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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소 https://youtu.be/-DeRdHlaPMk
본문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과 결과(행 13:42-52)
설교자 권오진 목사
설교일 2017-12-17

사도행전 13:42-52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과 결과

 

사도행전에는 유명한 3대 설교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의 설교(2장)이고, 두 번째는 스데반의 설교(7장)이고, 세 번째가 바울의 설교(13장)입니다. 다 명설교인데 설교에 대한 반응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하루에 3,000명 5,000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은 설교 후 사람들의 돌팔매질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럼 바울의 설교를 들은 회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설교이야기가 나왔으니? 흔히 우리가 말하는 잘한 설교, 은혜로운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 생각해 보십시다.

중세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도원장이 햇병아리 수도사들에게 설교연습을 시킵니다. 그 중에 어떤 한 수도사에게 설교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수도사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무척 당황하여 얼떨결에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를 할지 아십니까?” 아무도 알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수도사가 “나도 모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이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 다음날 한 번 더 설교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이 수도사가 설교하러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사가 전날과 똑같이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어떤 설교를 할지 아십니까?”어제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예, 압니다." 그러자 그 수도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다 아는데 무엇 하러 설교합니까?" 그러고는 다시 내려왔습니다.

 

수도원장은 노발대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한 번만 더 해봐라.”

셋째날일 되었습니다. 그 수도사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를 할지 아십니까?”그러자 이제는 청중들이 절반은 알고 절반은 모른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도사가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주십시오.”그러고는 내려왔습니다.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이 수도원장이 박수를 치며 칭찬하기를 “이제까지 우리 수도원에게 행했던 설교 중에 가장 뛰어난 명설교입니다.”하며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도사가 말한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가 그 수도원의 표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설교란 먼저 말씀을 깨달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을 설교인 것입니다.

 

소망교회 곽선희 원로목사는 <잘한 설교, 은혜로운 설교에는 4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졸지 않으면 잘한 설교이다.

둘째, 모두가 잘 알아듣는 설교가 잘하는 설교이다.

셋째,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다음 주에도 설교를 들으러 와야 잘하는 설교이다.

넷째, 설교를 들은 사람이 다음 주에는 한 사람 더 데리고 나오는 설교가 잘 하 는 설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아직 저는 멀었구나! 생각해 봅니다. 그렇기에 저도 매 주일마다 노력할 테니, 여러분들도 설교자가 설교를 잘 할 수 있도록 협력해 주시고, 설교를 들을 때, 잘 한 설교가 되도록 졸지 않고, 매 주일 마다 은혜 받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오늘 생각할 주제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사도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해서 회당에서 설교한 내용을 지난 주일에 생각했었습니다.

17-41절까지의 긴 설교였지만 결론지으면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무덤에서 살아 나 셨는데, 이것은 구약에 예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체는 썩어 버 렸지만 예수님의 육체는 썩지 않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은 회중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응을 살펴보기 전에, 그 설교를 들었던 회중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십시다.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알려면? 비시디아 안디옥의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주전 6세기에 로마의 식민지가 됩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된 다음에 헬라사람, 로마사람, 유대사람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주로 모여서 사는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나름 자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 정치를 자랑했습니다.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으니 그렇게 자랑한 것입니다.

헬라사람들은 – 문화를 자랑했습니다. 헬라철학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유대사람들은 무엇을 자랑했을까요? 종교를 자랑했습니다.

당시 로마사람이나 헬라사람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긴 나머지 도덕적으로는 타락했습니다. 특히 성생활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생활이 엉망이면 누가 손해를 보게 될까요? 여자들이 손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헬라문화로마 문화에 살고 있던 여자들 가운데 종교를 <유대교로>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를 할 때도 이미 비시디아 안디옥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설교를 시작하면서 회중을 파악하여 회중을 둘로 나눠놓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16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 이방 지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교포를 부르는 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에게 설교하는 바울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세요.

바울은 이방지역에 태어난 정통유대인이었습니다. <길리기아 다소 출생>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이방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바울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분명히 알 것은, 나의 경험, 나의 삶, 나의 직장생활, 학업, 나의 경제력 등 모든 것은 —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기 위한 준비였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지금 현재 내가 주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으로 가서 42-43절을 보십시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여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은 회당에서 설교를 했는데 다음 안식에도 말씀을 전해 달라(앙코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43절에 “...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 라고 말씀에서 <유대인> = 유대인 교포를 말한다고 했고,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 이방사람이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말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설교가 끝난 후에도 바울과 바나바 주위를 떠날 줄 몰랐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말씀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복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복음은 한 번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똑 같은 말씀이지만 자꾸 자꾸 듣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후에 부를 찬송 205장의 내용과 같습니다.(1절)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 주시오 / 나 항상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저 뵈지 않는 천국 주 예수 계신곳 / 나 밝히 알아 듣게 또 들려주시오

나 항상 듣던 말씀 나 항상 듣던 말씀 /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그렇습니다. 복음은 듣고 또 들어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30, 40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맛이 있고 먹고 싶듯이 복음도 그런 것입니다.

 

설교를 들은 회중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너무 좋으니 바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가 묶고 있던 집에까지 갔다고 봅니다. 거기에까지 가서 복음을 더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면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첫 번째 설교의 반응은 뜨겁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열정이 여러분에게도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다음주일에는 어떻게 될까? 다음 주일에는 어떤 은혜를 주실까? 설레며 기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 주일이 지나고 또 다시 안식일이 왔습니다. 그 때 반응을 44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말씀 중에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해야 하는지? 그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강조하가기 위한 강조법으로 생각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강조법이라고 하신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문자대로 보는 것이 옳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미국 코헨대학교 부총장 김형종 박사는 문자대로 해석했습니다. 당시 비시디아 안디옥에는 약 50,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20,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원형경기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원형경기장을 만들 때에는 그 도시 사람 5분의 1정도가 들어가도록 지었는데, 비시디아 안디옥에도 시민 5만 명, 그리고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 5만 명 정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첫 설교를 들은 후 한 주일 뒤에는 회당이 아닌 회당 옆에 있는 원형경기장에 비시디아 안디옥 시민이 거의 다 왔다고 했으니, 4만 명 정도는 운집했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김형종 박사의 생각을 취하든, 다른 학자들이 취하는 강조법을 취하든 중요한 것은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싶어서 도시가 발칵 뒤집혔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싶어 모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매 주일마다 설교를 듣고 싶어 더 많은 수가 모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역사를 보고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여기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같은 설교를 듣고도 나타나는 반응은 항상 두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예루살렘교회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같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충만해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설교를 듣고 설교자를 삐딱하게 보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세요, 바울의 설교를 들으려고 오는 무리들을 보고 비방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왜요 <시기 질투>가 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 내려가면 <시기 질투>가 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은 종교에 대해서는 유대교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유대교이지요.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을 전파하자 자기네 쪽 사람들이 바울 쪽으로 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기질투가 났겠지요.

 

둘째, 회당 안에는 개종한 유대인이 있었지만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우리는 1등급, 너희들은 2등급 차별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바울이 등장하더니 그리스도 안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 여자도 구별이 없으며,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된다고> 설교를 하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바울은 괘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질투> 한 것입니다.

그들의 시기질투는 마음으로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말씀을 좀 건너뛰어서 50절로 가 보십시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 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유대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니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 고위층 부인들과 그 성의 유력한 지도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아내어버립니다.

<악의 세력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기질투>를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오히려 비방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6-47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예수님도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복음의 전파대상 첫 번째는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에게 먼저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복음의 물줄기가 그들에게 가야하고, 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데, 유대인이 복음의 물줄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그러나다 막힌 곳이 있으면 그곳을 피하여 더 낮은 곳으로 방향을 바꾸어 흘러갑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하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복음의 물줄기가 마땅히 유대인에게 흘러가야 하는데, 너희들이 복음의 물줄기, 축복의 물줄기를 막지 않았느냐? 그래서 물줄기가 이방인으로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모태신앙인인 성도님들과, 3대, 4대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잘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문으로 통해서 흐르는 복음의 물줄기, 축복의 물줄기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에게 계속 이어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복음의 물줄기를 끊어지는 가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목사요, 장로요, 중직자인데 후대에 내려가서 복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이런 가정이라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은 복음의 물줄기가 여러분에게로 흘려오도록 기도하시고, 물줄기가 올 때 그대로 수용하셔서 복음이 주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렇게 유대인에게 대답하자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합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 자격 없는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으니 기뻐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예정설을 말하지요.

 

그 다음 49절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두절은 쫓겨나는 바울과 바나바의 행동과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51-52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바울이 핍박하는 자를 향해 발의 티끌을 떨어버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누가복음 10장에서 칠십인 전도대를 파송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받지 않거든 <먼지를 떨어버리라(눅 10:11)>고 가르친 대로 한 것입니다. 미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복음을 받을 자가 없다, 미련하게 거기 앉아 가지고 핍박을 받고 눈총을 받으며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빨리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고니온>으로 선교지를 옮깁니다.

<이고니온에서 선교한 내용은 14장에 이어지는데 14장은 2018년 1월 둘째주일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보면 핍박으로 선교지를 옮기는 바울과 바나바의 마음의 상태를 <기쁨이 충반하고, 성령이 충만했다(52절)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제대로 믿는 자의 마음 상태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항상 <기쁨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자 어떻습니까?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과 결과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이 복음 안에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이것이 설교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교회에 이런 복음의 역사, 설교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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