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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9h10yJtpto
본문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 파송(행 13:4-12)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12-03

사도행전 13:4-12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 파송

 

미국 윌로크릭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는 교회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3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좋은 성품 /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 / 함께 어울리는 인화>입니다. 전적으로 공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교회도 교회가 더 아름다워지려면 교역자는 물론이요, 장로, 안수집사, 권사님들이 <성품, 역량, 인화>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한 부분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난주일 부터 생각하고 있는 안디옥교회는 지도자 다섯 명이 이 세 가지 <성품, 역량, 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했기에 교회는 평안하였고, 부흥하였습니다. 부흥이 교회 안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안디옥 시민들이 교인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구제헌금을 보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가 성령 충만하여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왕성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우리교회도 여러분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만, 제가 볼 때는 성령의 역사, 성령의 움직임이 눈에 보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해외교회건축을 위하여, 교회 내부 단장을 위해서 성도들이 움직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까? 노력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제가 매주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안디옥교회가 이렇게 성령 충만할 때, 성령하나님은 지도자 다섯 명 중에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 담임목사요, 사울은 부목사인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분리해서 선교사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안수한 후 선교사로 보냅니다.

 

오늘 이어지는 말씀에는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인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어디로 선교하려고 갔는지, 첫 번째 선교지에서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지? 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4-5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이 두 구절에는 선교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교회의 비전 중에 <선교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있기에, 선교에 대해 성도 모두가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을 근거로 4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선교에 대한 바른 이해 4가지

① 선교는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은 자가 있어야 한다.

바나바와 사울이 기독교 최초 선교사라고 했는데, 성도들 중에는 사마리아로 갔던 빌립 집사(행6장)도 선교사가 아니었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빌립을 선교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빌립이 사마리아에 간 것은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 개인적으로 간 것이지 예루살렘교회 파송 받아 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바나바와 사울은 그들은 보낸 자가 있습니다. 보낸 자가 누구입니까? 안디옥교회이지요?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았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령 하나님이 보낸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이 바나바와 사울을 보냈고, 바나바와 사울을 순종하고 갔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우리가 선교사를 만날 때 확인할 사항은 그분이 진짜 선교사라면 파송한 교회가 어디인지? 파송한 단체가 어디인지? 물어보셔야 합니다. 만약 파송한 교회가 없다면 그는 온전한 선교사가 아닌 것입니다.

 

② 선교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도자를 파송하실 때에도 둘씩 파송하셨습니다.

선교사도 그렇습니다. 선교사는 혼자서는 사역할 수 없습니다. 선교단체로 통해서나, 혹은 동역하는 다른 분을 통해서 함께 사역하여야 합니다.

바나바는 사울과 동역했고, 바나바와 사울은 마가요한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함께 사역했습니다.

③ 선교는 가까운 사람과 함께, 가까운 곳부터 가야 합니다.

최초의 선교는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갔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안디옥교회에서 담임목사와 부목사로 함께 사역한 사이였기에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사역지도 전혀 낯선 곳이 아닌 <구브로>섬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36에 보면 바나바를 소개하며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이라고 했습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고향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어 했음이 분명합니다.

 

또 수행원 마가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골로새서 4:10에 보면 “바나바의 생질 마가”라고 합니다. 마가 다락방 집 주인이 바나바의 누이였고, 마가요한에게 바나바는 외삼촌이 되는 것입니다.

 

④ 선교는 도시 중심, 회당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선교 팀은 항상 도시중심에 들어갔고,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갔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6.25전쟁 이후에 전 세계로 흩어져서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게 된 것처럼,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가 통치하는 전 지역에 흩어져 있었기에 어디를 가든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이 모이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도 그들에게 먼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기독교 최초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로 가는 그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갔습니다.

만약 우리 성도나 청년 가운데 선교에 꿈이 있는 분들은 이 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진짜 선교를 하고 싶으면 주변에서 전도해 보고, 또 타 지역으로 가서 전도를 해 본 다음 점차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 그럼 첫 번째 선교지인 <구브로>로 가 보십시다. 직접 구브로에 가지는 못하지만 지상으로라도 가 보십시다. <지도 1 구브로 사진> 보여 주세요.

 

선교사로 파송한 안디옥교회에서 서쪽으로 150km 지점에 구브로 섬이 있습니다. 지금은 구브로라고 하지 않고, <키프러스, 영어로는 사이프러스>라 부릅니다.

남북으로 97km, 동서로 225km, 해안선 길이 782km로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입니다. 이렇게 해도 감이 안 오시지요? 쉽게 말씀드리면, 제주도의 5배 크기의 섬입니다.

 

구브로는 헬라어 <키프리오스(‘구리’를 의미)>에서 유래했습니다.>

구리가 많이 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다 황양목과 염전으로 유명하고(겔27:6) 헬라인은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생각해서 <미의 여신인 비너스가 구브로 앞바다에 태어났다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너스 신전도 구브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구브로 해안도시 <살라미>에 도착한 바나바와 사울은 살라미에 있는 회당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고, 섬을 관통하며 선교하며 <바보>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선교의 열매를 크게 맺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선교의 열매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바보>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합니다.

6-8절을 보십시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보는 – 구브로 섬의 수도였습니다. <영어로는 ‘파피’, 헬라어로는 ‘바포’>인데 우리성경은 번역하면서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바보는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바보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그 사건을 통해서 사도행전 전체가 어떻게 바뀌게 되는지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돌아 가셔야 합니다.

 

우선 바보에 살고 있었던 두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다.

한 사람은 – 6절에 나오는 <바예수 “Bar–Jesus”>입니다. ‘바예수’란 이름의 뜻은 “여호수아의 아들”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좋은 이름입니다.

그에게는 헬라식 이름도 있었습니다. 8절에 “엘루마”입니다. 엘루마는 “점성가, 마술사, 박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문제는 율법에 의하면 마술사, 박수무당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유대인으로서 버젓이 총독 서기오 바울 밑에서 박수무당 짓을 하며 먹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모든 로마치하 총독들은 이런 박수무당을 한 사람씩 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도 다른 사람처럼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이미 말씀드린 – 총독 <서기오 바울>입니다. 로마 원로원에 의해서 구브로를 통치하기 위해서 파송된 인물입니다.

 

재미난 것은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은 이방 사람이었지만 “지혜 있는 사람” 이었고,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7절)했지만

/반대로 유대인 <바예수>는 서기오 바울이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이 생계의 위협을 받을 것을 알고 서기오 바울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해방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예수를 조정하는 마귀가 그렇게 방해공작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안 믿는 가정에서 처음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 사탄이 방해공작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요? 예수를 믿는 것을 사단이 제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보면 힘들게 전도해서 교회에 모시고 와서 예배의 자리에 앉혀놓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든지,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든지> 사단이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사단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기도인도하시는 분은 예배하는 공간에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예수’ 가 복음전파를 방해하자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9-11절을 보십시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사단의 짓을 하는 <바예수>에게 바나바와 사울이 대처한 것을 통해 우리는

귀신들린 자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몇 가지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 대처 원리 4가지>

①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9절 “성령이 충만하여” / 사단과의 싸움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성령님이 하는 것이기에 사단과의 싸움에 승리하려면 내 속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성령으로 내가 충만하지 않으면 나는 사단을 만나면 꼬리를 내립니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성령 충만은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 기도로 무장하는 자라야 가능합니다.

 

② 피하지 말고 대적해야 합니다.

9절 하반 절에 “그를 주목하고” - 사단은 영물이기에 나의 영적인 상태를 잘 압니다. 그렇기에 영적인 전쟁을 할 때에는 그의 눈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했습니다. 마치 개와 싸움을 할 때 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보고 대적하면 개가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물러가듯, 귀신도 대적해야 합니다.

 

③ 사단을 꾸짖어야 합니다.

10절을 보면 사울이 겁날 정도로 마귀 짓을 하는 바예수를 꾸짖듯이, 우리도 사단을 보면 “더러운 귀신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날지어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겁이 나서 “귀신이여 이제는 좀 떠나기를 바랍니다.”하면 귀신이 떠나겠습니까? 강력한 말로 꾸짖어야 합니다.

 

④ 귀신을 저주했습니다.

11절을 보세요.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했습니다. 사울은 굉장히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예수>가 눈이 멀도록 명령했고, 그 즉시 그의 눈이 멀었습니다.

재미난 사실은 사울도 예수님을 박해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3일 동안 눈이 멀었던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눈이 멀게 해놓고, 영적인 눈이 온전히 떠지게 만들었습니다. 사울이 지금 성령의 역사를 막는 바예수에게 쓴 방법도 그의 <눈을 멀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귀신의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자주는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만에 하나라고 귀신이 역사하다면 <바나바와 사울>이 쓴 이대로 하셔서 귀신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이렇게 해서 바예수가 눈이 멀자, 어떤 복음의 열매가 맺혔습니까?

12절에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합니다. 복음의 역사를 눈으로 목격한 총독 서기오 바울은 그 순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총독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그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전승에 의하면 사울은 바보에서 전도하면서 핍박을 받아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사진 2 참고 - 바울을 채찍질 할 때 묵었다는 기둥과, 바울채찍질 기념교회가 뒤에 보입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총독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선교여행을 진행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 바나바와 사울>의 구부로 선교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내버리면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보>의 사건에서 특히 9절에서 놀라운 사실을 두 가지 발견해야 합니다. 9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첫째,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지금까지는 사울이라 불렀는데, 드디어 이름이 바울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이런 말을 여러분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이다. 예수 믿기 전에는 사울이었으나 예수 믿고 나서 바울이 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 믿고 변화를 받자.”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사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도 사울이었고, 예수 믿은 후 예루살렘교회에서도 ‘사울’로 불렸습니다.

 

바른 이해를 위하여 사울과 바울의 이름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뜻은 “큰 자”입니다.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뜻은 “작은 자”입니다. 아주 겸손한 이름이지요. “나는 바울입니다.”라는 말은 “나는 소인입니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울은 로마치하 이방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울>로 바꾼 것입니다.

 

둘째, 리더십이 바나바에서 바울로 바뀝니다.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는 담임목사였고, 부목사는 바울이었습니다. 선교사로 파송 받아서 구브로에 올 때까지도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보에서 바예수를 대하면서 성령님이 바울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함으로 성령님은 바나바에게서 사울에게로 리더십을 이양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이후에는 바울의 이름이 항상 먼저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13절부터 봐도 그렇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하면서 바울의 이름을 먼저 쓰고 아예 바나바의 이름을 쓰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성령님의 리더십 이양에도 불평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이것을 통해 또다시 바나바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적인 리더십에 우리 모두 순종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 주일에 임직한 15분의 경우에는 임직으로 통해서 직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직분을 하나님이 주신 줄 알고 순종하고 따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 결론짓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 파송의 내용과, 첫 선교지의 사역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교회도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성령님께 민감하게 반응하고, 성령님께 순종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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