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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40Lk4k8YBms
본문 그 능력의 비밀(행 14:8-18)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8-01-21

사도행전 14:8-18 그 능력의 비밀

 

이고니온에서 쫓겨난 바울 일행은 루스드라에 도착했습니다.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직선거리로 33km 떨어진 두 강이 만나는 후미진 지역입니다. 루스드라에 도착한 바울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곳과 차이가 난다면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복음을 전하였을까요?

성경에 그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전도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심의 어떤 광장이나, 시장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장소에 특별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8절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한 마디로 <앉은뱅이>라고 하면 되는데 본문은 그 사람을 풀어서 소개합니다.

①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

②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사람

③ 그렇기에 당연히 지금까지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면 ④ 걷는 것에 아예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기 시작합니다.

9절에 보세요.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이 말씀에서 우선 앞부분의 말씀부터 생각해 보십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하는 말>은 설교를 말하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복음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언제 어디에서나 전할 수 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였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문제에서 해결함 받았다.

병든 자는 치유되었고, 정신질환자는 온전해 졌고, 상처받은 사람들은 상처에서 회복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무덤에 묻히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예수님을 믿으면 문제에서 해방되며,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라.

이것이 바울이 전한 예수,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렇게 전하는 바울의 메시지를 앉은뱅이가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듣거늘” = 듣는다.>는 말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누구의 말을 듣는다.” 혹은 “알아듣는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헬라 원문으로 ‘아쿠오’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말은 <관심을 가지고 듣고, 마음을 다해서 듣고, 열심히 듣고,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있고, 여러분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씀드리면 설교를 듣는 것은 각각 차이가 납니다.

① 대다수의 성도들은 설교를 경청합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듣는다는 헬라어 ‘아쿠오’라는 단어 뜻처럼 <관심을 가지고 듣고, 마음을 다해서 듣고, 열심히 듣고, 지속적으로 듣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여백성경에 메모를 하면서 집중해서 듣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② 반면 설교를 듣는 채 하면서 딴 짓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귀로 들으면서 눈으로는 저를 보지 않고 주보를 보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성경의 다른 부분을 펴 놓고 읽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③ 어떤 성도는 설교를 듣는 채 하지만 옆에 있는 성도들이나 사람들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④ 어떤 분은 설교를 듣는 채 하지만 머리에는 딴 생각을 하거나, 예배가 끝난 후에 할 회의나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문제는 설교자의 눈에 설교를 잘 듣는 성도, 대충 듣는 성도, 딴 짓을 하는 성도 들이 정확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설교자라면 누구를 보면서 설교할까요? 누구를 보며 설교를 하면 더 좋은 설교를 할까요?

설교학에서는 <잘 듣는 성도>를 대상으로 설교하라고 합니다. 괜히 설교를 안 듣고 딴 짓하는 성도를 보면서 설교한다고 힘들어하지 말고, 설교를 잘 듣는 사람을 정해 그 분을 바라보면서 집중해서 설교 하는 것이 피차 은혜 스럽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성도님들은 설교를 <관심을 가지고 듣고, 마음을 다해서 듣고, 열심히 듣고, 지속적으로 듣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듣는 많은 군중 가운데 유독 한 사람에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8절에 소개하고 있는 <앉은뱅이>이었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하면서 이 앉은뱅이의 설교 듣는 모습을 보는데 마음에 확신이 하나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고침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람을 꿰뚫어 보는 신통한 능력이 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종종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도 가끔 안수기도를 해 보면 ‘이 분은 병이 고침 받겠구나! 문제가 해결되겠구나!’는 느낌이 올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기도를 하면서 ‘이분은 기도를 받으려고 머리는 숙였지만 마음이 뭔가 불편한 것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도 설교를 듣는 앉은뱅이를 보고 이 사람이 일어서 걸을 수 있겠다는 직감이 왔던 것 같습니다.

 

그 표현을 성경은 “...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절)

이 말이 생각 없이 문자대로 해석하면 “영혼의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 원문에서는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순간 앉은뱅이를 향해 소리 쳤습니다.

10절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는지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듣고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치는 <네 발로 일어서라>하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오늘 본문과 비슷한 한 사건이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성전으로 기도하려고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40세쯤 되는 앉은뱅이를 고쳐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과 차이점이라면,

사도행전 3장

사도행전 14장

사역자 : 베드로, 요한

사역자 : 바울

구걸하다가 고침 받음

말씀 듣다가 고침 받음

베드로의 말씀 +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킴

말씀으로만 일어서라고 선포함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3장의 사건이나, 오늘 본문의 사건 모두 결국은 —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복음으로 않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설교 제목인 <그 능력의 비밀>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의 고침 받는 사건은 어디에서 그 능력의 비밀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가 고침 받는 사건은 어디에 그 능력의 비밀이 있습니까?

추적해 올라가면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의 선포>에 비밀이 있고,

오늘 본문은 <바울의 설교>에 비밀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베드로와 요한의 선포의 핵심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고, 바울의 선포의 핵심인 <복음, 즉 예수님>에게 비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그리스도>와 <복음>안에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 사함의 문제의 해답도 -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문제의 해답도 -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가정 문제에 대한 해답도 -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 문제에 대한 해답도 -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내 생명에 관한 문제 해답도 -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만 바로 만나면, 예수님 안에서 그 동안 힘들었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예수님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병든 자는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이 가진 문제들이 해결함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말씀에 귀를 기울여들으시고, 믿음으로 아멘하며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자 본문으로 가서 또 생각해 보십시다.

바울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설교를 하다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나타난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1-13절입니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루스드라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신화>하나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루스드라에 제우스신과 헤르메스 신이 강림했다고 합니다.

제우스신은 – 신들의 우두머리로서 올림푸스 산 정상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다른 신들도 다스리는 신입니다.

헤르메스 신은 – 제우스신의 대변자로 신의 메시지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두신이 루스드라에 강림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신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냉대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농부였던 <빌레몬>과 아내 <바오시스>는 두 신을 알아보고 잘 접대 했다고 합니다.

결국 제우스신과 헤르메스 신은 자신들을 냉대하고 배척한 루스드라 마을 전체를 멸망시켰고, 자신을 알아보고 접대한 <빌레몬>과 아내 <바오시스> 두 사람은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후에 이 두 사람의 집은 신전이 되었고, 두 사람은 제사장이 되었고,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로 인해 마을을 지켜 나가게 되었습니다.

<빌레몬>과 <바오시스>부부가 죽은 후에 그 마을에는 두 개의 고목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이 두 부부를 상징하는 나무였다고 합니다.

 

이런 전설이 바울이 루스드라에 복음을 전할 때까지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루스드라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제우스 신, 헤르메스 신>이 다시 내려오기만 하면 모두가 잘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바울과 바나바란 사람이 루스드라에 오더니, 앉은뱅이를 향하여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소리를 치니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이 기적을 목격한 것입니다.

목격한 그들은 평소에는 헬라 말을 쓰다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니 그 지방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가 급하면 사투리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제우스신, 헤르메스 신이 강림하셨다고 소리쳤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들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하려고 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바나바를 <제우스> : 주신으로

바울을 <헤르메스> : 제우스신의 대변자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바나바를 더 높이 보았을까요? 성령 하나님은 바보에서 리더십을 바나바에게서 바울로 옮겼는데,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나바를 주신으로, 바울을 주신의 대변자로> 보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눈에 바나바와 사울의 외모가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바나바의 외모는 = 굉장히 키가 큰 미남형 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 바울행전이란 외경에 이렇게 바울을 소개합니다.

“(오네스포루스)가 오고 있는 바울을 보았을 때, 그는 작고 대머리였으며 다리를 절름거렸지만 당당한 자세를 취하였고, 일자 눈썹에 다소 매부리코인 그는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지극히 인간적으로 보이는 그는 바로 천사의 얼굴을 가졌다.”

바울의 외모는 볼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나바를 주신으로, 설교를 하는 바울을 주신의 대변자로 여기고 제사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닙니다.”(행 12:22)라는 소리를 듣고 좋아해 결국은 충이 먹어 죽은 헤롯 아그립바 1세 같았으면 어떻게 할까요? 세상에 이보다 좋은 대접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을 신처럼 대접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욕구 속에는 신의 위치에 올라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4-15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8절도 보세요.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자신들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하려는 그들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는

먼저,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당시 옷을 찢는 행동은 신성모독에 대한 강렬한 혐오감을 느낄 때 하는 행동으로 보통 4인치(10cm)나 5인치(13cm) 정도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다>고 말했고,

마지막으로 - <제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런 태도에 들어있는 그들의 신앙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목회자 가운데(부흥했다고, 설교를 잘한다고 등등), 성도들 가운데, 특별히 조금 은사를 가진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나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송가에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라고 합니다.

시편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주기도문 마지막 소절에도 영광을 누구에게, 언제까지 돌려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영광을 언제까지? 영원히

영광을 영원히 누구에게? 아버지에게 돌려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우리가 가로채면 헤롯 아그립바 1세 처럼 우리 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향하여 설교를 하면서 15절 하반 절에 “...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라고 하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를 명확하게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과 예수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문제의 해답은 예수님에게 있음을 알고, 찾으셔서 예수님이 주시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나에게 신의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어떤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의 목적, 우리 교회의 존재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도 록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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