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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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_U1P-5UTvfE
본문 요한일서 3:13-24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8-12-23

요한일서 3:13-24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성경을 읽다보면 은혜가 되거나, 힘이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님들은 ‘아멘’하고 반응하며 형광펜으로 그 구절 밑에 줄을 치기도 하고, 암송도 하고, 더 좋으면 그 구절로 만들어 놓은 성구 패를 사서 거실이나 사업장에 걸어두기도 합니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좋은 말씀이라는 결정을 하시려면 두 가지 정도는 검증을 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 말씀은 누가 한 말씀인가?

둘째는, 이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한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검증작업을 하고도 ‘아멘’ 한다면 그 말씀은 정말 나에게 유익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검증에 통과하지 못하다면, 그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한 구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이 말씀은 싫어하는 성도님들이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도, 청소년에게도, 청년들에게도, 신혼부부에게도, 특히 사업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말씀보다 더 좋은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말씀이 좋으니 집 거실과, 사무실 한 벽면에 이 말씀이 기록된 액자가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검증하는 두 가지 방법대로 검증을 해 보십시다.

첫째, 이 말씀은 누가 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이나 욥이 한 말씀이 아닙니다.>

<욥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한 말>입니다. 빌닷은 나중에 젊은 엘리후에게 책망 받고, 하나님께도 책망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깨림직하지요?

 

둘째, 이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한 말씀인가?

이 말씀은 욥이 열 자녀 잃고, 재산 다 잃고, 건강도 잃어 욥의 인생가운데 가장 바닥이었을 때에 욥에게 한 말입니다.

그러니 빌닷의 말에는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욥, 지금 네가 당하고 있는 재앙과 고통은 네가 불의한 일을 행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기에, 그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 지금 너의 현재 상태가 아무리 미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워 창대케 되는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 안에는 인과응보의 사상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 가지 검증을 하게 되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말씀은 그리 좋은 말이 아니라, 빌닷이 욥의 가슴을 칼로 찌른 말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 구절을 자랑스럽게 거실이나 사업장에 걸어두지 못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가지 검증을 본문 18절에도 적용시켜 보십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오늘 설교제목이 이 구절에 있나오지요. 설교제목을 포함해 이 말씀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말씀이 되겠지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이 말씀에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를 설교제목으로 정한 것입니다.

 

첫째, 이 말씀은 누가 한 말씀입니까?

요한일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도요한이 어떤 인물입니까? 우리의 생각을 복음서의 말씀으로 돌려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 요한의 이름의 뜻은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

- 야고보와 형제지간입니다.

-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를 압축해 올라가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500여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마가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이 있었지요. 그 위에 예수님이 특별히 부른 70인 전도대가 있었습니다. 그 위에 예수님이 직접 선택한 12명의 제자가 있었고, 12명의 제자 가운데서도 핵심 3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결정적인 사역을 하실 때 동행했습니다. 예를 들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변화 산에서 변형되실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그러니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핵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한 일컬어 “예수님의 품에 있었던 자 / 예수의 가장 사랑 받은 사람”이었다고 말씀합니다.

 

- 하지만 요한은 인간적으로 보면 욕망도 많았고, 성격도 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치맛바람이 심했던 사람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히기를 원했다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실 때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불을 내려 멸하기를 원했습니다.(눅 9:54)> 그래서 꾸지람을 예수님께 들었습니다. 보통 성격이 아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너희들은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 번개가 친 다음에 하늘에서 “꽝”하며 크게 울리는 천둥소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요한은 사실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하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보살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 귀신 들린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삶의 의미에 갈급한 사람들을 찾아가시고 보살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부도 같이 살면 닮아가는 것처럼 / 성격이 급한 요한도 주님과 함께 3년을 생활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주님께 가장 사랑 받는 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도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면서 <보라 네 어머니라!>며 어머니처럼 섬길 것을 부탁하셨고,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리아를 집에 모셔두고 다시 십자가 아래로 달려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 “내가 목마르다 /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다 듣고 요한복음에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후에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성령 받아 베드로와 함께 교회의 기둥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후 천둥과 같은 성격은 사라졌고, 주님이 가지셨던 사랑이 충만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사도 요한을 12제자 중에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자연수명을 다해 서기 100년경, 90세의 나이에 평안하게 임종을 맞았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요한의 이야기를 하나 남겼습니다. 요한의 말년 설교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서로 사랑하라’ 다음 주일도 ‘서로 사랑하라’, 그 다음 주일도 ‘서로 사랑하라’고 설교하자 / 성도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도요한은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 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라는 말씀은 우레의 아들에서 → 사랑의 사도로 변한 요한이 한 말씀이니, 우리는 말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이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한 말씀인가?

역사가들은 사도요한이 90세까지 살았다고는 말하지만, 90세까지를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역했다고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대체적으로 바울이 전도해 놓은 소아시아 7개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를 돌보다가, 주후 67년 예루살렘이 전쟁에 휩싸이자 에베소로 왔을 것으로 봅니다.

요한은 에베소교회를 섬기면서 요한복음(주후 85-90년경)을 기록했고, 그 후 5-10년이 지난 주후 95-96년경에 요한서신(1,2,3서)을 기록했습니다. 그 후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 요한계시록을 기록합니다.

 

그러니 사도요한이 오늘 본문을 기록할 때는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지 60년이 넘었을 때입니다.

이때 교회 안에는 영지주의 이단이 들어와 교인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영지주의 이단의 주장은 예수님은 영으로만 존재하셨고, 육신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은 요한일서 1장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내 손으로 예수님을 만져 보았고,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내 귀로 주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지주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 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단의 교회 안에 들어오자 교인들 간에 사랑이 식어지는 것을 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사랑이시고’, 예수님도 ‘사랑의 삶’을 사셨음을 상기시키며 우리 성도들은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실천적인 사랑을 하라고 권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록배경입니다.

 

이 정도면 요한일서의 말씀에 대한 배경을 설명했다고 보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서 3가지로 권면합니다.

 

1. 형제 사랑의 필연적 이유(13-16절)

13-16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성도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유일하신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희생적인 사랑을 해 주셨지 않느냐?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면 우리도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들 하나 군대에 보내는 것도 그렇게 가슴이 아픈데,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희생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진한 아픔이 느껴지더랍니다. 그 성부 하나님의 사랑, 성자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성도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2. 형제 사랑의 방법(17-20절)

17-20절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지금 요한이 말씀하는 실천적인 사랑의 근거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 예수님은 온 몸이 썩어 들어가는 나병환자들의 몸에 손을 대시며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 예수님은 벳세다 들판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 안 으셨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의 사람을 먹이셨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가 되도록 이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 그 실천적 사랑의 극치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해서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할 때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실천적인 사랑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18절을 공동번역에는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실천적인 사랑은 사실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옆에 있는 성도에게 인사를 하면서 ‘사랑합니다.’ / 목회자에게 ‘목사님 사랑합니다.’라고 하기는 쉽지만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실천하면서 사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천적인 사랑을 묵상하자 금방 한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경험하신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교회가 없는 시골에 들어가서 전도를 하고 교인이 모여 교회를 건축하실 때였습니다.

지금이야 교회를 건축해도 설계사와 시공사에게 맡기고 교회에서는 감독만 잘 하면 되지 않습니까? 저희 아버지가 사역하실 1950-6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흙벽돌을 만들었습니다. 그 벽돌로 교회를 직접 지었습니다.

건축하는데 하루는 교회 일을 하다가 보니 늦은 저녁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군불을 지펴야 따뜻하게 잘 수 있었는데 군불지필 시간도 없이 일하시다가 피곤하셔서 그냥 찬 방에 주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도 모르는 사이에 방이 따뜻해 오더랍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와 보았더니 성도님 중 누군가가 와서 <군불을 지펴 놓고 가셨더랍니다.> 그 분이 누구였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그 일로 성도들이 아버지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립 서비스 lip service>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도, 옆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도 무엇인가 행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행동과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3. 형제 사랑에 따르는 결과(21-24)

21-24절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 두 가지 복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담대함을 얻는다.

21절 하반절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교회 항존직이나 제직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생활, 헌금생활, 기도생활, 봉사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저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일에 결석을 밥 먹 듯하고, 헌금은 하지 못하고, 봉사도 하지 않고, 더군다나 저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씀까지 하는 사람이라면 저를 만나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 대인관계를 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대로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친구로서 나갈 수 있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둘째, 기도 응답을 받게 된다.

22절 상반절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라고 합니다.

행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행함이 기도의 응답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한 사람 예로 들면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를 들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 백부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고, 특별히 <백성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거기에다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를 성경에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 되었다”(행 10:4)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정에서 최초로 성령을 체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실천은 기도의 응답의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교회는 요한사도가 사역했을 때처럼,

이단도 많이 설치고 또한 성도 간에 사랑도 식어지고 있습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천적인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도 행함과 진실함으로 성도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사랑하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고, 해외 선교지의 선교사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대림절 네 번째 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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