본문에서 한 마디의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사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대사는 없고, 지문부분만 있습니다.
37-38절에 나타난 여자의 행동을 보십시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지금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서 식사하는 자리에 창녀가 들어온 것입니다. 당시 잔치 집에는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창녀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예수님의 발 곁에서 울었고, 눈물을 흘렸고, 눈물을 머리털로 닦았고, 발에 입 맞추었고,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설교 처음에 보여드린 당시 식사 좌석이 ‘ㄷ’자였고, 앉은 모습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어느 위치에서 행했는지 이해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공생애 사역 중 한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두 번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향유를 부은 사건은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이고>, 공생애 사역을 마감하면서 나사로의 집에서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주님께 부었던 <마리아>의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 본문으로 다시 가서 ‘죄를 지은 한 여자’ <창녀>가 <왜 예수님이 초대받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을까? / 발 곁에서 울었을까? / 울어도 조금 운 것이 아니라,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울었을까? / 그리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을까? / 그리고 그 발에 입을 맞췄을까? / 그리고 그 귀한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었을까?> 생각해 보십시다. 왜 그러했을까요?

‘죄를 지은 한 여자’ - <창녀>의 삶, 창녀의 마음으로 내려가 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창녀의 삶으로 내려간다고 해도 우리가 겪어 보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의 여인을 비유컨대 / 일제 강점기 때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인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어느 종군위안부가 쓴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는 1916년 10월 15일 황해북도 사리원시에서 태어났다.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 그리고 여동생 3명이 있었다.
생활이 너무도 곤란하여, 나는 12살 때 쌀 한 말 값에 팔려 어느 부자 집에 종으로 들어갔다가 몇 해 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방직공장에 팔렸고 그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16살 되던 1932년에 또 다시 팔려 일본 오사카에 있는 "덴노지병원"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18살 되던 해인 1934년의 어느 날 밤, 병원원장이 야수처럼 달려들어 겁탈하고는 그것이 드러날까 봐 우려되어 일본군 동경 제12사단의 "종군위안부" 명단에 내 이름을 적어 넣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나는 동경 제12사단의 "종군위안부"가 되어 치욕스러운 성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끌려간 곳은 중국의 장춘이었다.
부대의 주둔지에 판자로 지은 "위안소"가 있었는데, 방은 다다미 한 장 깔만한 크기였다. 거기에는 100여명의 "위안부"가 있었는데 모두 조선여성들이었다.

끌려간 날부터 나는 "이시가와 스지에"라는 일본이름과 "12" 이라는 방 번호로 불렸다. 새벽이면 "종군위안부"들을 "위안소" 마당 앞에 끌어내어 "궁성요배" 를 강요하곤 하였다.
식사는 보리밥 한 덩이와 소금에 절인 무, 한 조각이 전부였다.
아침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하루 평균 30~40명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용은 생략하고 마지막 부분으로 갑니다)
나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종군위안부" 생활로 아직도 부인병과 심장병을 앓고 있으며 때때로 기절까지 한다.
나는 일제에 의하여 청춘을 깡그리 빼앗기고 희롱당하여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수십 년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의 그 치 떨리는 만행을 감행했던 놈들의 낯짝과 이름을 잊을 수 없다.
설사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시체라도 파서 인류의 면전에서 재판을 하지 않고서는 원한을 풀 수가 없다.】
가난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다보니, 종군위안부가 되었고, 그 상처가 일평생 한이 되었고,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죄 지은 한 여자’도 - 어떻게 해서 창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말 못할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삶의 끝이 모든 사람에게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해주는 분이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도 인격이 있다고 온전히 세워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 였습니다.

이 여자는,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세리에게 한 일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이 사람을 <알패오의 아들 세리 마태>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를 말합니다. 세리 역시 이미 말씀드렸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공식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세리와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불렀습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그가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주님은 아무런 조건도 따지지 않으시고, 세리의 집에 들어가 많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그런 행동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과 반대 세력들에게 쐬기를 박은 말씀을 한 마디 이렇게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눅 5:31-32)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당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었고,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소식은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졌을 것이고, 창녀였던 이 여인에게도 들려온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창녀에게 예수님은 ‘복음’이었고,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을 구원할 구세주로 믿어버린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을 보자마자 솟구치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다 아시는 주님 앞에는 부끄러운 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머리털로 눈물이 뭍은 발을 닦아도 더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어린 자식의 발에 뽀뽀를 하고, 발로 얼굴에 대고 귀엽다고 하듯이 지금 이 여인은 예수님이 너무 너무 좋아서 발에 정신없이 키스를 했고,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언젠가 자신을 사람대우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준비해 놓았던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어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조연 <바리새인 시몬>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식사를 초대한 주인으로 예수님을 주빈으로 정중히 대우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시몬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손님 접대 예법은>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샬롬”(평화)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다음으로 서로 입맞춤 합니다. 그 다음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신을 벗으면, 발을 씻겨줍니다. (손님이 얼마나 귀하냐에 따라서 주인이 직접 씻어주기도 하고, 종이 씻어주기도 하고, 본인이 씻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손님을 자리에 식사자리 상석에 앉도록 합니다. 이것이 당시 손님을 맞는 절차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 시몬은, 그 모든 절차를 생략했습니다. 주님이 그런 대접을 받았을 때 얼마나 뻘줌했을까?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주인이 예법을 몰라서 그러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시몬은 <예의라면 미쳐있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태도를 보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망신시키려고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죄 지은 한 여자” (창녀)가 자신에 하는 행동들을 그대로 묵인하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께 하지 못한 것을 몇 배나 보상하듯이 정성을 다하는 여인을 그냥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시몬이 속에서 하는 생각을 아시고, 시몬과의 대화를 통해서 <시몬의 잘못을 하나씩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주님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바리새인들이 듣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죄인으로 인정받던 여인에게>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48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0절)

비록 세상이 인정하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자신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사랑을 표현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구원을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자신을 팔아먹는 유다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보자기로는 못 덮을 죄가 없고, 용서 못할 죄인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주님 앞에 나오는 그 어떤 죄인이라도 파격적으로 용서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지어는 오늘 본문의 시몬처럼 예수님을 모셔놓고도 예수님 대우를 하지 않는 자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사랑의 본질을 다시 확인하십시다.
예수님은 그 어떤 자라도 파격적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도 그 용서를 받았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주님의 품으로 나아가 그 사랑에 감격하시고,
더 나아가 우리도 주님처럼 파격적으로 용서해 주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348 로마서 강해 25. 칭의(의롭다고 인정을 받음)받은 자의 특권 (롬 5:1-5) 2020.07.19 271
347 로마서 강해 24.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롬 4:18-25) 2020.07.12 347
346 다니엘의 순교적 감사 (단 6:10) 2020.07.06 337
345 로마서 강해 23. 모든 신자의 조상 아브라함 (롬 4:9-17) 2020.06.30 247
344 로마서 강해 22.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롬 4:1-8) 2020.06.21 268
343 로마서 강해 21. 복음의 진수 (롬 3:21-31) 2020.06.14 329
342 칼과 기근과 전염병 (렘 14:7-12) 2020.06.09 704
341 성령의 역사를 이어가는 사람 (왕하 2:1-14) 2020.05.31 264
340 걱정과 근심을 기쁨으로(요2:1-11) 2020.05.26 403
339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넌 내 거야! (겔 16:59-60) 2020.05.17 216
338 효도의 모델 - 요셉 (창 50:1~14) 2020.05.12 292
337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막 10:13-16) 2020.05.04 420
336 그리스도의 진정한 마지막 말씀(3) (요 21:15-23) 2020.04.26 237
335 그리스도의 진정한 마지막 말씀(2) (요 20:24-29) 2020.04.19 196
334 그리스도의 진정한 마지막 말씀(1) (요 20:19~23) 2020.04.12 302
333 사랑하기 때문에 (마 27:27~31) 2020.04.05 255
332 욥의 고결한 인생관 (욥 23:10) 2020.03.28 400
331 막막한 현실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수 1:1-9) 2020.03.21 404
330 영적 침체의 해독제는 큰 믿음입니다. (마 14:22-33) 2020.03.14 295
329 기억이 회복을 가져옵니다.(시편 137:1~9) 2020.03.07 314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26 Next
/ 26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