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14-21 적대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5월 초 타 교회 안수집사님 한 분을 목양실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도 한 분 계셨습니다.
이 집사님은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시는 분입니다.
새벽기도를 가지 못하면, 출근하기 전 직장 근처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분입니다. 수요일 저녁에 일이 많아 본 교회에 가지 못하면 직장 근처 교회에 수요예배를 드립니다.
한 주일에 한 번은 가정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아버지는 장로님으로 세 번이나 예배당을 건축할 때 건축위원장을 하신 분으로 든든한 배경이 있음에도, 장로가 되려고 하기보다 안수집사의 자리에서 충성하시는 분입니다.
집사님을 만나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힘드시지요?> 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예 목사님! 많이 힘듭니다. 목회도 힘드시겠지만 지금 성도들이 살아가는 것이 말이 아닙니다. 목사님! 성도님들을 볼 때마다 위로하는 말씀을 많이 해 주십시오” 하시는 것입니다.
집사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 머물며 교회를 주로 생각하고, 교회의 힘든 것에 집중하다 보니
세상에서 힘들게 살다가 예배하기 위해 오시는 성도를 위로해주는 데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예배하는 여러분이나, 영상으로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씀도 <위로의 말씀과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필요할 것입니다.
부탁드릴 것은 꼭 설교를 통해서 위로를 받지 못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성경을 보고, 큐티를 하고,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위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이 위로에 대한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 아닙니다. <위로>와는 정 반대되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이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머리에 떠오른 분들은 이런 분들이었습니다.
① 형들에게 은 20에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
② 사울 왕의 사위이자 신하 그리고 전쟁의 영웅이었던 다윗
③ 1차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제국과 이어지는 바사 제국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보여준 다니엘
④ 우리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던 스데반
⑥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양자로 입양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 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셨던 손양원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이분들이 보여준 믿음은, 우리의 상상 이상입니다.
그러니 그들 모두 천국 간지, 오래되었음에도 우리는 <요셉, 다윗, 다니엘, 스데반, 손양원>을 떠올리며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신앙의 영웅들이 생각나는 이유는?
본문에서 바라는 기독교인의 상이 이렇게 높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과 적대적인 세상과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세상에도 기독교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흔히 그들은 <법 없이도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 사람은 그런 좋은 사람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적대적인 세상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하면서 오늘 주어진 말씀대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작하는 말씀과 마치는 말씀만 보세요.
14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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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두 구절만 해도 <엄청난 말씀이고, 말씀대로 실천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어려운 말씀이고, 설교하는 저에게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땅에 말씀대로 산다는 누구에게도 어려운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에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시는 이유 3가지>
첫째, 하나님이 바라는 성도가 이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2021년을 시작하면서 신년 특별 새벽기도회에 <산상보훈>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강해를 시작하며 이런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렸습니다.
‘코로나로 기독교가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산상보훈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산상보훈 말씀도 우리에게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7:1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가 살아내기는 벅찬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자녀(성도)의 모습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관점으로 보셔야 합니다.
둘째, 성령 충만하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문을 보며 생각났던 인물 <요셉, 다윗, 다니엘, 스데반, 손양원 목사>님은 오늘 본문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연인 000, 자연인 권오진으로는 도저히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시고, 예수님이 영으로 내주하시면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성도가 마음에 악을 품고, 한을 품고 살면 행복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행복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힘들고, 어려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을 살펴봅시다.
본문에는 <그리스도인과 적대적인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큰 원칙 2가지>를 말씀합니다.
1원칙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8절)
전제는 ‘할 수 있거든’ 입니다. 비록 한계가 있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적대적인 사람들과 화목하라(평화하라) 는 것입니다.
2원칙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이 두 가지 원칙을 이루기 위해 <실제적인 행동지침 4가지>를 말씀합니다.
<실제적인 행동지침 4가지>
1. 겸손하라(16절)
16절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우리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을 대할 때, 알게 모르게 교만하게 대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과 달라. 나는 구원 받았어!”
“너희들은 지옥 가지만, 나는 천국 갈 사람이야!”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지만,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 하며 영적인 잣대로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며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은 교만하고, 똑똑해서 말만 잘한다.> 라며 기독교인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진짜 대단한 자입니까?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인지 들어보세요.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대단한 것이 있어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대로 세상 사람과 비교하면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적대적인 세상 사람들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겸손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2. 공감하라. (15절)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여러분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며 공감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감하려면, 상대방의 입장에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기뻐야지요? 그런데 마음이 어떻습니까? 사촌이 논을 사면 자신의 마음속에 시기가 들어와요! 그러니 겉으로는 축하하는 척하지만,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 배가 아픈 것입니다.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 349년경–407)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보다는 쉽다.
우리가 웃는 자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고매한 인격을 필요로 한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 – 대체로 쉽습니다. 상대방이 좋지 않은 일 때문에 울 것이니, 함께 울어주는 것이 힘들지 않지요? 그런데 이것도 잘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장례식장에 가 보면, 유족들은 슬픈데, 문상하는 사람 중에는 큰 소리로 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힘든 분도 있지만, 대부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웃는 자와 함께 웃기는 쉽지 않지요? 상대에게 좋은 일, 기쁜 일이 있기에 웃는데 시기가 나서 웃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웃이 <웃을 때 웃어주고, 울 때 울어주는 공감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3. 축복하라. (14절)
14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복을 빌어주는 것은 <자신과 공감대를 함께 하는 사람이나, 믿음의 동료들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목사가 예배시간에 축복기도를 할 때는 대상이 믿은 사람들입니다.
아론의 축복기도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〇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〇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대제사장 아론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빌어주는 축복입니다.
바울의 축복기도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축복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성도가 아니라, 박해하는 자를 향하여 저주하지 말고 대신 축복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을 내가 빌지만, 복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십니다.
문제는 <내가 축복한 사람이 복을 받을 그릇이 되지 못하면, 그를 위해서 빈 복이 나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70인 전도대를 파송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5-6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〇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어느 집에 가든 “샬롬”이라 선언하며 인사하라는 것입니다.
샬롬이란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인사는 “안녕하십니까?”라고 복을 받았는지, 아닌지 질문하는 것이 인사입니다. 약간 문제가 있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복을 빌어주는 인사를 합니다.>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인사했는데, 그 집에 있는 사람이 그 평안을 받을 사람이면 그에게 평안이 머물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인사하는 사람에게 복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리적인 면으로 치면 <내가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자격 없는 자일수록, 내게 복이 돌아올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복 받은 비결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배시간마다 복을 비는 훈련을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함께”하면
여러분은 저에게 “목사님과 함께”하고 인사해 줍니다.
이것이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적대적인 세상 사람들에게, 박해자에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4. 원수라도 먹여주고 마시게 하라. (19-20절)
19-20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〇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원수를 갚는 악역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원수를 먹여주고, 마시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는 순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하면서 반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한 로마서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구원받기 전 하나님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에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절)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절)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10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원수들을 먹여주고, 마시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수를 잘 해 주면, 결국 그가 그 사랑을 깨닫는 순간 머리에 숯불을 쌓은 것처럼 / 전신이 뜨거운 감동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설교를 요약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적대적인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불신자들과 덕스러운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고, 저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 쳐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할 때 성령님이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실패했어도 내일 또 도전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