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조회 수 130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1월 18일
창세기 13:1-13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

지난해는 개인적인 시간이 부족해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금년 들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금년 들어 두 권을 읽었습니다. 두 번째 읽은 책은 <간디 자서전>입니다. 700페이지가 넘는 조금 두꺼운 책인데 간디에서 대해서 깊이 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금년 첫 번째 읽은 책은 <목사의 딸>이란 책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는데, 합동측 박윤선 목사님의 딸, 박혜란 목사가 쓴 책입니다. 보통 통합 측에는 이상근목사, 합동 측에는 박윤선 목사라고 할 정도로, 합동 측에서 박윤선 목사님이라고 하면 목사로, 신학자로서 특별히 성경전권을 강해한 주석가로서 유명한 분이고, 목사님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십니다.

그 박윤선 목사의 차녀인 박혜란 목사는, 아버지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목사의 딸로서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아가면서 겪었던 가정생활, 신앙생활, 그리고 마흔 다섯 살에 미국 덴버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면서 신앙관을 하나하나 적립하게 된 이야기는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박혜란 목사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자신이 살아온 75년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가 갖게 된 신앙관을 세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바라보는 것, 그것이 닮아가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려고 힘쓰는 대신, 하나님을 주시하라.
하나님을 계속 주시하면, 그분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2.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라
우리가 노력해서 무엇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의 보조에 맞춰서 걸어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에녹과 노아의 특징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한 것 보다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3. 세상으로부터 물리적인 고립이 아니라 이질적으로 분리되라.
믿는 사람들이 세상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은 물리적인 거리를 둠으로써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되 영광스러운 질적 차이로 거리를 지켜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70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를 하면서 갖게 된 <그의 세 가지 뚜렷한 신앙관>은 우리도 가지면 좋을 것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목사의 딸”을 읽으면서, 목사의 딸로 힘들게 살아온 것도 공감을 하고, 대외적으로 훌륭한 목사의 딸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힘든 그 삶도 공감을 하면서도 // 모태신앙인 그가 진작 신앙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잘 하겠습니까? 너무 어려운 질문인가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면 후회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우리보다 먼저 신앙 생활했던 선배들의 삶을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장점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에서 배우지 말아야 할 단점은 우리가 배격하는 것입니다.

박혜란 목사가, 아버지 박윤선 목사의 삶을 돌아보면서, 아버지의 삶이 신학자로서 목회자로는 훌륭했지만, 부인과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지 못해서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 후배목사인 저는 목회도 잘 해야 하겠지만, 가정 목회도 잘 해야겠다고 받아들이고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의 모델적인 인물을 통해서 장, 단점을 파악하고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려서 그 분의 훌륭한 점만 닮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세기 13장 말씀의 최초 발단은 <풍부함>에 있었습니다.
2절에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재미있는 말이지요?
가난할 때는 조용하다가, 풍부해 지면 시끄러워집니다.
이는 개인도, 부부사이도, 형제자매 사이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집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교역자 생활을 하셨고, 7남매를 키웠기에 가난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저희들에게 남긴 재산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빚만 남겼지요. 보통 생각하면 불행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희 7남매는 만나서 예배할 때마다 “저희 집이 가난했음을 오히려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가난했기에 유산에 대한 이야기 나올 필요가 없고, 7남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똘똘 뭉치니 남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좋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물질이 풍부한 가정을 보세요. 물질 때문에 부부사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형제들이 갈라집니다. 물질을 더 가지려고 싸우고 분쟁하는 것을 쉽게 봅니다.

이는 교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교회분쟁의 첫 번째 이유가 재정때문이라고 이번주 기독공보에 발표했습니다.
선한목자 유기성 목사님이 설교하신 내용 중에 자신의 친구 목사님 교회 이야기를 든 적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친구가 섬기는 교회는 시내 요지에 있었는데, 재건축이 들어가 많은 보상을 받고, 시외 지역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넓은 땅에 건축을 하여 입당을 했습니다. 보통 교회 같으면 건축하면 대출로 인해서 힘든데, 그 교회는 건축하고도 돈이 많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남은 돈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장로님대로, 안수집사는 안수집사 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그 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생각하니 기가 막히더라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서 교회가 분란이 일어나 잘못하면 교회가 깨어질 것 같더랍니다. 목사님은 예배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돈이 아닙니다. 이 돈으로 인해서 교회가 어려워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돈 전액을 사회에 기부하십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돈을 전액 사회에 기부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교회가 잠잠해 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어떻게 해서 풍부해졌습니까? 아브람은 언제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창세기 12:16절에 나타납니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아브라함은 바로에게 많은 재산을 얻었습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땅에 살기 위해, 애굽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미모의 아내(메시지역: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사라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 수 있으니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동생이라고 하자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으로 올 정도로 믿음이 있었지만, 어려운 일을 당하자, 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채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애굽 왕 바로가 사라를 아내로 삼고자 하였고, 그 대가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라의 일로 바로에게 큰 재앙(중병)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런 극적인 일을 통해서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본문에 기록된 대로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정착한 벧엘을 본문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메시지 역에서는 “그곳은 전에 그가, 베델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었다. 아브람은 거기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자기 마음대로 갔다가, 다시 벧엘로 온 것은 신약에 나오는 탕자의 여정과 비슷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탕하다가 결국 아버지의 품으로 온 것과 같습니다.

벧엘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그 여정을 통해서 <믿음의 눈>을 분명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더 얼밀히 말하면 자신의 가진 내면의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굉장히 부유한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아들을 데리고 시골로 갔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삼일을 그들과 함께 하면서 보냈습니다. 삼일의 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때, 재미있었냐?." <아주 좋았어요, 아빠>
"그래,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알았어?" <예, 아빠>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그래, 무얼 배웠느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개가 한 마리뿐인데, 그 사람들은 네 마리더라고요.
우리 집에는 수영장이 마당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끝없는 개울이 쫙 놓여 있더라고요.
우리 정원에는 수입 전등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밤에 별이 빛을 내더라고요.
우리는 작은 땅 안에서 사는데, 그 사람들은 들이 한이 없더라고요.
우린 하인이 우리를 도와주는데, 그 사람들은 남을 도와주더라고요.
우린 음식을 사 먹는데, 그 사람들은 직접 길러 먹더라고요.
우리 집은 담장으로 둘려 싸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친구들로 싸여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들으며 망연자실(茫然 自失) 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들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빠, 고마워요,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알게 해주어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들이 보는 것과, 물질 많은 것이 곧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아버지가 보는 것은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게 된 <믿음의 눈>은 두 가지로 말 할 수 있습니다.
1. 믿음의 눈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서론에서 박혜란 목사님이 75년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가 갖게 된 신앙관을 세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째가 <바라보는 것, 그것이 닮아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라보는 것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려고 힘쓰는 대신, 하나님을 주시하라.
하나님을 계속 주시하면, 그분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두 구절을 인용하면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역대하 20:12 “...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모암과 암몬 연합군이 여호사밧을 치려왔을 때, 여호사밧 왕이 기도한 내용입니다. 승리는 누가했을까요? 여호사밧이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던 그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창세기 12:2-3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면, 자연적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부부지간도 오래 살면 <닮아간다>고 하지요. 전혀 다른 남남이 만나서 오래 서로 얼굴을 보고 살다보면 <얼굴 생김도, 말투도, 사고도, 가치관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사람들이 <진짜 닮았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갔다가 회복된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시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믿음의 사람,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자가 되어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선 회복해야 할 것이 <예배입니다.> 지난 주 찬양예배로 통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자가 어떤 사람인지 배웠습니다. 이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수요성령기도회에 나오도록 힘써야 합니다. 새벽기도회도 힘써 보세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의 눈은 <하나님의 눈으로(사물,세상, 사람)바라보는 것입니다.>
물질의 풍부로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 간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이 소식을 아브라함도 롯도 듣게 됩니다. 문제는 그들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7절에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지금 그들을, 가나안 원주민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지금 교인들과 교회, 그리고 기독교 단체가 명심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불신자들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면, 그들이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올 것이고, 우리의 삶으로 인해 그들을 전도하는 것이 힘들어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종들 간에 다툼이 있자, 그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롯과 해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땅을 선택함에 있어서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문화로 보면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은 파격적이었습니다.
땅에 대한 선택권 먼저 받은 롯의 행동을 10-1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본문에서 요단지역을 “바라보았다”고 하고 있는데, 이 말은 대충 바라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롯이 세상적인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탐심의 눈으로 모든 형편들을 조목조목 살펴보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롯의 선택은 실패였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롯의 선택은 육신의 눈으로, 계산적인 눈으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성경을 보면 영적으로는 그곳은 좋은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13절에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하나님의 눈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 정욕의 눈으로 본 결과, 롯은 악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롯의 나중이 어떻게 됩니까?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으로 바뀌었고, 딸들은 그에게 술을 먹이고 근친상간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롯도 아브라함도 몰랐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롯이 어떤 곳을 선택하든지, 나머지 땅을 갔겠다고 했습니다. 왜요? 그곳이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어지는 14-15절 보세요.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물론 우선은 척박한 땅 같아 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그에게, 하나님은 그가 보는 모든 땅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복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의 눈이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늦고, 조금 더 어려울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인줄 믿고, 조금 늦더라도, 조금 힘들더라도 <믿음의 눈으로 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창 13:1-13) 2015.01.19 1303
448 예수님의 동역자(막 1:14-20) 2015.01.26 920
447 더러운 영을 몰아내시는 거룩하신 분(막 1:21-28) 2015.02.02 838
446 모르시오? 안들리시오?(사 40:21-31) 2015.02.09 697
445 하나님의 영으로 이어지는 사역(왕하 2:1-18) 2015.02.16 824
444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최후의 승리(벧전 3:18-22) 2015.02.23 686
443 복음은 여전히 복음입니다.(골 1:19-23) 2015.03.02 699
442 공동체를 살리는 십계명(출 20:1-17) 2015.03.10 1421
441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엡 2:1-10) 2015.03.16 1087
440 밀은 부서져야 합니다.(요 12:20-33) 2015.03.23 707
439 고난주간에 되새기는 가상칠언(눅 23:26-38) 2015.03.30 1712
438 부활은 확실하다.(고전 15:1-11) 2015.04.08 676
437 예수 믿으면 좋은 이유(행 16:30-34) 2015.04.13 998
436 완전한 힐링(행 3:12-19) 2015.04.20 732
435 박해를 이기는 교회(행 4:5-12) 2015.04.27 763
43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일 5:1-3 / 골 3:21) 2015.05.04 792
433 사랑하는 자녀들아, 네 마음을 네게 다오(잠 23:15-19, 22-26) 2015.05.11 790
432 특권과 기회를 다루는 방식(눅 19:11-27) 2015.05.18 737
431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롬 8:12-17) 2015.05.26 1338
430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1-8) 2015.06.01 1472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