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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oL1RTZqqNEk
본문 사도행전 17:1-9
설교자 권오진목사
설교일 2018-03-18

 3월 18일 주일 설교동영상은 녹화하지 못했습니다. 음성으로 대체합니다.

 

사도행전 17:1-9 데살로니가에서

 

유럽에서의 첫 번째 선교지인 빌립보 선교를 마친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로 선교지를 옮깁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의 거리는 약 150km 정도가 됩니다. 하루에 100리 정도 걸었다고 생각해도 4일이나 걸리는 길입니다. 그들은 낮에는 걷고 밤에는 잠을 자는 식으로 데살로니가로 오게 됩니다.

<자료 1, 디도의 일기>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기를 소설로 쓴 진 에드워드 목사의 <디도의 일기>에 보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 중간지점까지 왔을 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들어가면 십중팔구 박해를 받겠지? 다시 한 번 기쁜 마음으로 핍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매질은 없을까? 또 채찍질을 당하면 어떡하지? 구브로에서도 정말 심하게 맞았었지, 배가 파선한 적도 있었어. 갈라디아에서는 흠씬 두들겨 맞고, 돌팔매질까지 당했어. 유대 땅에서는 기피인물이 됐고, 맞아, 빌립보에서는 태형을 맞았지!

이제 데살로니가에 거지반 다 와 가는데, 이번에도 기쁜 마음으로 성에서 쫓겨날 수 있을까? 미움과 속임수, 거짓말에 시달리면서도? 온갖 학대를 감내하고 쓰라린 상처를 견딜 수 있을까? …”

 

빌립보에서 나와 데살로니가로 향하고 있는 바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39대의 태형을 맞은 몸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을 것입니다.

하여간 그런 몸과 마음으로 도착한 곳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우리 함께

1절을 보십시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자, 참고로 선교여행 지도를 한 번 보십시다. (자료2 : 지도)

빌립보에서 서남쪽 52km 지점에 암비볼리가 있고, 압비볼리에서 서남쪽으로 45km지점에 아볼로니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볼리니아에서 남서쪽으로 60km 지점에 데살로니가 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바울일행은 압비볼리, 아볼로니아에는 전도하지 않고, 데살로니가로 와서 전도를 합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아무리 도시가 작더라도 그곳에도 분명 구원할 영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도 전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바울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쳤을까요?

 

※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친 이유?

첫째, 빌립보처럼 회당이 없었기에

빌립보에서 바울 일행은 회당이 없는 곳에서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절실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회당이 없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건너뛰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지정학적인 이유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빌립보는 마게도냐에서 가장 큰 성읍이었고,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니 수도인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면 그 효과가 작은 도시로 퍼져 갈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연못 중앙에다 돌을 하나 던지면 그 물결이 중심부에서부터 연못가에까지 미치는 것처럼, 인구 2만 5천 명 정도 살고 있는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하면, 자연스럽게 복음이 주변의 작은 도시들에게 전달될 것을 알았기에 지나친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생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데살로니가 전도로 그 영향이 그 주변 전 지역(마게도냐)에 퍼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바울이 도착한 데살로니가로 가 보십시다.

<마게도냐의 수도이며 인구 2만 5천 명 정도 살고 있는 데살로니가 선교를 바울은 어떻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2-3절을 보십시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2절을 시작하는 말씀에 보면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의 선교도 <바울의 관례대로> 다시 말하면 <바울의 선교의 습관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에는 어떤 습관이 있었을까요?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주일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유대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킵니다.

 

둘째, 회당을 찾았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교회를 찾았습니다.

이는 1차 전도여행에도, 2차 전도여행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항상 효과적인 전도를 하기 위해서 회당을 찾아갑니다. 빌립보에서는 회당이 없었기에 기도처를 찾아간 것입니다.

 

셋째,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설교를 한 것입니다.

2절 하반절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라고 하는데, 구약 성경을 읽고 그 말씀 강론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로 하면 강해설교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의 설교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한국교회의 설교 문제점을 지적하라면, 설교자가 본문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설교자가 하고 싶은 자신의 이야기나, 세상의 이야기를 설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부흥사들의 설교를 보면, 본문은 읽어놓고 유머나 이야기를 듣고 웃고 은혜 받았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는지를 말씀하는 것이 바른 설교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그렇게 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넷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3절에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스데반, 베드로, 바울의 설교는 결국 같은 패턴입니다.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그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패턴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말씀을 강론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은 바울이 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복음을 전했던 패턴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한 사역이 나옵니다.

① 안식일에 – ②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③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이사야 61:1절 이하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는 ④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선포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해 놓은 메시아가, 바로 나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선교패턴을 바울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하여간 이렇게 바울이 평소에 선교하던 습관대로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4절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는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바울의 전도 결과 – 헬라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또한 “적지 않는 귀부인”도 믿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귀부인>은 영어성경에 는 “지도급 여성들”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지도층에 있는 여성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의 행적 모두를 기록해야 했기에 <데살로니가에서 있었던 선교의 내용을 자세히 적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도행전을 보면서, 바울이 자신이 선교한 지역에게 보낸 편지를 겸하여 보셔야 말씀이 더 실감이 있게 이해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빌립보 선교를 이해하려고 하면,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빌립보교회에게 보낸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합니다.

데살로니가선교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하려고 하면 어떤 말씀을 읽어보면 좋겠습니까? 데살로니가 전, 후서 읽어보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합니다.

 

제가 데살로니가전서를 근거로 두 가지 정도 말씀해 보겠습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설교를 듣는 태도입니다.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 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 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고, 바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을 바울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씀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시대는 말씀의 홍수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성도들 중에는 말씀에 기대를 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말씀을 들은 데살로니가교인의 반응

① 말씀의 역사가 생활에서 나타났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이 말씀을 조금 더 설명하면 지금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의 열매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 사랑, 소망>은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조금 고급스럽게 정리하면 <기독교 기본진리는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이고, <기독교 기본 진리에 대한 응답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내적인 것인데 비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에서 <역사, 수고, 인내>는 외적인 표현을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에는 - 역사가 일어나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 수고가 따라야 하며,

도적같이 임할 재림을 소망하는 사람은 -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세 안식일에 복음을 듣고, 물론 어떤 학자는 길게 8개월 정도 바울이 머물렀을 것이라고 보는 분도 있지만, 하여간 성경대로 그저 한 달 여 정도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②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갔다.

데살로니가 1:7-8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게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들이 얼마나 믿음 생활을 잘 했던지 그 주변으로 널리 소문이 퍼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교회 아름다운 소식이 알려지니 우리교회를 와 보고 싶어 하는 교회가 생기고 실제적으로 답사를 오는 교회가 있었습니다만, 여기에서 만족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바른 신앙생활을 함으로 주변으로 더 좋은 소문이 퍼져나가는 교회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으로 변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세요. 짧은 시간 복음을 접했지만 그들은 믿음, 소망,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떤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0년 전의 내 모습보다 내 신앙의 인격이 더 성숙했는가?

아니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가?

그것도 아니면 10년 전에 비해서 지금이 더 퇴보되었는가?

어떤 유형입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잘 아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어제보다 더 낳은 신앙생활을 오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됨으로 우리교회가 나날이 변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다시 본문으로 다시 가 보십시다. 우리는 4절에서 데살로니가 전도의 결실을 보았고,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을 통해서 더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제는 데살로니가에서 아름다운 선교의 열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도가 잘 되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에도 핍박이 다가왔습니다.

5-9절을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이 말씀에 보면 핍박의 근본 원인을 5절에 “유대인들은 시기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왜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보고 시기했을까요?

<바울일행과, 그들 자신이 비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해 보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유대교 – 구약 성경을 읽었지만 - 메시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예배는 드렸지만 - 형식만 남았을 뿐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기독교 – 구약 성경에서 - 예수님을 발견했고,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배 때마다 -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바울일행이 시기가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심리학적으로 보면 우리를 파괴시키는 무서운 것이 <열등감과 비교의식>입니다.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관한 몇 사람의 명언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시기의 근본 원인은 열등의식이다”

심리학자 <레스비>는 “악마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교의식이다”

의학박사이며 성형외과 의사인 미국의 <맥스웰 말츠>(1889∼1975)는

“세상사람 중 적어도 95%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이들의 말을 정리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비교의식은 열등감을 낳고, 열등감은 시기를 낳는다.>

 

여러분은 <비교의식, 열등감, 시기>에 자유하십니까? 사실 자유롭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파트 평수, 명품 가방, 옷, 신발, 머리 스타일 등 세상적인 것을 비교하면 열등감을 갖고, 가진 자에 대하여 시기를 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목회자, 중직자, 성도에게 자기를 비교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시기합니다. 또 가끔은 시기가 지나쳐 핍박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시기 질투는 – 자기 자신과 자기 마음을 망칠 뿐 아니라.

그 대상도 망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세요. 유대인들이 바울일행을 시기하여 어떤 행동을 합니까?

① 시장 깡패를 동원합니다.(5절) - 종교인이 깡패를 동원합니다. 기막히지요?

이런 현상은 오늘 문제 있는 교회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교회에 용역을 동원합 니다. 경찰이 출동합니다. 본문의 내용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② 바울을 잡으려고 했습니다.(5절)

바울을 못 잡으니, 대신 바울의 친척이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머물렀던

야손과 교인들을 잡았습니다.

③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합니다.(6절)

유대인들이 언제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충성했다고, 고발하는 내용을 보면 이들이 가이사의 명령을 거역하고, 대신 예수가 그들의 임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④ 결국 잡혀간 야손과 나머지 사람은 보석금을 주고 풀려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유형입니까?

- 참 복음을 듣고 감격하고 변화되어 가는 유형입니까?

- 형식만 있어서 은혜 받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보면 시기가 나고 질투가 나는

유형입니까?

우리 모두 매 주일 복음을 듣고 감격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변화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과 우리교회의 신앙의 소식이 널리 소문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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