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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pr0Gz3tKXvM
본문 사도행전 21:1-16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8-07-22

사도행전 21:1-16   바울의 겟세마네

             

  우리는 앞 장에서 바울과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밀레도 성도들이 작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무릎을 굻고 기도하며, 울음을 참지 못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그 여정을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바울의 3차 전도여행로>를 보시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밀레도 → 고스(1박) → 로도(1박) → 바다라(1박) → 베니게 행(페니키아) 배를 타고 출발  → 구브로 섬(통과) → 두로 도착(7일) → 돌레마이(1박) → 가이사랴(여러 날) → 예루살렘 도착

이 여정 중에 두 곳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두로 에서의 일>입니다.
그 내용이 3절 하반 절부터 6절에 나옵니다.
3절 하반절 “두로에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6절은 같이 읽어 보십시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러분, <두로>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고라신과 벳세다>의 불신앙을 지적하시면서 두로와 비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1 에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두로에 와서 전도를 하신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두로를 참 좋게 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두로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도 두로에 도착해서 1주일 머물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른 곳에서처럼 말씀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주간 머물면서 주 안에서 사랑을 나눈 그들이 헤어지는데 그 헤어지는 장면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5-6절을 다시 보세요. “이 여려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들이 볼 때는 평범한 말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인천공항나 김해공항을 가보면 단기선교를 가는 팀들이 비행기를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둥글게 서서 손을 잡고 기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 때는 기독교인이 극 소수였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기독교인들을 유대인과 헬라인이 핍박했을 때입니다. 그러니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기독교인임을 나타내기 힘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바울과 헤어지면서 <공개적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밀레도에서 헤어질 때에도 보세요.
사도행전 20: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굻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밀레도에서도 공개적으로 모든 성도가 합심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기도의 자세는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식당에 모일 때, 여행을 할 때, 어디든 중요한 자리라고 하면 거기에서도 공개적으로 온 성도들이 합심해서  떳떳하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당당함을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 그들은 <무릎을 굻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닷가에서 무릎을 굻어 기도하면, 편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밀레도에서도, 두로 에서도 무릎을 굻을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성도들은 무릎을 굻어 기도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           했습니다(단 6:10).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땅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왕상 18:42).
솔로몬은 성전헌당식을 할 때 먼저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서 기도한           후에, 일어나 백성들에게 축복을 했습니다(왕상 8:54). 
에스라는 포로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이방 여자들과 통혼 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무릎을 꿇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에스라 10:1).

  <신약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베드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사도바울도 로마에서 감옥에서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굻고 기도했습니다.

이와 같이 신구약을 막론하고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기도의 자세는 무릎을 꿇는 자세>였습니다.

그렇다면 <무릎을 꿇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두 곳 말씀을 비교해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열왕기상 19:18).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로마서 11:4).

  이 말씀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것은 = ‘바알에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 믿음의 표현이요, 경외하는 표현이요, 복종의 표현이요,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표현이요, 헌신의 표현인 것입니다.>

주중에 장로님 가정에서 초복이 지났다고 교역자 전체를 식사대접을 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새로 오신 전도사님이 새벽기도회를 왜 소예배실에서 하십니까? 물었습니다. 제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빌립보서 2:10 에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굻게 하시고”라고 하시며, 모든 무릎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의 자세는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 자세는 어떻습니까? 요즈음 대다수의 교회는 의자에 앉아서 기도합니다. 우리교회도 소예배실에는 다리가 아픈 분들을 위하여 의자를 4개를 비치했습니다. 어디에서 기도하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성도라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것>을 알고 기도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가이샤라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다.
8-9절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다른 집이 아닌 예루살렘교회에서 처음으로 새운 평신도지도자 7명 중 하나인 <빌립 집사>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그냥 대충 보시는 분들은 ‘그렇구나!’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인데, 이 내용은 보통 내용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기점으로 20년 전으로 내려가 보십시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성경을 몇 절을 읽어드리는 편이 빠를 것 같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행전 8:1).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사도행전 8:4-6).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핍박자였습니다. 스데반집사를 죽이는데 1등 공신이었습니다. 그 핍박을 피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때 빌립집사도 사마리아로 내려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20년이 지난 지금은 예수님의 일꾼이 되어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예루살렘에 있었던 핍박부터 시작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저는 이런 아름다운 일들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핍박자였는데, 전에는 무신론자였는데, 세월이 흘러 함께 동역자가 되어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는 자들이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빌립집사의 집에서 우리가 찾을 기도제목은 <빌립집사의 가정은 신앙의 명문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딸이 네 명 있었는데 모두 “예언하는 자”였다고 소개합니다. 당시는 아직 성경이 다 기록되지 않을 때였기에 예언자가 필요했는데 딸이 예언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딸도 모두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도 빌립집사와 같은 <신앙의 명문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이렇게 두로에서 있었던 일과,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씩 생각해 보았습니다.

셋째, 지금부터는 <두 지역에서 있었던 공통적인 일>을 생각해 보십시다.
공통적인 사건의 내용부터 보십시다.
<두로에서> 
4절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       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두로에 있는 제자들(성도들)이 –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이유는 가면 잡혀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가이샤라에서>
10-12절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가이샤라 빌립집사의 집에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내려왔습니다.
아가보는 예루살렘 출신 선지자로서, 이미 안디옥에서 “천하가 큰 흉년이 들리라”(행 11:28)고 예언을 했고, 그 예언대로 주후 44년에서 47년까지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에도 “성령으로 말씀했고”(행 11:28) 그 말씀대로 성취가 되었는데, 그가 지금은 가이샤라에 와서 바울에 대해서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행동으로 예언합니다. 11절에 있는 대로 바울이 사용하는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묶고는, (말로) 예루살렘으로 가면 이 띠 임자를 이렇게 결박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화 되었습니다.  
밀레도에서 -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                린다 하시나”(행 20:23)
두로에서 -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4절)
가이사랴에서 -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11절)

그러니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것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려고 자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아는 모든 성도들은 가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입니다. 밀레도에서도, 두로에서도, 가이샤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바울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성도들과 동역자들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가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사도행전을 강해하면서 오늘 21장의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사도행전 21-28장까지의 전체 주제는 <사도바울이 겪을 핍박과 환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바울은 <핍박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는 곳곳마다 성도의 입을 통해,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동역자들의 입을 통해서 알려주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마십시오”(12절). 합니다.

선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 선택은 성도들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선택은 하나님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선택은 바울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을 저는 오늘 설교제목처럼 <바울의 겟세마네>라고 붙여보았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질것인가의 문제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때의 기도 모습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2-44).

결국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힘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우리는 직접 격어보지 않았기에 잘 모르지만 ... 우리의 이성, 지성, 감성을 다 동원해서 생각해보면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인해, 오늘 우리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핍박과 환난의 길을 갈지? 아니면 성도들과 선지자와 동역자들이 말리는 말을 듣고 그 길을 가지 않을지?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사실 바울은 자신의 길을 이미 결정했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더 굳게 다졌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결정은 한결 같았습니다.
이미 생각한 적이 있는 사도행전 20:24 을 다시 보세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본문 13절도 보세요.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이것이 바울의 결정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자신을 위해주는 성도들, 예언자들, 동역자들이 고맙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령님이 결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한다는 것은 말하셨지만, 성령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인정에 끌려 한 말일 뿐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인간의 말이 아닌,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이 바울의 겟세마네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사이에 갈등할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힘든 길, 어려운 길, 고난의 길 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진정 축복의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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