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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_uu_5HzHePk
본문 누가복음 24:1-12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9-04-21

누가복음 24:1-12   빈 무덤이 전하는 것 

저는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시골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없습니다. 대신 온 동네가 놀이터였습니다. 추수를 끝낸 논과 밭이 놀이터였고, 마을 우측 언덕에 있는 금씨 가문의 무덤이 놀이터였습니다. 시골에 크신 분들은 묘지가 얼마나 좋은 놀이터인지 아실 것입니다. 겨울이면 나무로 구루마(일본어로 차)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내려오면 스릴이 만점입니다. 눈이 내리면 비료 포대 하나면 그것을 타고 내려올 수 있었기에 묘지는 멋진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밤에는 묘지에 가지 않았습니다. 왜 가지 않았을까요? <무덤은 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나 아이들 할 것 없이 무덤에서 귀신이 나올까 무서워서 무덤 근처에 가기를 꺼려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옛날에도 했고,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무덤은 혐오시설>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납골묘 / 수목장 / 추모공원 / 화장터>가 들어서려면 동네 사람들은 쌍수를 들어 반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떨까요? 성경에도 무덤을 혐오시설로 바라볼까요?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몇 명의 여인이 무덤을 찾아갑니다.
여인의 이름은 10절에 <막달라 마리아 / 요안나 /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 다른 여자(이중 살로메(마가기록))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안식일이 지나고 새로운 일주일을 시작한 첫날, 아주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이들이 찾아간 곳은 예수님의 무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전 상황을 회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아무도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자가 나섭니다.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성경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요청했다고 말합니다. “당돌하다”라는 헬라어는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당돌한”요구에 빌라도가 응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몸을 깨끗이 닦지 못하고, 세마포로 대충 싸서 자기 소유의 바위 동굴에 안치한 후,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아 두었습니다.
이 초라한 장례식을 지켜보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1절에 등장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에 찢기시고, 못 박히시고, 창에 찔려 상한 주님의 몸이, 엉겨 붙은 피범벅 상태로 방치된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향품을 샀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제대로 염을 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음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안식일 다음날 새벽 일찍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을 어떻게 열지 걱정하며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에 나오는 무덤은 그다지 즐거운 장소가 아닙니다.
<무덤은 슬픔의 자리이고, 눈물의 자리이고, 실패와 패배의 자리입니다.>
<무덤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철저히 갈라놓는 자리입니다.>

우리도 무덤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의 장소, 성공보다는 실패의 장소, 만남보다는 이별의 장소>
그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덤입니다.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곳이 무덤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니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슬픔이 만성이 되고, 절망이 가득한 여인이었습니다.
② 나병 환자들 또한 그랬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철저히 격리되어 살아갑니다. 이미 죽은 몸입니다. 무덤과 같은 입니다.
③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누워있는 병자가 그랬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희망 고문에 시달려 이미 무덤이 되어 버린 사람입니다. 연못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망조차 사라지니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④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습니다.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주전 587년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무너진 후 이스라엘은 무덤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⑤ 우리나라 청년들이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해 절망하는 청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이미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이 살아갑니다. 무덤이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⑥ 우리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언젠가부터 교회에서 갓난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입니다. 이대로 가면 50년 후 교회는 박물관이 될 것이라는 조롱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눈에 보이는 무덤만 무덤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다면, 내일이 없다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면, 그 자리가 무덤입니다. 우리 삶이 무덤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일을 생각하면 기운이 솟아납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아니면, 절망과 실패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무덤을 향해 가는 여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정성껏 섬기며 따르던 예수님은 이미 죽었습니다. 비참한 시체로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도리를 다하기 위해 염을 하러 갑니다. 그런데도 염려로 가득합니다.
“누가 돌을 굴려줄까?” --- 헌데 이게 웬일이니까? 무덤 앞에 다다르자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조심스럽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처음 보는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찬란한 옷을 입고 있다>는 기록을 유추해 보면, 아마도 이 청년은 천사였던 것 같습니다.
여인들이 놀라워하자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5절 중반에서 - 6절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천사가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 해 주신 말씀을 기억해 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31-33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경청해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를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여러분! 약속은 누가 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하나님께서 예전부터 약속하셨고, 손수 그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너희들에게 말했다.> <보라! 무덤이 텅 비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덤을 텅 비게 만드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쉽게 믿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비었다는 말씀은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활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다른 방식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합니다.

-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빈 것은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예수님이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여인들과 제자들이 착각을 하고 엉뚱하게 빈 무덤에 갔다고 주장합니다.
- 제자들이 실제를 본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빈 무덤을 해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빈 무덤을 인정한다는 것은 –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 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존재를 제대로 경험하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할 수만 있다면 빈 무덤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그랬습니다. “1년 안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하나님과 두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라가 속으로 비웃은 것을 지적하자 그는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난 여인들도 그저 벌벌 떨기만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부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이처럼 두려운 일입니다. 빈 무덤은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게 되면 참으로 새로운 일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무덤과 같은 인생이 달라집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 
나병환자도,
38년 된 병자도,
멸망했던 이스라엘도,
우리 청년들도,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도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믿으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 그 모든 환경이 변하고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할까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 이삭을 낳았습니다. 
나병환자도, - 불치병에서 치료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멸망했던 이스라엘도, -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 청년들도, - 젊은이답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도 – 다시 부흥시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그의 무덤을 비게 만든 사건을 알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면서 가장 사랑했던 <베다니의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 3남매 가정입니다.
이 가정에 가장 역할을 했던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마리아 마르다가 흘린 눈물의 양은 우리가 감히 짐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고 4일 만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셨지만 마르다, 마리아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아픈 환경을 뒤집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당황하면서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주후 3세기 유대교 문서에 따르면 삼일 동안 죽은 자의 영혼은 무덤을 맴돌며 자기의 몸으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기간을 지나 시신이 얼굴이 변하는 것, 즉 몸이 부패되는 것을 보면 죽은 것을 보면 죽은 자의 영혼은 단념하고 떠난다고 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나흘 동안이나 무덤에 있고, 심지어는 부패가 시작되어 냄새까지 나는 나사로가 살아난다는 것이 마르다 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당황하며 주저하는 마르다 에게 예수님은 단호한 어조로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

드디어 무덤을 막은 돌이 옮겨지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라자레, 듀로 엑소!>
          <나사로야 밖으로 나와라!>(43절)
우리는 여기서 무덤으로 상징된 죽음 앞에 신적 권위로 당당히 외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 죽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수족이 베로 동여 있고,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로 나온 것입니다. 당연히 죽은 나사로가 나왔으니 – 그 무덤은 비게 된 것입니다.

(결론) 부활절 아침 <성도님들과, 오늘 초대되어 오신 분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고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죽은 지 4일 되는 나사로가 있던 무덤에, 예수님이 <나사로야 밖으로 나와라!>외치자, 죽은 자가 살아서 나왔고, 나사로의 무덤은 비게 되었습니다.

죽은 지 3일 되는 예수님의 무덤에 여인들이 갔을 때 천사들은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말씀해 주셨고, 주님을 감쌌던 수의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도 비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죽어 무덤에 들어가지만, 우리의 무덤은 어떻게 될까요?
요한복음 5:24-25절에 이미 여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경청해 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살아나기에> 우리의 무덤도 빈 무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사로의 빈 무덤>은 <예수님이 빈 무덤>이 되고, 이것이 후에 <우리의 빈 무덤>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알면, 지금 현재 내 삶이 죽음의 환경 같을 지라도 부활하신 주님만 영접하고 믿는다면 <살아나는 환경으로 변화됨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셔서, 죽음의 삶이 아니라, 생명의 삶,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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